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실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애매모호한 표현들과 정서들로 채워진 장면들을 매번 해석해야 할 때, 감독은 마치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매우 직설적이고 명쾌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단세포 관객인 나에게 감독의 이름만으로 선택한 실험영화가 있다.
문정현 감독. 그가 실험영화를 주로 다뤘던
이원우 감독과 함께 만든 첫 작품 <
붕괴>. 이 작품은 2014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피프메세나 상을 수상했다. (문정현 감독을 찬미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간 매우 명쾌한 다큐멘터리를 작업했던 그가 뜬금없이 실험영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 중에 읽게 된 작품의 시놉시스가 나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둘째 아이가 장애아일 수 있을 확률을 통보받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나는 출산의 순간만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그리고 과거 10년 동안 장애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되돌려본다. 마침내 불안과 공포에 떨었던 나의 과거와 현재의 얼굴들을 발견한다.’ (서울독립영화제 2014 발췌)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보이듯, 차곡차곡 배치했던 도미도(노력)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처럼, 다큐멘터리 <
붕괴>는 감독의 수많은 가면들과 위선이 붕괴되는 순간의 감정들을 상당히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문정현 감독이 왜 실험영화를 선택했는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그의 현재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위한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인다.
문정현 감독이 10여 년 동안 장애인 단체에서 지녔던 위치, 감독 이전에 친밀함으로 쌓여왔던 장애인들과의 관계, 그것은 영화 안에서 그가 장애인들과 통화하는 장면들 속에서도 매번 쉽게 알 수 있다. 가족에게도 말 못한 고민을 들어주는 무지 편한 형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프레임이라는 경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장애인과 그와의 안전한 관계가 현실로 다가왔을 때, 즉 둘째 아이가 장애아 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통보가 10여 년간 지켜왔던 그의 수많은 가치와 안도감을 순간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하나하나 번호로 매겨지는 내레이션의 숫자가 거듭될수록 이상으로 높여냈던 아름다운 가치들이, 그리고 화면 밖에 있었던 그와 화면 안 대상들과의 경계가 더욱더 크게 붕괴되고 있었다.
임신과 더불어 둘째 아이가 장애아일 수도 있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 집안 경제는 어려워진다. 주거 공간 주변의 철거, 가장이자 감독으로서의 위치, 그 수많은 붕괴 이미지들, 아니 현실의 시련들. 그 안에서 마치 백조처럼 수면 밖으로 드러난 우아함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
화면 밖으로 숨기 좋은 감독이라는 위치를 과감히 버리고,
문정현 감독은 <
붕괴>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결코 잘생기지 않은 얼굴과 가족들의 고통을, 그리고 상당히 세속적인 자신의 감정들을 결심하듯 드러내고 있다. 그런 과감한 용기가 불편하기보다는 장르에 대한 첫 도전으로, 더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숨고 싶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위로와 연민으로 귀결시켜 내고 있다.
이러한 붕괴의 파편들이 내러티브 없이 계속 이어졌다면 나 같은 관객에게 이 영화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 아이의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그에게 가해진 현실의 무게감과 자신 안의 갈등들이 하나하나 증폭되고 관객과 함께 불안과 공포 속에 맞이하는 출산의 순간까지 진행되는 일종의 ‘공감적 내러티브’는 이 영화가 갖는 매우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다. 영화의 후반부, 둘째 아이의 건강한 출산과 안정된 삶의 터전들. 그것은 마치 모든 것들이 붕괴되어도 변치 않을 것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평화로운 집안을 비추는 카메라가 조금씩 움직이며 창문 밖으로 비추어지는 철거의 모습. 그 안에서 마주친 노동자를 가리켰을 때 우리의 믿음은 다시금 붕괴된다.
<
붕괴>는 감독 스스로 자신을 붕괴시키며 스크린 밖에 응시의 대상으로 존재한 관객들마저 모두가 붕괴의 주인공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우울하지 않다. 붕괴와 더불어 재창조되는 붕괴할 것들. 그것들과 함께 불안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방법을 하나쯤은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