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한국상업영화는 ‘2003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
올드보이>(2003), <
지구를 지켜라!>(2003), <
살인의 추억>(2003), <
장화홍련>(2003) 등이 등장했던 2003년 즈음의 영화적 세계가 한국상업영화의 보편적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그 영화들이 한국 사회의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서 (혹은 그런 명목으로) 펼쳐 보였던 폭력의 스펙타클은 이제 비판의식조차 탈각된 채로 그저 형식적인 설정값이 되었다. 영화에서 세계는 그저 망가진 것이고, 폭력은 모든 사람의 존재 양식이 되었으며, 여자는 그 지옥도에서 고군분투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요즘 한국상업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 있다. 다양한 장르, 서사와 이미지에서 과잉을 뺄 줄 아는 용기,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여자.
그런데 이런 한계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영화들이 있다. <
우리들>(
윤가은, 2015), <
소공녀>(
전고운, 2017), <
어른도감>(
김인선, 2017) 등 최근 개봉한 독립 장편 여성영화들이다. 이 세 작품은 모두 “내 마음을 그(것)에게 기꺼이 주었음”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무엇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들인 것이다.
그 중 <어른도감>은 10대 여성이 등장하는 ‘소녀 버디물’이다. 열네 살 경언이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삼촌 재민을 만난다.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갑자기 삼촌이랍시고 나타난 재민은 어딘가 의심스럽지만, 당장 보호자를 찾을 수 없는 경언은 재민을 법적 후견인으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과,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는 아이”라는 콤비는 새로운 설정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익숙한 관계 안에서 아주 조금씩 변주를 줌으로써 새로운 합(合)을 끌어낸다. 그러면서 <어른도감>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또 다른 무언가를 선보였다. 그것은 아끼게 된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다. 최근 한국영화는 이미 잃은 것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하거나,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누구라도 짓밟을 수 있는 화가 난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경언과 재민은 좀 다르다. 끝을 모를 자기연민에 잠기거나 자신의 불행에 대해 무작정 분노하기보다는 부족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편이다. 나는 그것이 ‘감정’이라기보다는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른도감>은 감정 과잉의 영화들 틈에서 마음을 다루는 흔치 않은 영화가 되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교수들이 이 영화에 대해 “애매하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김인선 감독의 인터뷰에서 읽으면서 일전에 한 영화학도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의 단편영화에서 일상적인 고통과 불안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작품을 본 영화학과 교수들이 “좀 더 밀어붙이라”고 코멘트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영화는 강렬한 어떤 것을 관객들에게 내던짐으로써 메시지를 만들거나 쾌락을 줄 수도 있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언어로 시간을 천천히 쌓아가면서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충분히 시간을 들이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더 밀어붙이라니. 뭘 더 밀어붙이라는 말이었을까?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제 서킷에 어필하기 위해서 ‘한국영화’, 특히 단편영화는 언제나 강한 한 방을 요구받게 된다. 그리고 그 강한 한 방이란 대체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미에서의 폭력을 미학화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더 센 무엇”을 요구하는 영화교육 안에서 폭력 빼고는 논할 것이 없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 안에서 <어른도감> 같은 영화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누군가는 대세를 거슬러 조금 다른 것을 만들 용기를 내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