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한 인간의 업적과 과오, 명암이 고루 담긴 사실적 전기(傳記) 영화는 더욱 만들기 어려운 것 같다. 예전에 한 원로 가수의 전기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 몇몇 제작자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한 적 있다. 기획은 괜찮지만 내가 강조한 몇 개 에피소드 때문에 모두 힘들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분이 직접 TV에 나와 말씀하신 일화들인데요?” 하지만 당사자보단 그 일과 관련한 다른 이들의 반발이 거센 경우가 많다. 귀신같이 알고서 딴지를 걸어온다고 한다.
피해당사자보다 오히려 가해자 쪽에서 명예 훼손을 문제 삼고 나온다.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왜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내느냐? 내 자식들이 봐도 괜찮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 이런 입장을 가진 모두와 만나서 허락을 구하는 일은 힘들고 괴롭다. TV의 르포 프로만 봐도, 인터뷰만 요청했는데 경찰부터 부르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 에피소드를 빼려니, 이 인물을 묘사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럼 이 분의 전기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요?”, “그냥 픽션으로 만들어. 그게 편해.”
실화를 모티브로 한 범죄물이 주로 이런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가명의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가 나온다고 근원의 현실이 휘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고통이 전시에 그치거나, 2차 가해에 가까운 과도한 표현을 하거나, 연출의 시선이 가해자의 시점과 동일시되어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는 우를 범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꼭 모티브가 된 사건을 검색해본다. 영화에서 현실성과 사실주의를 담보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은 물론 표현의 자유이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다. 내가 오로지 남자들만 나와서 치받고 죽이는 완전 픽션을 볼 때 좀 더 안심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모사(模寫)하는 매체이기에 특별히 민감하게 현실과 선을 긋는다. 그래서 외국 영화의 엔드 크레딧 말미에는 ‘This is a work of Fiction. 이 작품에서 묘사된 이야기, 모든 이름, 캐릭터 및 사건은 허구적인 창작입니다…’로 시작하는 문구가 꼭 들어간다. ‘허구의 면책’을 명시한 조항은 즉 과거에 있었던 소송의 결과다.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 암살 사건을 영화화한 MGM의 1932년 영화 <Rasputin and the Empress>가 고소를 당한 이후로 할리우드 영화에 이와 같은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역시 언젠가부터 비슷한 문구를 넣고 있다.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개인과 단체의 프라이버시와 명예 훼손을 피하다보니, 한국 영화에선 존재하는 고유한 지명조차 없는 지명을 만들어 대체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땅값이 떨어진다고 지역 주민이 반발한다는데, 의외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 속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지역을 자주 접한다. 예민한 관객에겐 가짜 지명이 꽤나 신경 쓰인다. 2시간 동안은 이 픽션이 현실이라는 착각에 온전히 빠져들어야 하는데 적잖은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입장에선, 현실에 없는 지명을 지어내는 순간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 한국사회 같은 핍진한 작품을 쓰려 했는데, 대신 어떤 한국적인 총체의 원더랜드를 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가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차라리 한국 영화용 지명을 미리 정해서 영화사나 작품별로 공유해 쓰면 어떨까? 가령 상남자 픽쳐스라는 제작사에서 만드는 모든 남성폭력영화는 ‘한남시’를 배경으로 한다던가. 그럼 굳이 ‘유니버스’를 따로 만들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농담을 하는 중이다. 한국 영화 전체를 하나의 유니버스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한국 영화는 왜, 이른바 “다이내믹”한가? 한국이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한국의 근대사는 영화화해서 보고픈 온갖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 다이내믹 코리아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뒤흔들고 재정립한 몇 차례 이벤트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여러 번 영상화가 이루어진 10.26이다. 1979년 10월 26일, 종신 집권에 함몰해있던 독재자가 야심한 밤 별채에 여가수와 모델을 불러다 놓고 최측근과 술 마시며 놀다가 정보기관장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였던 유신이 멱살 잡아 끌어내려지듯 막을 내렸으나 민주주의 대신 신군부라는 새로운 도둑들이 나타나 또 다른 유혈을 불러왔다. 그 잔재와 상처는 지금도 남아 현재진행형이다. 유신의 망령까지 오래 남아서, 그 부왕과 영애를 신격화한 추종자들 세력도 여전히 건재하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정확한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궁정동 안가는 독재자의 권력을 국가와 괴리시켜놓은 은밀하고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날 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 경호실장과 충성 경쟁을 하던 2인자이자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못 하는 게 없었다고 할 만큼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가 왜 그날 갑자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되었을까? 거사는 사전에 계획되었나, 순간의 충동이었나? 그는 “혁명적 민주 투사”였을까,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 사건의 맥락 혹은 복선을 찾다 보면 또 다른 미스터리만 만날 뿐이다. 토사구팽 당한 뒤 정권을 저격한 회고록으로 살 길을 노리던 이전 정보부장은 시체도 찾질 못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그는 양계장 모이가 되었을까, 외교행낭 컨테이너에 실려와 청와대 지하 벙커 사격장의 표적이 되었을까?
