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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땅>은 범상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대상이 거기 있고(세상 쪽에), 그것을 마주하는 카메라가 여기 있고(작가 쪽에), 그리고 이 둘 사이의 피드백이랄 것이 객관적 기록(세상과 작가 사이에서)이라는 3박자가, 흔히들 접하게 되는 범상한 다큐멘터리를 정의하는 요소들이라면 그렇다.
먼저 대상. <
거미의 땅>은, -지금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경기 북부 기지촌에 살아온 세 명의 여성들(햄버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바비 엄마, 폐지를 줍는 박인순, 흑인계 혼혈로 살아온 안성자)을 비추지만, 결코 그들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거미의 땅>은 그네들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기억을 담으려고는 하지만, 그 경험과 기억이 온전히 재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숨기지 결코 숨기지 않는다. 반대로 그 고통이 얼마나 무심하게 망각될 수밖에 없었나, 그리고 얼마나 많은 상상과 환영으로 덧칠하여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나를 더욱더 비추려고 노력한다. <거미의 땅>의 진정한 대상은, 기억될 수 없는 기억, 기록될 수 없는 기록인 것이다. 마치 지금은 쇠잔하고 있는 기지촌이, 그 쇠잔을 통해서만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듯이.
그리고 카메라. <
거미의 땅>의 카메라는 그래서 대상에 달라붙지 않는다. 구멍과 틈새 투성이인 대상에 달라붙기도 어렵기도 하거니와,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얻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카메라는 대상들을 넋 놓고 관망한다. 이미 대상들은 흐릿한 풍경처럼, 희미한 기억들처럼, 유령 같은 흉터처럼, 뿌옇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감독들의 인터뷰 방식(세 명의 인물과 대화하거나 소통하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감독들은, 두서없고 돌발적인 넋두리들(바비 엄마의 경우)들, 그리고 방언에 가까운 중얼거림과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푸념들(박인순의 경우)을 정리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워듣는다. 진실을 다그치는 법 없이, 넋 놓고 주워듣는 것에, <거미의 땅>이 견지하는 완전히 다른 인터뷰 방식이 있다. 그것은 세월의 넋을 잃은 대상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다. 이것은 대상을 따라가는(follow) 카메라가 아니라, 대상을 여행(travel)하는 카메라다(그리고 실제로 감독들은, 기지촌의 풍경을 트래블링 카메라로 훑는다).
결국 객관적 기록? 그것은 감독들이 애초에 하려고 하던 짓도 아닌 게다. 감독들은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대상들에게, 진실을 다그칠 생각도, 그것을 사실 그대로 기록해볼 생각도, 하물며 그것을 이러저러한 테크닉을 동원해서 재연해볼 생각도 없었다. 감독들은 유령 같은 대상은, 바로 유령이 사는 방식대로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감독들은 객관적 기록이라는 오만한 언어를 강요하는 대신, 대상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언어를 통해서 말하도록 했다. 그것은, <
거미의 땅>이 귀신 영화가 될 각오를 하고, 기지촌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연출’하게끔 한 그들의 결정이었다. 안성자는 자신이 과거 했던 댄스를 직접 연기해낸다(실제로 그녀는 기지촌에서 일하던 댄서였다). 잃어버린 대상은 말해지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안성자의 그 댄스를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은 수만 대의 카메라, 수천 대의 녹음기, 그리고 수억 번의 인터뷰로도 재현될 수 없는, 고통과 역설의 자기증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