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정직한 후보

by.김나현(중앙일보 기자) 2020-04-07조회 7,507
정직한 후보 스틸
주상숙은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도 되는 걸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명의 브라질 영화를 원작으로 한 <정직한 후보>(장유정, 2019)는 기막힌 설정 한 줄이 큰 몫을 하는 영화다. 늘 거짓말을 하던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하게 되면서 겪는 해프닝이 핵심 요소다. 이런 설정이 재미있는 건, 정치인은 무릇 청렴한 공직자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도) 그렇지 않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단단하게 형성돼 있어서다. <정직한 후보>는 이런 사회적 인식을 가볍게 흔들어 코미디를 만든다. 하지만 참신한 설정에 기대는 서사일수록, 마무리가 중요한 법. 그런 맥락에서 <정직한 후보>의 ‘국민뻥쟁이’ 국회의원 주상숙이 ‘진실의 주둥이’를 얻게 된 후가 더 궁금했다.

먼저 짚고 갈 게 있다. 주상숙은 ‘뻥쟁이’ 시절부터 막나가는 진실 폭탄 발언을 할 때까지 한 번도 관객의 호감을 잃지 않는다. 주식 내부 거래, 사학재단 비리, 자녀 군입대 비리 등 ‘비리 3종 세트’를 시원하게 저지르는 데도 말이다. 이는 장유정 감독과 그가 주인공 성별까지 바꾸며 캐스팅한 배우 라미란의 눈부신 컬라버레이션 덕분이다. 대중 영화의 주인공으로 잃으면 안 될 호감도와 가벼운 현실 풍자를 모두 잡아낸, 흔치 않은 성과다. 
 

 
극중 주상숙은 거짓말을 못하게 된 후엔 노련한 선거전략가 이운학(송영창)을 기용해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하지만 밉지 않은 주상숙에게 용서할 수 없는 치부가 있다. 이미지 전략으로도 커버할 수 없어 이운학이 주상숙을 배신하게 되는 큰 문제다. 그건 주상숙이 살아 있는 할머니 김옥희(나문희)를 두고 ‘운명을 달리했다’고 공론화해 동정표를 얻은 과거다. 김옥희는 호적상으론 사망해, 숨어 살고 있다. 김옥희 건은 이 영화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갈피다. 절대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을 해버린 정치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극은 주인공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를 처벌할 것인가, 눈감아 줄 것인가. 여기엔 이 영화가 지닌 윤리적 결정이 있다. 

<정직한 후보>가 내놓은 답은 적당한 절충안이다. 정면 돌파는 하지 않으면서, 주상숙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한다. ‘데우스엑스마키나’처럼 김옥희는 이 중대한 거짓말이 탄로 나기 직전 적절한 시점에 사망하고, 주상숙은 정치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우연한 결과로 그녀의 ‘자폭’ 결정은 그녀 외의 많은 비리 정치인을 무더기로 고발하게 된다. 이후 주상숙은 죄값을 받고 가난하지만 선량한 정치인으로 거듭난다. 종합하면 극 중 세상사람들은 그녀가 멀쩡한 할머니를 죽었다고 한 거짓말은 끝내 모른 채로 영화가 끝난다. 이렇게 해결하지 못(안)할 결정적 악행을 왜 애당초 만든 것일까. 

결말부엔 예전에 부패한 주상숙을 맹공격하던 젊은 정치인 신지선(조수향)이 과거 주상숙처럼 변한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은 순수한 정치인조차 변할 수 밖에 없는 정계 현실을 풍자한다. 누구도 다르지 않은 현실. 그 누구도 깨끗할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렇게 닳고 닳아버린 신지선에 비해 개과천선한 주상숙은 좀 더 괜찮은 인물로 비춰진다. <정직한 후보>는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적당히 부패했지만 자기 과오를 뉘우치는 주상숙을 끊임없이 끌어안는 영화다 (결국 주상숙은 서울시장에 도전한다). 이 세계엔 냉정한 심판자가 없다.
 

돌아보면 최근 한국 상업 영화와 드라마에서 악한 주인공을 단죄하지 않는 경향이 여럿 보인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용두사미’라는 평을 들으며 매듭지은 것도 비슷하다. 거짓말로 다른 이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한서진(염정아)은 마지막에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닫기만 할 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창작자도, 배우도, 관객도 나쁜 짓을 해온 주인공과 친밀해져 어느새 단죄하지 못하는 현상. 이런 서사적 경향의 기저에는 친소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보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것일까.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결말을 보면 악한 주인공을 매력있게 그리면서도 창작자가 주인공에게 갖는 단호한 윤리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직한 후보>의 유쾌하고 밝은 연출에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반문했다. “그래서, 살아 계시던 자기 할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한 정치인이 영원히 그걸 숨긴 채 적당히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서울시장에 도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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