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링링 윤다영

by.정지혜(영화평론가) 2020-03-10조회 4,128
링링 스틸
* 이 글에는 <링링>의 결론이 포함돼 있습니다.

근래의 한국독립영화 가운데 보기 드문 기류의 영화가 있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윤다영 감독의 단편 <링링>(2019)이다. 소녀 진아(김주아)의 가족 내부에 음습해 있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공기는 예의주시해야 할 파상의 전조로 보인다. 기류의 변화는 집안 곳곳에 예시돼 있고 그 기류를 쫓다 보면 우리는 종국에 이르러 폭발하는 에너지의 실체와 마주할 것이다. 폭발 이후의 잔여물은 맥없고 허망하며 무력할 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관성과 타성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돼온 이성애 중심의 가족이 비록 껍데기뿐일지라도 이대로라도 유지되길 바랐던 진아의 바람은 힘을 잃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남은 가족은 각자의 몫으로 남은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떠안아야 한다. <링링>의 기상도, 이 태세 변화가 흥미롭다.

<링링>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뉴스에서는 곧 태풍이 몰아칠 거라 한다. 진아는 불안한 눈치다. 아빠는 엄마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이면 홀로 낚시를 떠난다. 태풍이 온다고 하는 데도 아빠의 고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진아의 불안은 곧이어 의심이 된다. ‘매주 낚시를 하러 간다는데 어째서 아빠의 낚싯대는 새것 같은가. 아빠의 수첩에 암호처럼 쓰여 있는 ‘링링’은 누구란 말인가.’ 의심은 저만의 방식으로 가속도가 붙더니 금세 몸집을 불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진아는 같은 반 친구 나현(정한희)의 엄마와 담임이 바람났다는 얘길 들었다. 소녀들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바람이 어디 그곳에서만 불라는 법이 있겠는가. 게다가 결정적인 물증까지 확보했다. 댄서 ‘링링’이 있다는 주점의 명함이다. 아빠와 ‘링링.’ 이 불길한 조합을 쫓아 진아는 아빠의 뒤를 밟는다. 
 

진아의 불안이 의심에서 확신으로 번지기까지 그 중심에는 아빠가 있다. <링링>에서 아빠의 존재, 즉 가족 내 성인 남성의 자리는 의뭉스럽고 수상쩍으며 불온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 진아는 둔탁한 소리에 잠에서 깬다. 아직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아빠)는 “뭐 하세요?”라는 진아의 놀란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진아의 방문을 닫고 나간다. 딸아이의 방을 찾은 아빠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퇴장이다. 진아의 경계 어린 시선과 수세적이고 어색한 말투 등에서 아빠의 방문이 진아로서는 꽤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며 어찌 보면 성인 남성의 일방적인 난입처럼 보일 만하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진아가 발견하는 것 역시 아빠의 흔적이다. 낚시한다며 뒤로 빠져 있던 아빠가 자신만 없는 뒷모습의 가족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액자에 넣어 진아 방에 걸고 나간 것이다.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아버지가 박제된 형식으로 가족주의와 자신의 존재를 환기하는 이 방식이 편할 리 없다. 이러한 아빠의 등장과 퇴장은 바람난 아빠라는 진아의 의심과 맞물리며 앞으로 전개될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이 영화의 은밀한 시선과 긴밀히 연동한다.

아빠만이 아니다. 진아를 초조하게 하는 건 활력을 잃은 가족 전반에 있다. “공기가 부족해.” 엄마가 내뱉던 이 말을 권태라고 다시 쓴다. 아빠에게 낚시가 있다면 엄마에게는 베란다와 화장실을 가득 채운 온갖 화초와 식물이 있다. 물고기와 식물로 가득한 집에서는 언제든 물비린내가 날 것이다. 그러니 진아가 했던 헛구역질은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의 외적 반응이자 활기를 잃은 가족에 반하는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저항이자 동시에 자기방어로 보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 반응은 매스꺼움과 맞붙어 있는 혐오의 감정마저 서려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링링’은 그 여름을 관통하는 태풍의 이름. (제13호 태풍 ‘링링’이 오기 전 영화 <링링>이 먼저 왔다) 진아는 아빠가 아닌 ‘링링’에게 일격을 당한 것일까.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한 방은 진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온다. ‘링링’의 맹렬한 기세 속에서 아빠의 낚싯대는 무언가가 걸리기라도 한 듯 휘청댄다. 그 가운데서 굴하지 않고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있다. 아빠의 그것. 일그러진 얼굴로 자위하며 절정을 향해 휘몰아치는 아빠는 비바람 속에서 맹렬히 자신의 희뿌연 정액을 흩뿌린다. 자연의 통제 불가능한 에너지와 오직 제 안의 뜨거운 것을 분출하려는 일념으로 서 있는 남자의 에너지가 마치 성교하듯 뒤섞인다. 에너지 대 에너지의 뒤섞임.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진아는 자신이 실체 없는 대상을 두고 그토록 불안해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아빠의 가장 내밀하고 은밀한 순간을 마주해야 하는 이중의 당혹 앞에 섰다. 발산된 에너지는 완벽히 소멸했다. 태풍은 지나갔고 아빠는 태풍 속에서 죽었다. 나현이 진아에게 “여자처럼 온순하게 지나가길 바라며 태풍에 여성의 이름을 붙여왔다”라고 하며 “너 같으면 조용히 넘어가겠냐?”고 하던 말을 떠올린다면, 링링과 아빠의 이상한 조응은 마치 링링이 여성을 둘러싼 오래된 신화를 깨부수려는 강력하고 파괴적인 복수와 저항의 기운으로 아빠를 휘감고 산화한 듯 보일 정도다.

마지막 장면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같이 얘기돼야 한다. 진아가 아빠의 유골함을 놓치는 바람에 재가 된 아빠가 바람에 흩날린다. 이 미끄러짐을 유발한 건 바람에 나부끼는 진아의 교복 치맛단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던 남성들의 시선에 있다. 진아를 다시금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이 무자비한 시선 앞에서 진아는 재가 된 아빠를 놓치는 대신 치맛단을 매만진다. 그러니 진아의 눈물은 아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빠가 죽었다는 데서 오는 슬픔보다도 은밀하고 노골적인 남성의 사정과 시선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 진아에게 더 큰 파상의 흔적으로 남는 게 아닐까. 링링은 그렇게 파괴적으로 갔다지만, 진아는 여기 남아 계속 살아가야 하므로. 아직 멈추지 않은 진아의 눈물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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