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역사를 온전히 자기 삶으로 감내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를 현미경으로 보듯 자세히 눈여겨보고 기록하는 자. 다큐멘터리 영화에선 이야기를 하는 자와 듣는 자, 기록되는 자와 기록하는 자의 긴장 관계에서 다양한 의미가 배태되곤 한다. 영화학자기도 한
김소영 감독은 2014년부터 유라시아 대륙으로 흩어진 고려인의 발자취를 찾아 다큐멘터리 영화로 담아왔다. <
눈의 마음: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2014)에선 고려인 2,3세의 삶을, <
고려아리랑:천산의 디바>(2016)에선 고려인의 상실을 노래로 위로해온 고려극장의 디바 방 타마라와 이함덕의 예술 세계를 조명했다. 한국전쟁 당시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여덟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
굿바이 마이 러브NK:붉은 청춘>은 ‘유라시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당시 조국을 떠나야 했던 망명자들의 삶을 고집스럽게 뒤쫓은 기록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이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냉전과 분단 등 국가주의 세계관으로는 보지 못한 역사의 이면, 그 안에서 이뤄진 개인의 선택. 김소영 감독의 세 작품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한 디아스포라 역사를 미시적으로 접근해 재정립한 결과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최전선에서 싸운 북한 청년들이 있었다. 20대 초반, 어렸지만 혁명을 향한 부푼 꿈을 안고 싸운 이들은 “알짜 빨갱이”로 인정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의 행선지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최국인 감독, 김종훈 촬영감독, 작가 한대용(이후 한진), 허웅배 등 여덟 명의 유학생은 말도 다른 타지에서 조국을 향한 신념으로 살아나갔다. 하지만 1956년 김일성의 주체사상 종파사건을 일어나며 모든 게 달라졌다. 허웅배는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재조선 유학생대회에서 북한의 1인 독재 체제를 비판했고 이 사건으로 대사관에 구금됐다가 58년 소련에 망명을 요청했다. 허웅배와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40여km 떨어진 모니노 숲에서 천막을 치고 소련의 답을 기다렸다. 그 때 허웅배는 “참사람이 되자는 뜻으로 여덟 명 모두 같은 이름 ‘진’을 쓰자”고 제안하며 결의를 다졌다. ‘모스크바 8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망명을 받아들인 소련은 이들을 소비에트 각 지역으로 흩뿌렸다. 한대용은 서부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여성 지나이다 이바노브다(이하 지나)와 결혼했고, 김종훈은 러시아 북서부에서, 최국인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살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는 8진의 마지막 생존자 김종훈, 2014년 김소영 감독이 알마티에서 만난 최국인, 그리고 한진의 미망인 지나다. 이들 말 속엔 혁명을 향한 신념과 조국에 대한 아쉬움, 동료에 대한 뜨거운 우정과 사랑이 알알이 박혀있다. 김종훈은 조국에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존경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갈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최국인은 카자흐스탄의 공훈 감독으로 활약했지만 “조국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못한 내 인생은 비참하다”고 돌이킨다. 지나는 ‘국적 부재’라 쓰인 여권을 가진 한진과 결혼을 하던 때를 떠올린다. “누가 이 고려인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냐”는 공무원에게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되묻던 기억을, 백발의 지나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사랑과 우정, 신념이 삶의 가장 값진 가치였던 시절. 풍족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던 인생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가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흥미로운 건 이들의 이야기를 유연하게 개입하고 재구성하는 연출이다. 한진이 쓴 글을 극영화 방식으로 연출한 영상이 등장하거나 한진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김소영 감독이 직접 읽기도 한다. 촬영 중 최국인 감독이 작고한 소식을 김 감독이 전하는 장면도 나온다. 감독이 단순히 이들 삶을 기록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그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듯 보인다. 다른 시공간을 살아온 모스크바 8진과 이를 끈덕지게 쫓아온 다큐멘터리 감독, 즉 찍는 대상과 찍는 주체가 수평적으로 연결된 상태가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 말미 김 감독은 내레이션으로 “왜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느냐”고 물은 김종훈에게 ‘영화로 다른 세상을 보고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 사실을 전한다. 긴 시간 영화로 주류 역사 이면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영화 작가 김소영이 역사에 묻혀있던 찬란한 청춘과 조우한 방식은 역시 영화였다. <굿바이 마이 러브 NK:붉은 청춘>은 영화가 역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탐구할 수 있는 기록의 매체라는, 명징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