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미성년 김윤석 , 2018

by.박수민(영화감독) 2019-09-26조회 8,907
미성년 스틸

인간은 너무 빨리 성인이 된다. 세상에 태어나 겨우 20년만 살면 어른이다. 만 19세에 이르면 보호자나 대리인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뭔가를 해도 괜찮은 법률적 나이로서 ‘성년’에 도달한다. 나는 이룬다는 뜻의 한자 ‘성(成)’이 신경 쓰인다. 내 생각에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영영 ‘성인’은 안 되는 것 같다.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점은 거짓말을 할 때 어른이 더 뻔뻔하다는 것뿐이다. 어린이는 상대를 순간적으로 속이는데 급급하나, 어른은 자기 자신부터 영영 속인다. 또 성인은 미성년자에 비하여 욕구의 실행에 있어 좀 더 사회지향적인 눈치를 본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훨씬 더 엉망진창이라는 뜻이다. 30살이 넘은 인간의 말은 함부로 믿지 말라고 한다. 서른이 넘어도 전혀 어른이 아닌데, 고쳐 쓸 수 없는 속물이 되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그나마 이 기준선의 나이도 갈수록 더 어려진다. 어른이나 성인 말고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 속물을 대신 쓰기엔 좀 그렇다. ‘물(物)’은 인간이 아니라 물건을 가리킨다.

만 17세 고교생 주리(김혜준)는 아빠 대원(김윤석)의 뒤를 밟아 그가 지금 요릿집 사장과 불륜 진행 중인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학교의 윤아(박세진) 역시 엄마 미희(김소진)가 외간 남자와 연애질에 빠졌음을 알고 있고 주리를 옥상으로 불러내 최신 정보를 더해준다. “어떻게 모르냐? 배가 불러오는데.” 이때 주리 엄마 영주(염정아)의 전화가 걸려오자 윤아는 “아줌마 남편이 우리 엄마랑 바람났고 엄마는 임신했다”고 신속, 정확하게 알려준다. 엄마 모르게 아빠의 불륜을 없었던 일로 만들 생각이었던 주리는 당혹해서 윤아에게 앙앙대며 따지고, 윤아는 느닷없이 주리에게 입을 맞춘 다음 ‘없던 일로 하면 되는 건 세상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우쳐 준다. 여기까지가 시작한지 10분이 채 되지 않은 지점이고, 영화는 구구절절하여 구질구질한 치정극으로 전개하지 않는 미덕을 스스로 예고한다. 서로를 가리켜 사이좋게 “미친년”을 주고받은 두 소녀는 이후 문제의 사생아가 막상 태어나자 실제로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현대 인물들이 매 상황마다 망할 휴대폰 없이는 존립이 안 되어 개인적으로 괴롭다. 인간이 네모난 직사각형 물체를 들여다보고 문자를 입력하고 귀에 대고 떠드는 장면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그만 보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전화기에 입력된 서로의 호칭을 보는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윤아가 들여다본 미희의 폰에서 대원은 ‘마지막 사랑’이지만, 대원의 폰에서 미희는 ‘덕향(오리) 김사장’이다. 입원한 미희를 보러 간 병원에서 대원은 ‘예쁜 딸 주리’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대원을 발견한 주리는 “아빠!”하고 부르고, 윤아는 “저 사람이야?” 묻는다. 딸을 보자 황망히 도망치는 대원은 자신을 “아빠, 아빠” 부르며 쫓아오던 낯선 (남의) 딸 윤아를 보자 “누구니 너?”라고 당황해서 묻는다. 윤아는 엄마 병원비를 영주에게 갚을 생각으로 오랫동안 봉인했을 존재를 엄마의 폰에서 검색한다. ‘ㅂㅅ’를 누르자(나는 이게 나쁜 말로 그것처럼 느껴졌다) ‘박서방’이 뜬다. 미희는 더 이상 내 남편도 아니고 내 딸의 아버지도 아닌 지긋지긋한 존재의 이름을 그녀의 부모측이 불렀을 ‘박서방’으로 저장해놓았다. 윤아의 나이도 모르고 아마 분명히 이름도 모를 친아빠는 실제로 ‘ㅂㅅ’이었다.


현 시대의 관객은 불륜을 저지른 중년 남자의 내면 따위 혐오스러울 뿐 깊이 알고자 할 관심이 없을 것이고, 영화는 그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영리하게 차단했다. 네 여자의 상황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만으로 남자가 끼친 영향은 충분히 드러났고, 대원의 캐릭터는 그저 대책 없이 허우적거림으로서 극에서 제 몫을 다 한다. 잘못했다고 비는 남편에게 “성욕이야, 사랑이야?” 냉정하게 묻는 영주는 성당의 신부 앞에서 울며 고해하며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정말 나쁜 인간”이기를, 일찍 태어나고만 사생아가 아픈 것이 “하느님이 내린 천벌”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천벌’은 불가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영화에는 잘 만든 데우스엑스마키나가 있다.
 
아마도 유전적 가능성마저 집요하게 고려했을 캐스팅은 극중 엄마와 딸들이 실제로 비슷한 외모로 보여서 영화를 더 그럴듯한 이야기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주역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는 물론이고, 선생 김희원, 박서방 이희준, 방파제의 이상한 아줌마 이정은, 병실에서 남의 사생활을 관전하던 모녀 엄혜란과 정이랑까지 단역일지언정 저마다 출연한 씬을 제대로 챙겨간다. 먼저 중견 배우로서 연기를 너무 잘 아는 감독의 어떤 배려를 짐작케 한다. 나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무자비한 남성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이토록 산뜻한 영화를 만들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에서 두 소녀가 60, 70년대 일본 야쿠자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애도의 방식을 보여주어도 그것이 충격적이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영화는 산뜻하나, 그렇게 느껴지게끔 적정선을 뽑아낸 연기 연출이 다만 무서웠다. 나중에 감독의 인터뷰에서 그가 어린 두 배우에게 했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너희가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마라,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면 애쓰는 모습을 들키지 마라.” 나는 이 문장이 영화 <미성년>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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