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 배경이 나오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이 영화들 속엔 극장에 가면 으레 마주하게 되는 것들이 ‘비치’되어 있다. 예컨대 오래 된 얼룩을 머금은 카펫, 늘 같은 옷을 입고 시간을 때우는 우울한 얼굴들, 매대에 쌓여있는 오래된 과자들 등 새로운 것은 ‘1’도 없는 이 극장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아련하고 뭉클하다.
임권택 감독의 <
하류인생>, 주세페 토르나토르의 <
시네마 천국>,
임순례 감독의 <
우중산책> 이 내겐 그런 영화들이었다. 보고있어도 그리운 영화. 그리고 이 리스트에
전지희 연출의 <
국도극장>이 추가될 것이다.
<국도극장>은 을지로에 있던 그 전설의 국도극장과는 아무 상관 없는 또 다른 국도극장의 이야기다. 영화는 주인공 기태(
이동휘)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자신의 고향, 벌교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고향이라고는 하나, 컴컴한 집에서 기태의 끼니를 챙기는 병든 노모(
신신애)를 제외하고 그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기태는 지인의 소개로 초등학교 동창, 영은(
이상희)의 뒤를 이어 동네 국도극장에서 잡일을 시작한다. 잡일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이 극장에서 필요한 모든 일이 누군가의 업무로, 역할로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을 모토로 수 십년을 버텼던 이 극장의 직원은 간판쟁이 오씨(
이한위), 박기사 그리고 앞으로 ‘매표부’ 외 모든 것을 책임 질 기태가 전부다. 국도극장을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기태에겐 초라하고 구태의연하다. 매점 구석에 놓여있는 고장 난 컴퓨터부터 골방에 앉아 허구헌날 소주와 담배로 시간을 때우는 오씨, 그리고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가물에 콩나기로 오는 관객을 맞는 자신까지 말이다.
그럼에도 무기력과 우울함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기태에게 서서히 재활의 생기를 불어 넣는 것 역시 이 존재들이다. 어느 때든 서로가 내킬 때, 오씨와 쭈구리고 앉아 담배를 나눠 피는 시간이, 싸구려 비빔밥과 소주 콤보를 사랑하는 영은과의 외식도 기태에겐 기다려지는 일상이 된다. 오씨가 그리는 간판만큼이나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구닥다리 영화들 까지도 말이다. 서울에서 한번도 의미 있지 않았던 것들 혹은 의미 있을 수 없던 것들이 그렇게 영혼의 기력이 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로 떠나는 영은으로 인해 돌아갈 명분이 생겼을 때, 그리고 회사에 다시 다닐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기태는 국도극장에 남기로 한다. 암에 걸린 오씨가 수술을 받기 위해 잠시 병원으로 떠나야 했을 때도 기태는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 그렇게 국도극장은 기태의, 그리고 앞으로 돌아올 그 누군가의, 터전이 된다.
영화는 ‘아직도’ 극장을 채우고 있는 하릴 없는 ‘로우 라이프(low life)’들의 이야기인 만큼, 특이하지도, 특줄나지도 않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공간의 향수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특히, 배우 이한위의 압도적인 연기는 이 작은 영화의 거대한 스펙타클이다. 그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호남 사투리는 아마도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등장한 사투리 대사 중 가장 적확한 기능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올곧은 자세와 시선으로 등장하지 않는 그가 보여주는 좁고, 구겨진 뒷모습은 덧 없는 인생의 완전체이자 삼라만상을 품은 인간의 형상이기도 하다.
영화의 또 다른 스펙타클, ‘극장’ 속 공간은 에드워드 하퍼(Edward Hopper)의 ‘밤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다이너(diner)만큼이나 휑 하지만 감독 전지희는 이 공백을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극장의 오브제들로 채운다. 가령 기태가 오씨에게 건네 받는 일반티켓과 조조티켓 뭉치, 나무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좌석 배치도 등 ‘소싯적’ 극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존재들 말이다. 결국 <국도극장>은 소멸위기에 있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존재’의 재발견을 종용한다. 그것은 기태를 통해 재발견되는 인간들, 물체들 뿐 아니라 이 영화가 수고를 들여 비추는 작고 흔한 자연의 존재들 – 예컨대 극장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던 초승달이나, 가을 직전이 되면 고개를 내 빼는 앞 마당의 작은 들꽃 – 의 재발견을 포함한다.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의 ‘미물(美物)’들을 기특한 눈으로, 애정을 눌러 담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선을 ‘발견’한 것은 매우 필연적이고 다행스런 사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