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되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장르의 컨벤션 안에서 다양한 주제와 캐릭터들이 뛰놀기 때문에 비슷한 색깔을 가지면서도 그 정취가 제각각이다. 음식으로 비교하면 만두 같다. 밀가루 피는 다 비슷하지만 그 안에 고기, 김치, 두부, 야채, 새우 뭐 하여간 뭐든지 집어넣어 쪄버리면 만두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속 내용물은 보지 않고 밀가루 피로 싼건 다 똑같다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장르 영화가 잘 안 나온다. 나와도 망한다. 가끔은 ‘한국형’이라는, 일단 붙으면 뭐든 후져보이게 만드는 수식어를 붙여서 등장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것도 대충 망한다. 아마 많이 안 만들어 봤으니 노하우도 적고, 노하우가 적으니 잘 만들어지기가 어렵고, 잘 만들어지기가 어려우니 관객들도 잘 안보고.. 의 악순환이 진행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독립영화에서 이런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하고 경험을 가진 감독들이 상업 영화로 넘어가 규모와 재미를 확장시킨다면 아주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안 된다. 2000년대 초중반, 단군 이래 영화계에 돈이 가장 많이 몰렸다던 그때. 이런 시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감독들은 상업 영화로 넘어오면서 더는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종종 공포, 스릴러의 영화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왜인지 대체로 신인감독이 연출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결과물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 한국에서 장르 영화는 정말 안 되는 걸까?
이돈구 감독의 <
팡파레>(2019)는 그래서 참 반가운 영화였다. 상업, 독립 영화를 통틀어 이런 유의 장르를 만난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할로윈 밤. 제이(
임화영)은 우연찮게 막 할로윈 파티가 끝나고 영업을 정리 중인 술집에 들어가게 된다. 데킬라를 한 잔 시켜서 마시고 있으니 2인조 형제 무장 강도가 들이닥쳐 제이는 인질이 된다. 그러다 동생 희태(
박종환)은 우발적으로 가게 사장을 살해하게 되고, 양아치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과 달리 전과도 없고 무려 사이버 대학까지 나온 집안의 기둥, 희태를 지켜야하는 강태(
남연우)는 이 일을 무마하려 평소 알고 지내던 깡패 쎈, 졸라 쎄서 쎈이라고 불리는 쎈(
이승원) 형을 부르게 된다. 현장에 도착한 쎈은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하기로 하고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무려 VIP 고객이란다.) 살인청부업자 백선생(
박세준)을 또 부르게 된다. 이렇게 한 공간에 모이게 된 5명은 시체를 처리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한 후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처럼 일이 잘 안풀린다.
<팡파레>의 재미 정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를 좋아해서 맨날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삼촌이 유명하거나 볼 만한 영화는 이미 다 봤고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골랐는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고른 영화에 해당한다. 유명하지도, 어마어마한 뭔가가 숨어 있지도 않다. 다만 한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다섯 명이 서로 해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예산 독립 영화이니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깡패, 살인청부업자, 사이버 대학을 나온 집안의 기둥 등 뻔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묘하게 나사가 빠져있거나, 기존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기는 재미가 있고 또 캐스팅이 상당히 잘 되어있어 연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맛도 좋다. 특히 쎈 역의 이승원과 백선생 역의 박세준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모습을 상당히 즐겁게 보았다.
이돈구 감독은 데뷔작 <
가시꽃>(2013)으로 주목받은 후 곧장 꽤 큰 규모의 차기작 <
현기증>(2014)을 발표하며 여러 사회문제를 다소 강한 톤으로 그려왔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오로지 재미만 생각한 것 같은 <팡파레>를 내놓았다. 묘하게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의 행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흥미롭다.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