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집 이야기 박제범, 2019

by.박아녜스(영화칼럼니스트) 2020-07-03조회 2,546
집 이야기 스틸
서울에서 신문사 편집기자로 일하는 은서(이유영)는 이사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집 계약이 만료되자 어쩔 수 없이 아빠 진철(강신일)의 집으로 짐을 옮긴다. 진철은 은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의 집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진철의 집은 햇살이 거의 들지 않는 괴괴한 공간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줄 만큼 오래고 낡았다. 열쇠공인 진철은 그곳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나머지 가족은 모두 떠난 상태다. 막내 은서는 독립을 이유로, 첫째 은주는 결혼과 함께, 아내 미자는 이혼을 택하면서 집과 진철에게서 멀어졌다. 은서와 진철도 살가운 사이는 아니어서, 서울과 인천이라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도 소원하게 지낸다. <집 이야기>(2019)는 은서가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연민, 이해를 그린 드라마다.
 

<집 이야기>에서는 공간 자체가 제3의 캐릭터 역할을 한다. 우선 진철이 머무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그러하다. 과거 번성했지만 지금은 낙후한 느낌이 강한 이곳의 풍경은 한때 ‘열쇠 장인’으로 불렸으나 디지털 도어락이 보편화된 오늘날 생계를 걱정하는 진철의 삶과 그 모습이 닮았다. 더욱이 인천은 서울에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로, 그럼에도 왕래가 뜸한 은서와 진철의 심리적 거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진철은 직업인으로나 생활인으로서나 변화가 거의 없는 삶을 사는데(일례로 그는 여전히 폴더폰을 쓴다), 하나 특별한 게 있다면 간혹 비행기가 지나는 바닷가를 찾아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인천은 세계에서 손꼽는 규모의 국제공항이 자리한 지역으로 ‘이동’의 공간인 이곳은 영화에서 역설적으로 진철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캐릭터로서의 기능을 가장 많이 하는 공간은 역시 진철의 집이다. 낡은 열쇠 가게와 맞닿아 지어진 그곳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닫힌 공간’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은 시간적으로 단절된 공간이다. 물론 진철은 오늘도 장을 봐 와 그곳에서 밥을 해먹으며 생활을 이어 가지만,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은 네 식구가 살던 시절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사용한 지 십수 년은 돼 보이는 손때 묻은 가구와 낡은 벽지, 은주와 은서가 학창시절 받은 상장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상생활에서 시간의 흐름을 가장 잘 알게 하는 것은 빛의 변화. 우리는 창으로 넘어 들어오는 빛의 질감으로 집 안에서도 대략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창문이 거의 없는 진철의 집은 시간을 읽어 내기 힘든 곳이며, 진철의 방은 특히 더 그렇다. 으레 창문이 있을 법한 자리엔 푸른 바다 풍경이 담긴 오래된 달력이 액자처럼 걸려 있을 뿐이다. 이처럼 진철의 공간에 고립과 단절의 기운이 스며 있다면 정반대엔 은서의 엄마, 미자의 공간이 있다. 진철과 이혼한 후 재혼해 제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 미자의 집은 빛이 가득한 곳이다. 게다가 사방으로 탁 트인 창문으로는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물론 진철이 영화 내내 고립 혹은 부동(不動)의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은서를 통해 삶의 반경을 훌쩍 넓히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일신상의 변화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는 진철이 옮겨 가는 공간과 공간을 세심하게 비춤으로써 진철의 삶을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사실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이 묵은 상처와 갈등을 마주해 화해에 이른다는 영화의 전체 얼개는 크게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집 이야기>는 한 가족의 집(home) 이야기를 집(house)이라는 공간으로 풀어냄으로써 이 같은 한계를 돌파한다. 영화를 전공하기 전 잠시 건축을 배웠다는 박제범 감독은 그렇게 ‘집’ 혹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로 한 인물의 삶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인물의 심리를 공간에 빗대 드러내겠다는 명확한 의지는 영화 표현 면에서 하나의 ‘틀’로 작용해 다소 도식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런 점에서는 배우들의 도움이 컸다. 강신일과 이유영은 자연스럽고 유연한 연기로 각자의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던 부녀가 그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을 설득력 있게 묘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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