신상옥 감독의 <
증발>(1994)은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델로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5.16 군사정변부터 10.26까지 18년의 시간을 밀실에 갇힌 사내들의 히스테리와 궁정동 여인들의 비소로 채운, 유신의 형이상학적 다이제스트다. 만약 한국판 <살로 소돔의 120일>을 찍는다면 바로 이 영화 같을지 모른다. 당시 독재자 역은 (누구도 맡으려는 한국 배우가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계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초대 <스타트렉>의 ‘술루’ 역할로 유명하다)가 이강식 성우의 목소리로 연기한다. 주로 미국에서 찍은 걸로 알려져 있고, 배우의 동시 녹음과 성우의 후시 더빙이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뒤섞이며, 고증과 상관없이 현대 배경으로 옮겨 오프닝부터 곳곳에 80년대 시위 현장을 찍은 실제 기록 영상을 삽입한 이 영화는 아시아 어딘가에 있을 어느 정신 나간 독재정권을 그린 SF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까 조지 타케이가 극중에 그냥 영어나 일본어로 말해도 영화를 보는데 있어 위화감은 전혀 없었을 것 같다.
실제로 감독은 애초 이 영화의 배경을 남미의 가상 독재국가로 옮겨 찍을 계획이었다. 주연으로 진 핵크만을 내정했었다는 이야기가 옛날 뉴스 기록에 남아있다. 파리에서 붙잡혀 컨테이너에 실려 한국으로 온 전 국가보안부 장관(
김희라)은 이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가 “혁명의 배신자”로서 독재자의 뜻에 반기를 든 계기는 과거 자신의 공작으로 파멸시킨 교수의 딸(
강리나)과 우연한 조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당하는 끔찍한 폭력을 밀실의 모니터로 지켜보았다. 얄팍한 죄의식을 되갚아주기 위해 놓은 이중의 덫은 황당한 비약이지만, 파리에서 김희라가 요원들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강리나의 피아노 연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독재자 면전에 “누가 당신더러 십자가를 져달라고 했습니까?” 일갈한 친구의 처형을 목격한 현 보안부 장관(
신성일)은 총구를 돌릴 대상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10.26을 다룬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영화일 <
그때 그사람들>(2005)은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나온 영화들 중 단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정점에 도달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이 블랙 코미디는 이 글에서 다루는 10.26 소재의 작품 중 가장 희극적이지만, 의외로 객관적이고, 아마도 사실에 가장 근접한 해석이란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는 이 작품 이후 정치적인 소재를 놓고서 대범하게 낄낄거려본 적이 없다.
대책 없이 저질러진 거사는 예정된 실패를 향한다. 영화는 권력자와 2인자들 사이 암투보다는 그들 바로 아래의 하수인과 관련자들에게 집중한다. 엄한 시간 엄한 장소에 있었던 실무자들과 두 여인의 비애가 있다. 압권은 오프닝에서 “어르신”의 성은을 입은 딸의 몸값을 셈하러 왔던 극중 명칭 ‘철없는 엄마(
윤여정)’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에필로그 속 그들의 말로다. 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이 한 짓들 보라는 식의 말투로, 관객의 입장에서 이 황당무계한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실소한다. 취조실에서 얻어맞는 정보부장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 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는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렇게 말하고 끝이다. 어르신의 실제 장례 영상이 나오는 엔드 크레딧에서 오열하는 시민들까지 보면 관객의 실소는 웃다 못해 울고 싶은 기분으로 변한다.
