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사회생활 이시대, 2019

by.장병원(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19-06-20조회 2,117
사회생활 스틸
내외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했으나, <사회생활>(이시대, 2019)은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한국영화들 가운데 가장 눈에 들어온 ‘발견’이었다. 전주, 전북 지역 작품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시대 감독의 이 데뷔작은 프로그래머들 간 논의 끝에 한국경쟁에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이시대는 장우진, 김대환, 임태규 감독을 배출하면서 최근 한국 독립영화의 산파 구실을 하고 있는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 전문대학원 출신의 신인이다. 어떠한 지원도 없이 오로지 감독의 의지만으로 밀어붙인 고투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되는 이 영화에서 그는 우리네 삶의 문제를 탐사하고자 한 작가정신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현실의 탐색 후에야 가능한 뼈저린 자성을 견고한 양식적 전략으로 다룰 줄 아는 이시대의 묵묵한 연출에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영화의 무대는 서울에 본사를 둔 지방 소도시 지사의 사무실이다. 카메라는 폐소공포증을 자아내는 이 사무실 바깥으로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이 사무실의 실질적 관리자인 이현제 대리는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 본사로부터 쫓겨나 이곳으로 좌천된 이혜원 대리의 관리 감독을 맡게 된다. 관리 책임을 맡긴 팀장의 감시와 채근이 격화되면서, 냉정한 조직의 논리 안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제는 혜원이 제 발로 걸어 나가도록 냉대와 멸시의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부정(不正)한 계율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하는 혜원은 꿋꿋이 버티고, 종종 똑부러진 일처리로 현제를 돕기도 한다. 순응과 굴종을 강요하는 집단 공작의 약발이 먹히지 않을 때쯤, 혜원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이 돌고 코너에 몰린 혜원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사회생활>은 한국 사회를 잠식한 조직문화의 이면을 폭력의 순환으로 형상화한다. 신입사원 면접시험으로 열리는 플롯은 혜원의 좌천 수난기가 비극적으로 종료된 후 또 다른 면접시험으로 닫힌다. 회사 안에서 인정받고 진급하기 위해 엄격한 위계와 패거리 문화, 집단주의에 투항한 현제를 통해 이시대는 한국식 조직문화의 냉엄함,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공할만한 밀도로 그려낸다. <사회생활>은 조직과 개인, 조직 안의 개인과 개인을 끝끝내 만날 수 없는 대립적 갈등관계로 묘사한다. 메마른 조직문화의 생리에 밀려난 자들의 패배는 그 세대에 그치지 않고 대물림된다. 현제와 혜원이 잠시나마 희미하게 교감하였다는, 패배의 질적 변별성에도 불구하고 패배는 그저 패배일 뿐이다. 여기서 대립적 세계인식을 통어(通御)하는 작가의 심층인식이 드러난다. 개별성을 말살하는 조직, 제도, 시스템의 폐쇄성과 그 정황을 그리고 있는 <사회생활>은 대립적 세계 상황에 포박된 자들의 속절없는 패배를 ‘아이러니’의 수사학으로 그린다. 구태여 희망과 미래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 아이러니는 반성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존재 의의가 있다. 좌절스러운 이 패배로부터 이시대는 자신이 견지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대한 날선 관점을 추출한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에 굴종하며 살고 있는가, 또 폭력을 온존케 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가담하거나 최소한 방조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가. 
 

개별자들의 자존과 위엄을 짓밟는 제도와 시스템의 억압을 고발하는 영화의 톤은 얼음장 같이 차갑다. 무엇보다 <사회생활>의 도드라진 성취는 그 표제만큼이나 정직한 스타일의 일관성, 일체의 과장이나 수식을 배제한 미니멀한 장면연출에서 찾을 수 있다. 대다수의 쇼트는 롱테이크로 찍혔고, 그 무게는 육중하다. 흡사 아마추어 감독의 습작을 보는 것 같은, 놀라우리만치 강직한 이시대의 스타일은 그가 연출한 두 단편영화 <오늘의 중력>(2016), <업무시간>(2016)에서부터 이어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대못을 박아둔 것처럼 어떤 움직임도 없이, 인물들의 뒤편에서 저들의 뒤통수를 찍거나, 무언가에 가려지고 잘려진 몸의 일부, 세트의 일부를 찍는 카메라는 좀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감옥의 형상으로 이 사무실을 그린다. 시스템의 감옥에 억류된 존재의 비의를 묘사하는 롱테이크 장면들은 범속한 세상사와 조직생활의 저열함을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전이시킨다. 불합리한 세계의 비의를 형상화하는 범상한 수사 전략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정서와 드라마의 긴장을 집요하게 화면에 새기는 이시대의 완력은 근래 한국 독립영화에서 보기 드문 종류의 재능이다. 나는 이러한 재능을 가진 이 감독이 후일 더 가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재목(材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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