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행>(
연상호, 2015)은 (마치 6.25때처럼)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울을 버리고 부산에 다다르기 위한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가족을 위한 헌신이라는 마침표로 완성되었다. 부산행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을 그린 <
반도>(2020)는 어디로 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한반도를 버리는 이야기다. 북한은 38선으로 보호받은 듯 보이기 때문에 한반도라기보다는 대한민국이 소멸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심에 있는 가족 이야기로 따지면 <반도>의 가족은 수차례의 슬로모션을 거치며 천천히 결말을 향해 간다.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에 관객이 반도 차지 않기도 했지만, 웃을 법한 장면에서도, 놀랄 만한 대목에서도, 울컥할 만한 신에서도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사실이 내내 신경쓰였다.
<부산행>이 끝난 뒤, 대한민국은 좀비의 땅이 되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부산마저 좀비에 점령당했다. 가까스로 부산을 출발한 배에 탑승한 군인인 정석(
강동원)은 누나와 조카를 배 안에서 발생한 감염으로 잃고, 매형인 철민(
김도윤)과 홍콩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한국말을 쓰면 극심한 차별을 당하는 상황이고,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도 어렵기만 하다. 정석은 홍콩의 범죄조직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달러를 가지고 나오면 그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현금을 가득 실은 트럭이 목동 오목교 근처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정석은 철민을 포함한 한국 출신자들과 네 명으로 된 팀을 꾸리고, 그 돈을 가지러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향한다. 인천항에서 목동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아포칼립스 서울의 모습이 드러난다. 웃자란 식물이며 아무렇게나 버려진 차량들 사이로, 소리와 빛에 반응하는 좀비들이 돌아다닌다. 정석 일행은 인천항에서 오목교 왕복이 수월하리라 생각하지만, 차를 발견해 빠져나오려는 순간 조명탄이 그들 앞에서 터진다. 정석은 도움을 제안한 준이(
이레)와 유진(
이예원)을 따라 간신히 빠져나온다.
<반도>의 서울 풍경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는데, 인천항에서 오목교까지, 그리고 시내 곳곳이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뚫려있다는 것이다. 좀비가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생존자들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는 셈이다. 631부대라고 불리는 군인들은 브레인격인 서 대위(
구교환)와 좀비 대응에 강한 황 중사(
김민재)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한편 정석은 생존자인 준이, 유진, 민정(
이정현), 김 노인(
권해효)을 만나 군인들이 가져간 현금차량을 가지고 홍콩으로 가자고 설득한다.
<부산행> 세계관의 연장에서 기획된 작품이기 때문에 <반도>는 <부산행>과 비교당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관객이 <반도>를 보기로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부산행>에 대한 호의가 보답받기를 기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반도>의 주요 인적구성은 <부산행>때와 비슷한 데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하면 군인들을 제하면 ‘그림체가 같은’ 인물구성이 눈에 띈다. 중심에 있는 공유와 강동원, 정유미와 이정현, 김수안과 이예원이 그렇다.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가족 이야기로 마무리된다는 것 역시 그렇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서의 흐름은 두 작품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가장 차별화되는 공간과 인물 구성은 바로 631부대다. 서 대위와 황 중사는 군인들의 구심점에 있으나 서로 불화하고 있으며, 서 대위가 군인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식료품의 배급과 잡아온 생존자들과 좀비를 싸우게 해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인들의 생존력이 어떻게 다듬어졌는지는 잘 보여지는데, 민정이 이끄는 두 소녀와 치매 노인 쪽은 무슨 수로 살아남았는지 영화 속 정보로는 파악이 어렵다. 문제는 슬로모션이 수시로 등장하는 후반부다. 정서의 흐름이라는 면에서 이미 <부산행>으로 학습을 마친 관객은, 반복되는 슬로모션으로 지연되는 결말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된다. 긴장감있는 에피소드와 액션이 인간과 좀비 사이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니 지루할 틈은 없다. 하지만, 감정은 학습한 대로 흐르고 심지어 슬로모션으로 자꾸 지연된다. 재미있지만 동시에 시큰둥한 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예상한 감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