배우
문소리의 연출작 <
여배우는 오늘도>는 세 편의 단편 <여배우> <
여배우는 오늘도> <
최고의 감독>을 묶어 만든 장편이다. 영화는 개봉에 즈음해 한국과 한국 영화 산업 내에서 ‘여배우’로 사는 일의 직업적 피로와 ‘여배우’이기에 겪는 부당함에 대해 말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가 당대의 사회적 문제의식과 맞물려 영화 외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역시 <여배우는 오늘도>가 품고 있는 힘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반향에서 얼마간 떨어져 조금 더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배우 문소리가 연출자로서 스스로 기대한 바와 고민한 지점은 무엇인가. 한 작품에서 연출과 연기를 병행하는 감독 겸 배우는 각각의 역할을 수행할 때 무엇을 견지하고 싶어 할까. 특히 ‘여배우’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에서 실제 ‘여배우’ 문소리는 ‘여배우’ 역 문소리를 연기하며 연출까지 함께했다. 이때 문소리는 자기와의 거리 두기와 자기 반영 사이에서 상당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했을 거라 짐작된다.
세 단편은 배우
문소리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영상예술학 영화제작 전공 과정)에서 연출한 작품이다. 나는 작품과 함께 문소리의 석사 학위 논문 「단편영화 <
여배우는 오늘도> 제작보고서-연출을 중심으로-」를 살펴봤다. 논문의 서론에서 문소리는 페델리코 펠리니의 <
8과 1/2>, 아녜스 바르다의 <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등을 언급하며 자의식과 자기 반영의 미학을 드러낸 작품들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단편 <여배우는 오늘도>가 “영화에서 ‘자기 반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큐와 극영화의 어떤 경계에 놓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본인의 연출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 자신을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임을 말한다. 또한 문소리는 “<여배우는 오늘도>는 나 자신을 다각도로 반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 허구의 이야기이며 픽션이다…다큐멘터리적으로 나를 반영하고 있지만 극영화로 관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필자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패러디의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다”라고도 덧붙인다. 문소리의 이 고민은 곧 장편 <여배우는 오늘도>를 관통하는 화두다. 연출자와 배우 사이,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 원본과 패러디 사이, 극 중의 문소리와 극 바깥의 배우 문소리 사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오갈 것인가. 또한 이러한 사이‘들’에 관한 진지한 질문은 영화의 3막에 이르러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보다 확장된 영역에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감독의 부고 소식에 오랜만에 모인 이들은 죽은 감독의 작품을 두고 예술인지, 짜깁기에 불과했는지, 그럼에도 당시 한국에는 없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지 등을 놓고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그렇다.)
앞서 말한 ‘다큐멘터리적’이라 함은 감독
문소리가 세 편의 영화에 직접 출연해 극 중의 배우 문소리를 연기할 때 생기는 ‘리얼리티’의 문제를 말하는 것 같다. 극 중의 배우 문소리는 어디까지, 얼마나 ‘진짜의’, ‘사실의’, ‘실제의’ 배우 문소리와 비슷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극 중 문소리와 극 밖의 문소리를 동일시하는 입장들에 대해 문소리는 상당히 경계하는 것 같다. 논문에서 밝히듯 문소리는 숏의 구성을 두고 극 중 문소리를 클로즈업하거나 단독으로 보여줘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식, 즉 ‘나르시시즘적’으로 보일만 한 숏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반면 극 중 문소리는 주변 인물들과 함께 하거나 블로킹 되는 위치에 있다. 같은 의도에서 2막에서 문소리가 시골길을 미친 듯 뛰어가는 장면이 와이드 숏으로 찍혔다. 이 경우는 거리를 둔 촬영이 인물이 처한 답답한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거리를 두는 방식에 대해서라면 숏의 구성과 더불어 몇몇 장면도 함께 말해볼 수 있다. 극 중
문소리는 종종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민낯과 마주한다. 그때의 문소리는 ‘여배우’라는 이유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화장을 해야 하거나 지워야만 한다. 이 순간, 거울 앞의 문소리는 배우이기도 하고(또는 처한 상황 때문에 배우여야만 하고) 배우가 아니기도 하다(또는 처한 상황 때문에 배우가 아니고 싶다). 2막의 또 하나의 장면도 그렇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 위를 걷는 TV 속 문소리를 보며 딸아이가 “엄마”라고 하자 TV 밖 문소리는 “엄마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부정은 무엇인가. 직업으로서의 배우 문소리와 연기하지 않는 일상의 문소리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있음을 문소리 스스로가 아주 냉철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때의 부정은 자신은 TV 속 문소리인 동시에 TV 속 그 문소리가 아니라는 자기 인정이다. 한편, <
여배우는 오늘도>는 ‘패러디’라는 방식만큼은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문소리 하면 떠올릴 법한 이미지, 그녀 연기에 대한 평가, 경력, 수상 이력 등을 가져와 ‘여배우’의 현재, 가정사와 배우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여배우’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기 반영적 패러디가 가능한 것은 실제 문소리가 자신이 걸어온 배우로서의 궤적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와의 거리 두기와 자기 반영의 방식은 마침내 3막에 이르러 자기 성찰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문소리가 죽은 감독이 남긴 영상을 그의 어린 아들과 함께 볼 때 그녀가 흘린 눈물은 단순히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뜻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찾는 이 없는 잊힌 감독의 죽음, 영화적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아 있는 영상, 그것을 바라보는 어느 ‘여배우’의 심정은 ‘슬픔’의 감정만도 아닐 것이다. 극 중 문소리의 짧은 울음 뒤 영화는 마침내 공동묘지와 그 옆을 걷는 문소리와 일행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문소리는 이 장면을 다시 보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극장의 풍경을 떠올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문소리는 “연기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느냐”는 신인 배우의 질문에 “될 때까지 하는 거지, 계속”이라 말한다. <
여배우는 오늘도>를 통해 연기와 연출 작업에 질문을 던지던 문소리는 그렇게 영화를 통해 잠정적인 자기 대답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