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분(
정은경)은 같이 살던 남자가 병으로 죽은 뒤, 고향 태백으로 돌아와 모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지낸다.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한희(
장선)는 이 적막한 마을에서 수강생을 모으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어느 날 밤, 한희는 강습소 앞에서 기웃거리는 영분과 마주하고 둘은 곧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나는 사이가 된다. 혼자 사는 영분과 고아인 한희는 어쩐지 모녀 관계처럼 서로에게 애틋하고 다정해 보인다. 영화는 영분이 오래전 버린 딸이 한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숨길 생각이 없다. 한희 또한 어느새 홀로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희는 긴장감 때문인지 영분과의 강습시간에 숨이 차올라 꺽꺽대며 괴로워하는데,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영분은 자리를 뜨고 만다. 이제 영분은 고향마저 떠나려 하고 한희는 그런 영분을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 둘은 영분이 한희를 위해 필라테스 학원 광고지를 잔뜩 붙여놓은 다리 위에서 엄마와 딸로 대면한다. 바로 이 한 장면의 힘에 이끌려 이 글을 쓴다.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나는 훨훨 날아다니며 다 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아, 끔찍해. 아, 갑갑해”라고 영분은 소리치고 “난 한 번도 안 미웠어. 어떻게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어. 나 낳을 때 어렸잖아. 난 어른이야”라고 한희는 설득한다. 이 장면은 딸을 버린 엄마와 버려진 딸이 몇십 년 만에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이지만, 여기에 우리가 떠올릴 법한 감정, 표정,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용서를 비는 엄마와 원망하는 딸의 상투적인 형상은 여기 없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목적은 단 하나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과와 화해, 혹은 자기변명과 자기연민의 극적인 재현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지 않는 두 얼굴의 교차, 두 얼굴의 서로에 대한 리액션 뿐이다. 영화는 다른 장치 없이 오직 영분과 한희의 얼굴 클로즈업만을 투박하고 간결하게 오가면서 이들의 지난 세월이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와 눈빛을 통해 둘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 불투명한 미래까지 한 장면에 응축시킨다. “나도 살고 싶다”는 엄마와 “나는 잘 살아왔다”는 딸. 통념적인 모성 서사의 구도를 뼈대로 삼으면서도 이 영화가 그 틀 안에서 보존하려는 건 엄마와 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 앞선 한 인간의 개별성을 이 장면은 주시하고 존중한다.
박석영의 전작인 <
들꽃>(2014), <
스틸 플라워>(2015), <
재꽃>(2016)은 버려진 소녀들에게 천착한 세계였다. <들꽃>에서 세 친구는 위태롭게 길 위를 방황하다 모텔에 감금됐고, <스틸 플라워>에서 이들 중 한 소녀는 친구마저 사라진 낯선 곳에서 남들이 버린 음식물을 주워 담으며 연명했으며, <재꽃>에서 그 소녀는 살아남지만, 이번에는 부모를 찾아온 어린아이가 소녀 주변을 맴돌았다. 박석영은 3부작을 통해 생존과 자립의 과정을 거친 소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재꽃>은 확실히 앞의 두 영화와는 차별화된 세계로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3부작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된 어린 여자들을 매번 가혹한 궁지로 밀어 넣어 이들의 생존력을 시험하며 이들의 버려진 상태를 얼마간 대상화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지우긴 어려웠다. 하지만 마침내 <바람의 언덕>에서 박석영은 버려짐의 상태를 전시하는 대신 그것을 남겨짐의 서사로, 남겨진 자의 시선으로 전환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버려지고 방치된 소녀의 상황이 아니라 떠난 여인의 심정 또한 헤아린다. 무사히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안전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어른인 세계. 그 세계는 여전히 험난하지만 적어도 솔직하고 성숙하다. <바람의 언덕>은 그렇게 다가온다.
다리 위에서 영분은 울먹이는 딸을 내버려 두고 떠난다. 그러나 영분이 딸에게 쏟아낸 거친 말들과 캐리어를 끌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위악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영화가 영분에게 선사한 한 장면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영분은 우연히 알게 된 택시기사 윤식(
김준배)과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인생을 되돌리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남자는 그런 영분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한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그 나이 때에도 다 진실이 있어요.” 허름한 주점의 고요함은 이내 영분이 부르는 노래로 깨어나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영분의 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본다. 이 장면의 깊이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딸을 또다시 버려두고 “나도 살고 싶다”며 떠나는 영분의 발걸음을 무책임하다고 탓하지도, 멈춰 세우지도 못한다.
그러니 영분과 한희가 재회하는 에필로그가 이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바람 부는 황량한 겨울의 자연 속에서 마침내 둘이 나란히 앉은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고백하는 목소리는 이들의 해결되지 않은, 모순과 갈등이 진행 중인 내면의 상태인지 모른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겨울의 흔적이 사라진 따스한 풍경을 배경으로 영분과 환희가 꼭 끌어안은 모습이 담겨있다. 그 풍경의 평화로운 온기는 ‘바람의 언덕’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