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김순옥
이름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붙여진 이름이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부르고, 나의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알려주며 불리길 바란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비록 단순 호명일 지라도 그 순간 접속되고 관계가 생성된다. 이름은 나의 것이지만 나를 부르도록 혹은 내가 응답하도록 하는 타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름에서 시작한다. 아니 이름들에서 시작한다. 김순옥, 김순악, 왈패, 사다꼬, 데루코, 요시꼬, 마시다케, 위안부, 기상,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주정뱅이, 개잡년, 깡패 할매, 그리고 순악씨. 다중의 목소리로 불리는 이름들은 한 사람을 가리킨다. 한 사람의 여러 이름은 그 사람의 여러 모습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는 김순옥에서 수많은 사회적 명칭을 경유해 순악씨로 불리워진 한 여성의 인생 여정을 담는다.
태어나서 부모와 가족에게 불린 이름은 김순옥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등록하러 가서 ‘옥’자는 양반녀식에게 쓰는 이름이라 그 자리에서 김순악이 된다. 번역조차 불가한 고유명사인 이름이 순간적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순옥과 순악은 모음 위치를 살짝 옮긴 것 뿐이지만 옥과 악의 뉘앙스 만큼이나 사회 계층의 극단적 격차를 드러낸 사례이다. 그렇게 김순악이 된 김순옥 할머니는 번역불가한 이름이 다양하게 번역되어 호명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세 명의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김순악 할머니의 증언을 읽어나가고, 세 명의 여성 활동가의 목소리로 할머니와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할머니를 재구성하고 재현하는 이들 목소리는 사실 누구를 말하는가 만큼이나 누가 말하는가 역시 놓치지 않는다. 이들 여성들은 단순히 할머니를 재구성하기 위해 목소리를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가진 능동적 발화자이다. 여성들은 처음에는 대변자이자 대리자로 출발하지만 점차 할머니와 겹쳐져 동일시 되다가 여성의 집단적 경험을 표상한다. 동시대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김순악 할머니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
보드랍게>(
박문칠, 2020)는 이름을 가진 자와 이름을 부르는 자를 이어내면서 이름을 부르는 자 또한 이름을 가졌음을 연결해내면서 발화의 능동성과 수행성을 짚어낸다.
영화는 김순악 할머니를 위안부 피해자로만 가두지 않는다. 인간 김순옥 혹은 김순악 아니 왈패, 미친개, 술주정뱅이... 순악씨로 그녀를 짚어낸다. 영화는 결국 마지막에 직접적으로 말한다. “한 인간의 삶을 특정 부위만 확대하고 그것만 이야기”하지 않겠노라고. 지금까지 일본 위안부를 다룬 작품과 사뭇 다른 지점이다. 다수의 위안부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은 은폐되고 왜곡된 일본 위안부가 실재함을 알려내는데 주력해야 했기에 피해자의 존재와 피해자성에 주목해왔다. 은폐되고 지워진 일본 위안부 사건을 수면에 올리고 사실여부를 밝혀나가기 위한 필연적인 스토리텔링 방법이었다. 이 경우 할머니들은 피해자이자 긴 투쟁을 이끌어가는 용기있는 영웅이기도 했다.
<보드랍게>도 일련의 작업의 연속선상에 있다.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위안부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기억하고 보관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로만 할머니를 한정시키거나 그 특정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 김순악의 삶의 여정 전반을 풀어내면서 그녀 인생에서 사건의 맥락을 풀어낸다. 따라서 그녀의 수많은 이름들은 그녀를 읽어내는 거울이다. 영화는 그녀의 다층적 모습을 조각 맞추기 하면서, 조각을 맞춘 여성들과 연대를 꾀한다. 위안부 피해자로 혼자 외롭게 고군분투 살았던 할머니가 동료를 만나 세상과 소통하고 투쟁하는 모습은 동시대의 미투 운동에서 커밍아웃한 여성들에게 용기를 심어준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위안을 받으면서 “참 애 묵었다”는 말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고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영화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자 가장 짧은 서사로의 영화 제목이자 영화의 이름은 70여분의 관람 후 같지만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특히 <보드랍게>를 번역한 영문 제목 <Comfort> 의 간극은 이 영화의 가장 서늘한 지점이자 아픈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