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효정(
이민지)의 아침은 부산하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 같은 반,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단짝 지연(
장의영)은 효정네 현관에 미리 와 기다린다. 별 거 없는 대화를 하며 등하교를 함께 하고 이미 들떠있는 쉬는 시간 교내 화장실 익명의 배설물만 봐도 자지러지는 사이, 지연은 효정을 쳐다보느라 문득 골똘해지고 효정은 괜히 빙긋거리며 그 시선을 미끄러뜨린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 돌고 나서는,
“뭔가 도돌이표 같지 않아, 아까 그 자리야?”
“한 바퀴 돌았으니까 그 자리지.”
“아니 그런 거 말고”
선문답이 고픈 친구를 보며 짐짓 웃어버리는 효정.
“그런 건 엄마가 대학 가고 나서 고민하는 거래”
마냥 도돌이표가 찍혀 있을 것 같던 일상은 문득 마디가 끊어진 악보가 되고, 누구는 풍문으로 누구는 풍문도 아닌 무엇으로 (이미 바람이 빠진 채 옥상에 널려 있는 애드벌룬 속으로) 사라지며 우리는 속에 구멍 하나쯤 있는 어른이 된다.
또래들이 다르덴 형제를 레퍼런스 삼아 누군가의 뒷통수를 핸드헬드로 따르며 그 결핍을 되려 과잉으로 드러내거나 (이제는 상투), 또는 준수한 고화질의 무빙으로 장르 연출자로서의 자신을 전시할 때 (짐작이 가는 웰메이드), 이 단편의 연출과 촬영은 요새 안 쓰는 베타캠을 굳이 대여해 특정 시기의 스탠다드 - 90년대 교육방송 청소년 드라마와 중고등학교 영상제작반의 의욕적인 과업 사이 어딘가 - 를 일부러 서툴게 재현한다. 바지런 떠는 엄마 캐릭터, 굳이 편집의 연속성을 맞추려다 더 땐땐해지는 대사 교환, 플롯의 위기를 위해 등장하곤 하는 소위 불량한 친구들 등등 익숙한 요소들을 불러오되 딱히 주제를 위해 봉사시키지 않기. 가령 기어코 애먼 방향으로 달려가는 애완견.
물론 이 또한 ‘다름’을 전시하기 위한 영악한 기획일 수 있겠다. 다만 우리의 모호한 시절을 진지하게 다루는 척 하며 결국 고만고만한 화해로 착지시키던 청소년 드라마의 외피를 일부러 차용, 스스로 고유한 무언가가 되는 전략. 좀 비약하자면 <
고양이를 부탁해>를 타란티노 식으로 만들기랄까.
장선우 감독이 <
나쁜 영화>를 만들며 지레 선언하기 바빴던 ‘무위자연’의 미학은 이렇게 십몇년이 지나, 혁신적인 기성마저 결국은 대상화했던 그 세대가 직접, 어깨 힘 빼고 재연하며 완성되는 건가 보다.
ps.
김지현 감독의 단편 등에서 종종 배우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기도 하는
이우정 감독은 자신의 작품 시놉을 싱겁게 쓰기로 유명하다 (사실 그런 걸로 유명하긴 힘드니까 이건 그냥 일종의 관용어법이다). 단편 <
송한나>의 연출의도를 통해 ‘내 얘기를 들어본다면 모두 내 편이 되어줄 거야’라 읊던 감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다음의 적막함을 고민하게 된 듯 하다. ‘내 얘기를 들어도 내 마음은 모를 거야,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이렇게. 참 묘한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