공교롭게도 현 시점에서 코로나 직전의 마지막 극장 흥행작이 되어버린 <
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2019)은 앞의 영화에서 관심 있거든 찾아보라고 한 그의 진술을 마지막 장면에 실제 음성으로 들려준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김충식의 논픽션이 바탕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을 실명으로 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이럴 거면 원작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그들의 이름을 이 시대에까지 볼드모트 취급을 해줘야 하나? 글 서두에서 장황하게 떠든 만큼,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쉬운 대목이었다. 겁쟁이들은 용감한 자가 먼저 간 길을 따라 가고 싶으니까.
“이 영화는 1979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바탕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40일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 [남산의 부장들]을 바탕으로 실제 사건에 기초했으나, 일부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임을 밝힙니다.” 나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가 결말에서 굳이 실명의 인물들을 보여주며 끝내는 것이 영화적으로 옳은지 고민했다. 보안사령관의 수사 발표와 중앙정보부장의 최후 진술은 군더더기인가 아닌가?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 끝에 가선 픽션 밖의 사실을 갈구한다. 어떻게든 사건의 의미를 찾으려는 발버둥처럼. 그러나 결국 이것도 영화가 선택한 해석으로서의 사실일 뿐이다. 결국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마음이다. 누구는 왜곡이라 할 것이고 누구는 정론이라 할 것이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 선택을 안 하는 류의 패착을 나는 오히려 완전 픽션인 <
인랑>(
김지운, 2018)에서 보았다. <남산의 부장들>은 연출자의 선택이 분명한 영화다. 그날 밤에 각하에게 총을 쏜 부장은 적어도 혁명과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고민했다고 보는 믿음이다.
야간에 허가 없이 누구도 통행하지 못하는 불 꺼진 세계 속, 야근하는 부하를 불쑥 찾아와 손수 술을 따라주는 상관(
이성민)이 살갑게 속삭인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손 안대고 코 풀기의 미학. 영화는 가장 야비한 용인술로서 권력자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서 조명이 꺼지고 권총을 바꾸러 내려간 부장(
이병헌)이 돌아와 거사를 마치고, 흥건한 피에 미끄러진 다음 일어나 안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롱테이크로 찍어낸 장면은 연기와 연출과 기술이 합쳐진 한국 영화의 밀도가 지금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왔는지 가늠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그래서 10.26으로 야기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게 집어주는 미덕이 있다. 나라를 훔친 새로운 도둑.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묘사된 보안사령관(
서현우)이 어둠 속에 나타나 씬을 훔치고 나라를 훔치는 장면은 섬뜩하다.
10.26을 다룬 이들 세 편의 영화는 거의 10년 주기마다 나온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10.26 소재 영화를 계속해서, 가능하다면 매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온갖 연출자와 작가와 배우들이 이 사건을 끊임없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표현해줬으면 좋겠다. 전 배역이 여배우들로만 이루어진 10.26은 나만 보고 싶은가? 완전히 작정하고 아이돌 주연의 BL로 만든 10.26은 어떤가? 가상 독재국가의 근미래 SF로 옮겨 외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10.26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날 밤의 진실은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현실은 아마도 그 어떤 작품의 묘사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고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활발한 해석은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진실을 요구한다.
10.26 사건은 근대사가 우리에게 준 한국 고유의 원천 스토리 콘텐츠다. 셰익스피어가 부럽지 않은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조합이 여기 있다. 반인반신이었던 국가 원수가 총 맞아 죽는 이야기는 전 세계 관객 대상으로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인류 보편적으로 재미있고 유익하며 교훈이 넘친다. 이미 죽은 자의 추종자들과 아직 살아서 침묵하길 원하는 자들은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 만들기를 계속 어렵게 만들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자유는 국가가 보안 아니 보호해주어야 옳다. 권력자들의 압제 아래 엄혹한 세월을 피와 눈물로 버텨온 피해당사자이자 그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보고 즐길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