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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하나 섹스>, <
돈오> 등의 논쟁적인 영화를 거쳐, 자기 고백적 다큐멘터리 <십우도> 연작을 만든
이지상 감독이 새로운 장편 극영화 <
몽실 언니>를 내놓았다. 권정생의 소설을 영화화 했으며, 우리에게도 소설 혹은 90년에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로 낯익은 이야기이다. 밀양댁이 몽실이를 데리고 남편 정씨에게서 도망쳐 새아버지인 댓골 김씨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그 후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뀌고 6.25가 벌어지는 비극을 통해 몽실이가 더욱 더 비참한 삶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은 윗세대의 삶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관객들이 기대한 신파도 우리가 이전 세대를 추억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힘든 시대를 살아간 순수한 사람들의 비극을 측은한 감정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
몽실 언니>는 관객의 기대와 다른 부분에 위치한다. 첫 장면에서 몽실이가 엄마의 손에 끌려가다가, 다음 장면에서 검은 화면에 배경으로 기차가 달리는 사운드가 깔리면서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도망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새 아버지와 마주치고, 그 다음 장면에서 몽실이가 구박받고 집안일에 시달리는 일련의 이야기 흐름은 오히려 단순하고 무뚝뚝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영화는 고생하는 주인공의 드라마를 지겨울 만큼 극적으로 끌어 올려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지상 감독이 재해석한 <몽실 언니>는 신파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극적인 장치는 피한 단순한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몽실이는 비극적인 시대의 희생자이며 어쨌든 영화도 몽실이라는 순수한 존재가 끝없는 고통을 당하는 일종의 ‘희생자 이야기’에 맞춰 움직이긴 한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는 방법은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이야기를 건너뛰고, 공간과 시간 흐름도 비현실적인, 정말 순진한 어린 아이에게 악몽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진다면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이렇게 추억되지 않을까 싶은 단순한 이미지로만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한편의 참혹한 꿈같다. 그것은 영화가 몽실이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몽실이 아버지가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며 잘못을 한탄하자, 몽실이는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인생이 나쁜 것’이라고 대답한다.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도 몽실이의 말처럼 정말 악당이라기보다는 그 순간 악당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래서 몽실이는 어린 아이이고 여성이고 가난하고 전쟁고아이기 때문에 끝없이 비극적인 일을 겪지만, 영화는 각각의 상황에 힘주기 보다는 그저 몽실에게 다가오는 나쁜 인생과 그것이 가져오는 슬픔을 드러낼 뿐이다.
헐리웃 영화보다도 더 매끈한 스토리텔링의 한국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이지상 감독 버전의 <
몽실 언니>가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원작 소설이 가진 강력한 감정에 영화의 단순한 화법이 결합하면서 몇몇 장면에서 흔치 않은 감동을 끌어내는 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동냥 나간 언니를 기다리며 홀로 앉아있는 남남이와 몽실이의 동냥 그릇이 오버랩 되는 장면과, 고아 소년이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주는 장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