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산다 박정범, 2014

by.이상용(영화평론가) 2019-07-11조회 7,522
산다 스틸

믿음 없는 세계의 믿음
정철의 조카 하나는 “기도해 봤자 소용없다”고 말하는 어린 소녀다. 주인공 장철의 삶 또한 그러하다. 사고로 인해 집은 무너져 내렸고, 부모님은 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사고 이후 누이 수연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이고, 그는 매번 집을 나간다. 수연을 찾아 정철은 수연의 딸이자 조카인 하나와 함께 찾아 나선다. 정철의 희망은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곳에 누이와 조카 그리고 여자 친구인 진영과 함께 살고 싶다. 하지만 그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반대다.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모이지 않는다. 일자리를 알선한 친구는 돈을 갖고 도망을 치고, 자신이 모은 일꾼들은 정철을 의심한다. <산다>(박정범, 2014)의 첫 장면은 무너진 집을 세우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일에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형상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를 떠올리게 한다. 영리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했던 신화의 주인공 시시포스는 신들을 농락한 죄로 사후에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밀러 올린 바위는 산꼭대기에 머물지 못하고 매번 떨어져 내린다. 그가 받은 형벌은, 매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정상까지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이다. 이 짧은 글에서 박정범 감독의 영화가 신화적이라고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형상은 박정범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형상을 생각해 보게 만들어 준다. 전작 <무산일기>(2010)의 승철 또한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시시포스적 인물이다. 2008년에 선보인 단편 <125 전승철>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박정범 감독이 연기하는 일련의 인물들은 분주하게 일상을 살아가지만 탈북자라는 이유로(<무산일기>), 가족들이라는 짐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힌다(<산다>). 그런데, 이처럼 고단하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상하게도 승철(<무산일기>)이나 정철(<산다>)은 노동의 행위를 중단하는 적이 없다. 주인공들은 미련해 보일정도로 소임에 충실하다. 이러한 태도는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기이한 것은 일에 대한 인물의 집착과 사소한 열정을 넘어서는 소명의식(calling)과도 같은 숙명적인 태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현실이지만 그에 충실한 것. 이 모습이야말로 시시포스 신화의 본질 중 하나다. 알제리 출신의 소설가 알베르트 까뮈는 [시시포스의 신화]라는 저서에서 바위가 또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다시 올리는 삶의 부조리함을 읽어낸다. 삶은 반복되는 부조리함의 연속이지만 시시포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밑바닥에서 다시 바위를 끌어 올린다. 카뮈는 부조리에 맞서는 인물로 시시포스를 예찬한다. 무한한 반복이지만 오늘도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시포스의 근육을 예찬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임을 설파하였다.
 

 
박정범 감독의 영화의 에너지이자 영화를 통해 얻게 되는 지독함과 기이한 열정은 이러한 실존적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박정범 영화에 대해 아무런 흥미를 못느끼는 것은 삶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영화의 접근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범 영화의 실존적 태도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면서 또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이 느끼는 죄의식이다. 이 죄의식은 승철의 경우처럼 탈북자를 지칭하는 주민등록증의 ‘125’라는 가리키는 사회적 주홍글자일수도 있고, 정철의 경우처럼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산다>에서는 달라진 지점들이 있다. 죄의식과 책임감을 넘어서 정철은 조카 하나를 지키고자 하는 태도를 충실히 보여준다. 이 점은 여자 친구인 진영을 향해서도 발휘된다. 특히, 하나에게 피아노를 사주기로 약속하고 매번 함께 하려는 정철의 모습에서 박정범 영화의 전환점이 일어난다.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 욕을 할 때마다 하나의 귀를 막도록 하는 것은 정철이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파수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스스로를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정철은 일과 돈만이 하나의 피아노와 자신의 무너집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집착은 된장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어느새 사장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다. 끝내, 그들로부터도 배신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다른 일꾼들을 내쫓고,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정철의 집착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기반이 된다. 
 

이 점은 전작 <무산일기>와도 다른 점이다. 사회적 소수자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승철과는 달리 정철은 명훈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압박하기도 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옥죄는 다채로운 탐구로 나아간다. 박정범의 영화가 변화를 이루고자 했던 야심찬 시도는 세 시간에 육박하는 길이 속에서 이야기의 사슬들을 퍼뜨려 나간다. 하지만 충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자리에선가 감독판을 편집한다면 네 시간이 넘는 버전을 선보이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박정범 감독이 영향을 받아왔던 것처럼 설명되어 온 다르덴의 영화가 아니라 그 위에 폴 토마스 앤더슨을 겹쳐놓은 것이다. <데어 윌비 블러드>(2007)나 <마스터>(2012)처럼 죄의식과 집착 그리고 그 위에 구원을 향한 여정이 펼쳐지면서 강원도 어느 산골의 방대한 서사시를 꿈꾸고 있다. 인생의 부조리함 위에서, 조카를 지키고 싶은 파수꾼의 열정을 따라 정철은 오늘도 가로등을 달고, 내일도 일을 할 준비를 한다. 그것은 기꺼이 타락할 수도 있는 세계이다. 명훈에게 자신을 돕는 것은 마트에서 무를 훔치는 것과 같은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삶을 버틸 수 있냐고 질문하는 정철에게 밝은 미래는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박정범의 영화가 서 있는 자리다. 구원없는 구원, 희망 없는 희망을 써 내려가면서 공동체의 몰락 속에서 개인의 무기력한 고군분투기를 그려낸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 박정범의 영화가 시작된다. 절반의 분노와 절반의 순수함과 절반의 미숙함과 절반의 열정을 담아. 움직이면서 인물들은 느릿느릿 시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쉽게 도래하지 않는 그 곳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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