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무비’라 불릴 만한 한국영화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1990년대 후반부터일 것이다. 이전에도 소위 ‘기괴한 영화’가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즈음에 감독의 자의식 아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B무비들이 하나둘씩 선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박찬욱과
이무영이다. 각본과 기획을 함께 진행하기도 하던 이들은 각자 메가폰을 잡아 이전에 보지 못한 한국영화를 만들어냈다. 박찬욱이 <
3인조>(1997)를, 이무영은 <
휴머니스트>(2001)를 내놓았고, 그 시기에
이훈의 <
마스카라>(1995),
김용태의 <
미지왕>(1996),
박헌수의 <
진짜 사나이>(1996) 같은 영화가 나왔다. 물론 이들 영화는 B무비의 숙명처럼 대중들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단, 일국의 영화산업이나 시장이 발전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는 ‘영화의 풍성함’이다. B무비가 만들어지고 시장에 나온다는 상황 자체가 이후 한국영화의 지형에 어떤 변화가 만들어질 거라는 예감을 낳았다. 그리고 변화는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나 B무비는 저주의 이름이다. 한 번 정도 시도하면 몰라도 계속 그 땅에 머물렀다간 대중들의 미움을 사거나 잊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B무비의 영혼은 비대중, 혹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반대중의 정서를 지녔기에 다수의 사랑을 받기가 힘들다. 그런 영혼의 작업은, 메이저의 감성에서 멀리 떨어져 반역의 행동을 벌일 수 있는 자만이 지속 가능한 일이다. 이후 방향을 튼 박찬욱이 대중과 친숙해진 반면, 지금까지 B무비의 영혼을 버리지 않은 이무영이 과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라.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2002), <
아버지와 마리와 나>(2008), <
한강블루스>(2016)를 발표할 동안 그는 고독한 작가로 남았다. 이무영은, 그처럼 영화를 만들면 안 되는 어떤 전범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그와 같은 영혼을 지닌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났다. 2019년까지 한국영화계에서 그런 이름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정원의 <
시실리 2km>(2004),
원신연의 <
구타유발자들>(2006),
이하의 <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2006),
오기현의 <
손님은 왕이다>(2006),
박명랑의 <
분노의 윤리학>(2012),
우선호의 <
시체가 돌아왔다>(2012) 같은 영화들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좀비처럼 스크린 위로 계속 찾아왔다.
올해에도 그런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그 작품은 지난 2월 13일에 개봉한
이민재의 <
기묘한 가족>(2018)이다. 이런 영화를 욕하기란, 한편으로 쉽다. 얼핏 보아 못 만든 것 같고, 뒤뚱거리는 전개 방식은 매끈한 내러티브를 찾는 자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실제로 이 영화에 내린 평자들의 점수는 가혹했다. 그런 상황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가는 십중팔구 영화와 함께 처형당한다. 곧바로 ‘영화 못 보는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나는 욕 먹을 각오로 ‘지금까지 이런 좀비영화는 없었다. 단, 취향을 아주 많이 탈 듯’이란 평가와 함께 별 4개를 주었다. 지금까지 후회는 없다. 다시 보아도 <기묘한 가족>은 올해 본 영화 가운데 몇 안 되는 재미있는 영화다. 그 재미를 여기서 풀어놓을 재간은 없다. 재미를 설명하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용케 ‘12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으나 <기묘한 가족>은 순진한 청소년들이 보기에 질이 그리 좋지 않은 자들이 나오는 영화다. 10년 전, 주유소를 열었다 망한 박씨네 가족은 초라한 행색으로 변했다. 하와이에 가보는 게 꿈인 아버지 만덕은 화투판에서 성질이나 부리고, 큰아들 준걸은 유사 범죄 행위로 근근이 카센터를 운영하고, 며느리 남주는 돈만 밝히는 아낙으로 살고, 딸 해걸은 토끼에 연연하는 우울한 아이로 자랐다. 둘째 아들 민걸이 해고당해 충청도 시골집으로 돌아오던 날, 대기업 제약사의 실험 도중 목숨을 잃은 남자가 죽음에서 깨어나 한마을로 걸어 들어온다. <기묘한 가족>의 전반부는 우울한 가족이 행복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박씨 가족은 좀비에게 ‘쫑비’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회춘의 묘약’을 팔아 재산을 끌어모은다. 만덕은 하와이로 떠나고, 10년 만에 주유소를 다시 오픈한 가족은 행복한 불빛 아래 저녁을 먹으며 웃는다.
기존의 좀비영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반부를 마친 영화는 정확하게 중간 지점에서 방향을 완전히 튼다. 행복의 정점을 상징하는 결혼식장에서 일어난 좀비의 창궐은 전반부의 나른한 기억을 박살 낸다. 결혼식장과 시골 장터 배경의 소규모 스펙터클 뒤로 주유소의 클라이맥스가 폭발을 준비한다.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 좀비로부터 안전했던 박씨 가족은 졸지에 마지막 대피처가 된 주유소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벌인다. 이민재는 그런 와중에 폭죽이 터지고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오는 발칙한 상상을 한다. 좀비 댄서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는 파티가 외딴 주유소에서 펼쳐진다. 좀비가 들끓는데도 뉴스에 보도조차 되지 않던 시골 마을은 그렇게 해서 그들만의 축제를 알린다. 평온한 전반부를 보다 이게 과연 좀비영화가 맞는지 의문을 품었던 차에, <기묘한 가족>은 생존과 멜로와 댄스가 결합된 전대미문의 장관을 연출한다.
<기묘한 가족>은 제목에서부터
김지운의 <
조용한 가족>(1998)과 은근히 교류하는 작품이다. 한적한 곳에서 산장을 운영해 돈을 벌어보려던 가족이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죽음의 행렬로 인해 곤혹스러워진다는 <조용한 가족>의 기괴한 이야기는 <기묘한 가족>에 길을 터준 격이다. <조용한 가족>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박인환과 당시 단역으로 나온
정재영이 나란히 출연해 어떤 기시감을 주기도 한다. 두 영화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 한국인이 행복을 기원하는 방식을 희화화한다. 두 영화의 가족 구성원은 돈을 버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가치를 지키고자 몸을 던지는 그들을 보면서 웃음과 통증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하다. 자칫 잘못하면 인물을 조롱하는 인상을 안길 수 있을 터, 두 영화는 투쟁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웃음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존재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 두 영화는 그것을 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조지 로메로의 좀비영화가 그러하듯, <기묘한 가족>은 제작 당시 정치 상황의 은유로 읽어도 좋은 작품이다. 죽음에서의 회복을 보여주는 엔딩은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뛰어나다. 윤종신의 <환생>이 괜히 흘러나오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