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여성 환자가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 당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예측 가능한 전개가 있다. 경찰서로 곧장 달려가는 대신 피해자는 침묵 속으로 침잠하고, 때로는 당일 자신의 행적을 복기하고 혹시 자신의 실수나 방심이 사건을 유발한 게 아닐지 고민하며 그 과정에서 고통은 증폭될 것이다. 그러다 분노의 크기가 고통을 압도할 때, 마침내 신고할 용기를 낼 것이다. 그렇다고 법적 고발이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이 될 리 없다. 가해자가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동안,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아이러니와 혹 조사 과정에서 주변에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아닌지, 2차 가해의 위기를 감내해야 하는 것도 피해자의 몫이다.
그런데 이 짐작 가능했던 전개는 뜻밖의 지점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20대의 가해자와 69세의 피해자. 인물들의 나이가 명시되면서 이 범죄 사건에는 또 다른 층위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60대의 여성이 성범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입꼬리를 실룩대며 효정을 바라보고, 마치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데에도 엄격한 연령 제한이 있다는 것처럼 ‘젊은 남성이 나이든 여성을 성폭력 했을 개연성이 부족하다’ 라는 이유로 법원의 구속 영장은 기각된다. 영화의 배경이 2012년으로 뚜렷하게 명시되고, 성폭력 특례법의 제정 시기와 내용이 대사 속에 언급된 것으로 미뤄 짐작건대, 분명 그간 효정과 유사한 성폭행 사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 법적 장치가 마련된 모양이지만 ‘영화가 감시자의 역할’을 한다는
임선애 감독의 말을 믿는다면, <
69세>는 2020년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한 이야기다.
<69세>는 성폭행 피해자인 효정이 마주하게 되는 편견과 차별을 통해 노인 세대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혐오를 하나씩 찬찬히 묘사한다. 노인 세대의 여성이라면 ‘절대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쉽고 만만한 범죄 상대로 물색한 악랄한 가해자에 대해 분노하고 응징을 응원하는 것까지는 쉽다. 세대 간의 갈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소 작위적으로 묘사된 젊은 세대들의 고약한 행각에 함께 혀를 차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선량한 칭찬처럼 -‘뒤에서 보면 처녀 인줄 알겠네’ ‘노인치고는 옷을 깔끔하게 입으시네’ - 무심히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편견과 혐오의 흔적을 헤아리다 보면 기시감과 자괴감이 동시에 든다. 나도 분명 언젠가 그것이 관심과 친절인양 비슷한 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효정을 차별하는 사회, 효정이 인내해야 하는 대상들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하물며 무성의 존재로 취급되고, 성폭력 문제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69세의 효정은 – 내가 무탈하게 오래 살아야 당도할 수 있는 나의 미래이건만.
잠재력, 가능성 같은 단어들로 젊음이 과대 포장되는 동안, 노년에게는 자격을 박탈하듯 미래, 희망, 변화, 성장 같은 단어들이 지워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처럼 소외되고, 마침내 사회의 속도와 효율을 따라가지 못하는 곤란한 방해물로 여겨질 것이라 생각하면, 노년은 자주 외면하고 싶은 미래이자, 지은 죄도 없이 치러야 하는 억울한 죗값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막연한 ‘죽음’보다는 오히려 신체로 체감되는 구체적인 ‘노화’가 두렵게 느껴질수록 노년은 가능한 대상화하고 싶은 ‘남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69세>에는 효정의 지난한 투쟁을 돕는 젊은 세대의 전문가가 등장하지 않는다. 결단과 행동의 주체가 되는 것은 오로지 노년의 효정과 동인이다. 효정은 성폭행 사실을 신고한 다음 나름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며 동분서주하고, 그동안 동인은 고발장을 작성해서 경찰서와 병원을 드나든다. <69세>는 노년의 주인공들이 삶을 인식하고, 삶을 소유하고,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의 부피를 자신하지 않으면서도 체념하거나 타협하는 대신,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시간을 우아하고 성실하게 – 그래서 마침내 존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