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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2018)은 독학으로 영화를 익힌
조민재 감독이 각본, 연출, 편집을 도맡아 만든 첫 작품이다. 소박하고 겸손한 제목처럼 영화는 가녀린 빛을 향해 더디지만 진중한 행로를 따라간다.
주인공 진무는 뇌수술로 인해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을 캠코더에 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엄마의 고향집이다. 주변 건물에 둘러싸인 데다 서향인 탓에 좀처럼 빛이 들지 않는 허름한 음지의 집이다. 영화는 고향집을 거점으로 진무가 다른 가족 구성원인 누나와 형을 찾아다니는 과정을 따라간다. 여기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 가족들에게는 미움과 원망의 대상인 아버지의 무덤에 나무뿌리가 박혀있어 이장을 해야 하는 과정이 얹혀 있다.
진무의 수술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여서 과거의 상처를 헤집고 화해하는 서사로 흐를 것 같지만, 의외로 영화 속에서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장면이 없음에 주목하자. 어머니는 홀로 식당일을 하며 고향에서 살아가고, 누나는 이혼한 채 아들을 홀로 키우는 워킹 맘이며, 배다른 형은 자동차수리소에서 일하며 그 자신의 어머니와 산다.
하나의 단란한 가족으로 묶이기 어려운 이들의 사정은 정도의 고향집 벽에 걸린 가족의 사진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벽에는 가족들이 모여 찍은 사진인 소위 ‘가족사진’이 없다. 대신 크기와 스타일이 제각각인 사진들이 걸려있는데 감독은 얼룩진 벽의 이미지만으로 가족의 과거 내력을 자연스럽게 추측케 한다. 다른 벽에 있는 낡은 전기 전깃줄에는 온통 테이프가 붙어있는데 가까스로 허물어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처지를 즉물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영화가 주는 정서는 일반적인 가족드라마와는 다르게 어딘가 이질적이다. 스토리 전개로 이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실 <작은 빛>은 자연스러운 시간 순서로 진행되는 영화도 아니며 끝내 전후 관계가 불분명한 장면들도 존재한다. 가령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저해하는 장면이 중간에 불쑥 틈입하는데, 이는 흔히 영화에서 과거 회상을 보여주는 플래시백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앞서 말했듯 <작은 빛>은 진무가 자신의 캠코더로 가족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 전체를 보여주는 감독의 카메라 외에 진무의 캠코더로 찍힌 조악한 화질의 장면도 때로 보게 된다.
그런 탓에 이러한 당혹스러운 장면들이 있다. 진무가 햇빛이 들어와 잠자리에서 일어나 밥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다. 서사적으로는 자연스럽지만 진무가 잠에서 깨는 곳은 그가 홀로 사는 옥탑방이고, 밥을 먹는 곳은 고향집으로 이 장면은 어머니가 캠코더를 들고 찍은 장면이다. 한편 형의 집에서 자려고 잠자리에 든 다음 장면에 고향집에 누나와 엄마 등 가족이 모인 장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다음날이 아니라 형에게 캠코더에 담긴 가족의 근황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이어 같은 날 밤 잠자리에서 일어나 캠코더를 보는 형제의 모습이 비친다. 다음으로 누나의 집에서 고장 난 가구를 고쳐주는 장면 다음에 고향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밥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캠코더 장면은 다들 쓸쓸히 살아가는 가족들이 캠코더를 통해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진무, 엄마, 누나, 형, 조카는 영화 속 단 한 번도 한 장소에 모이는 법이 없지만 진무의 캠코더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다른 지면에서 <작은 빛>이 카메라를 통해 기억의 잠상을 드러내는 ‘현상’의 영화이자, 본래의 요소로 돌아가기 위한 ‘환원’의 영화라고 언급했다. 진무가 캠코더로 가족을 찍는 것은 오랫동안 묵혀왔던 그들의 삶의 기억들을 드러내는 현상의 과정이고, 아버지의 무덤을 열어 20년 넘게 썩지 않은 아버지의 시체를 썰어 이장하는 과정은 본질을 되돌아보는 환원의 과정이라는 취지였다.
당시 미처 부연하지 못했던 바가 있는데, 이는 카메라와 빛의 점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의 화면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등장한다. 하나는 진무가 든 캠코더로 이를 통해 진무는 자신과 가족을 찍고, 때로는 가족이 진무를 찍는다. 영화의 중간에 다른 하나의 카메라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짐에서 발견한 필름 카메라다. 그리고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 제3의 카메라, 즉 감독의 카메라가 있다. 이 카메라는 캠코더로 자신을 찍는 진무를 찍는다. 또는 이 카메라는 진무가 돌아간 다음 쓸쓸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형과 누나의 모습을 찍는다. 영화는 카메라들을 통해 진무의 병을 계기로 이들이 다시 모이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엔 관심이 없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두운 밤바다에 저 멀리 등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가녀린 안도를 주기만, 여전히 강퍅한 삶을 감당하며 고독을 감내해야 할 것은 각자의 몫이다.
한편 카메라는 가족의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단속적이며 돌발적인 흐름이 있는데 관련해서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고향집 형광등이 낡아서 고친 후에 시험 삼아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장면이다. 껐다 켜는 스위치의 소리가 연속되는 동안 암전에 이어 멀리 떨어진 형과 누나의 가족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치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흰 바람벽에 그가 ‘귀애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이 명멸하는 것처럼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는 마지막 가족들의 사진이 걸린 벽을 배경으로 한 정도와 엄마의 장면에서 멈춘다.
둘째는 아버지의 카메라와 함께 과거 사진이 삽입된 장면이다. 사진이 한 장 한 장 넘겨지고 이어 장면은 사진과 카메라를 발견했던 과거 고향집의 부감 숏으로 이어지며 어두운 밤에 정도가 카메라의 플래시를 연속해서 터뜨리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명멸하는 빛의 이미지 속에서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암전이며, 암전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양태를 만들어낸 ‘부재하는 기원’인 아버지와도 통한다. 하지만 나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추념하고 그와 화해하는 것(혹은 반대로 그를 무시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미이라가 된 아버지의 시체를 톱으로 조각내 새로운 장소에 이장하는 행위, 즉 공손하면서도 불경한 관여를 통해 다시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 깔린 의도라고 보았다. 명멸하는 가녀린 빛 속에서 이미지들을 부여잡는 태도 속에서, 굳건하지만 부드럽고 과묵하면서도 소박한 근성이랄까 기품 같은 것을 보게 된다. 비록 첫 작품이기는 하지만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조급하지 않고, 영화 속 체험에 깊이 잠입해 그 정서적 경험에 우리를 조응시켜가는 뚝심에서 그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