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리틀보이 12725 김지곤, 2018

by.김지연(영화평론가) 2019-03-14조회 3,093
리틀보이 12725 스틸

<리틀보이 12725>(2018, 김지곤)는 김형률의 고귀한 삶에 논평을 더하거나 업적을 기리기보다는 그의 내밀한 마음과 생각이 무엇이었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듬어 보려는 시도에 더 가깝다. "삼촌 책상에 앉아서 창문을 봤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사셨을지 궁금하더라고요". 조카의 인터뷰는 영화의 태도와 일치한다. 그 쇼트 이전에 카메라는 어두운 방에서 오랫동안 창을 응시했고 이후엔 김형률이 실제로 봤을 풍경들-창밖에 눈이 오는 휴대폰 동영상,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부둣가 사진-을 본다. 방대한 사료 가운데 그가 쓴 일기와 메모들, 시를 읽는 데에 많은 쇼트들을 할애하게 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 일이다. 아파도 치료비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아프고 싶다는 바람, 추운 날씨에 집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지만 봄이 되면 훨훨 살아날 것이라는 의지, 배움에 자격은 없다는 열의, 평범하게 직장에 다니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고백. 그와 뜻을 함께한 운동가들이나 관련된 책을 쓴 작가들은 인권운동에 투신한 그의 놀라운 집념을 자주 언급했는데, 이를 추동하는 힘은 그처럼 소박하고 단단한 마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김형률의 고통은 원폭 피해자 2세를 만든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오프닝씬은 티니언-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의 행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다음엔 합천에서 부산으로, 다시 말해 어머니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 슬픔의 경로를 불러다가 역사와 그 영향 아래의 개인에 대해 생각한다.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도착한 8월 6일은 이제 유등을 띄우고 평화를 기원하며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원폭기념일이 되었다. 나가사키에도 추모객은 밤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1945년의 폭탄 구조물은 아직 티니언에 있다. 리틀보이와 팻맨이 남아있다면 희생자들도 살아있겠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것을 가정하는 내레이션이 물안개 피어나는 합천의 강가에서 한번, 김형률의 방과 어머니의 히로시마 생가 전경에 걸쳐 한 번 반복된다. 이 때 내레이션은 합천이 한국의 히로시마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가 피폭되지도, 아들을 그렇게 잃지도 않았을 거라는 말처럼 들린다. 

영화는 사람들의 외면이나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역사도 침묵하지 않고, 현재의 시간 안에 과거가 존재한다는 걸 믿고 있다. 원폭을 견딘 건물의 잔해들과 녹음(綠陰), 그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보이는 히로시마의 강변 풍경에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영화는 유유히 흐르는 히로시마의 강물을 바라보며 욱일기 아래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전함과 잠수함 등을 교차해 바라보며 과거사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묻는다. 김형률이 등산을 좋아했다는 진술에 이어지는 산의 전경엔 삶에 대한 의지 대신 비극의 단초인 핵실험을 새겨 넣기도 한다.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와 함께 기장 앞바다, 고리원자력발전소에 이어지는 히로시마의 숲 쇼트들, 거기에 교차되는 원폭투하 당시의 무시무시한 먼지와 화염은 도시교향악처럼 보이던 일련의 쇼트들에 이상한 생명력과 섬뜩함을 남긴다.

하지만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매우 조심스럽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김형률이 이룬 성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된다. 누군가와 만났을 때는 물론이요 토론회, 기념식, 행사와 시위 등등에 다니며 찍은 기념사진마다 아버지가 곁에 있다시피 하니 그의 노고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도 영화는 그를 비중 있게 다룬 적이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투 쇼트(two shot)에서도 거의 말이 없고, 집에 손님들이 왔어도 배경인 것처럼 뒤에 조용히 앉아있다. 2층 방을 만들어 주게 된 사연의 내레이션, 아들이 자기 나름대로는 살아보려고 등산을 많이 다녔다는 인터뷰, 추모제에서 인사말을 하는 정도가 아버지를 다룬 쇼트의 전부다. 또한 영화는 김형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주변인들에게는 묻지만 그에게는 묻지 않는다. 아들의 못다 이룬 뜻을 이어가는 아버지에겐 무용한 질문인 까닭이다. 어머니의 심정은 금강경에서 드러난다. 12년째 (독송을) 하고 있으니 좋은 데 갔겠지.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의 독송에는 자꾸만 울음이 섞인다. 가슴에 묻는다는 자식을 어찌 잊을까. 카메라는 어머니의 얼굴을 도무지 볼 수가 없다.
 

나는 <할매-서랍>(2015, 김지곤)로 김지곤 감독을 기억한다. 옷가지며 이불들이 그대로 있는 김형률의 방을 느린 팬으로 살피거나 몇 쇼트에 걸쳐서 조용히 바라볼 때, 혹은 액자의 유리에 비친 사물의 상(相)을 관찰할 때, 티니언과 히로시마, 합천 등지에서 종종 물가나 돌담, 사소한 풍경 앞에 머물러 오래 그것을 살필 때. 그 자리에는 사물들과 장소를 응시하며 본질에 다가가려는 감독 특유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가 한 장소에서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던 디졸브는 이 영화에서 노을 지는 티니언의 바다에 히로시마의 강을 겹쳐내며 아예 동일한 장소처럼 보이는 데 쓰인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묶여있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티니언의 어두운 숲에서 시작한 영화는 김형률의 일기장 마지막 빈 페이지에서 끝난다. 그렇지만 거기에 담긴 고통과 슬픔과 문제 제기는 과거형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오늘도 당신의 아들을 위해 금강경을 욀 것이다. 김형률‘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원폭 범죄에 가담해온 우리 사회 내부의 책임을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느냐는 15년 전의 질문은 여전히 묵직하게 가슴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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