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독면을 쓴 괴한이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방독피>는 이 이상한 상황에서 여러 이상한 인물이 겪는 기이한 하루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에게 강간당했다고 생각하는 늑대 소녀는 추종자를 이끌고 도시를 헤매며 자살할 기회를 찾는다.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은 유세 중 시민에게 칼로 공격을 받아 얼굴을 다쳤고 그래서 신경이 날카롭다. 살해된 여자 친구 때문에 괴로워하는 미군이 있다. 자신을 슈퍼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남자는 방독면을 쓴 괴한을 기다리며 필살기를 연마한다. 네 인물이 만는 그 날은 마침 선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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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독피>는 명확해 보이지만 막상 결론을 정리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방독면 괴한의 현상수배 전단을 보던 소녀는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소녀는 엄마를 찾는다. 방문을 열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엄마가 있고, 칼을 들고 서 있는 방독면 괴한이 있다. 소녀가 문을 닫고 돌아서자, 거실에는 다시 쓰러진 사람이 있고, 방독면 괴한이 다시 칼을 들고 서 있다. 소녀는 천천히 들고 있던 컵의 물을 마신다. 이 장면은 무슨 뜻일까?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은 알겠는데, 상황을 말하는 방식은 괴상하다.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 태도는 비틀려있다. 영화의 냉소적이면서도 기이한 분위기는 바로 이런 태도에서 나온다. <방독피>는 명백하다 못해 유치해 보일 정도로 명확한 정치적 상징을 두고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단순히 누구를 비판하고 누구를 옹호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못 박는다. 늑대 소녀는 분명 늑대 인간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밤이 되자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은 우리가 그녀의 욕망과도 관객의 예상과도 다르다. 슈퍼 파워를 가진 남자는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고 그래서 적을 물리치려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지만, 최후의 대결에서 과연 그는 누구와 싸은 것일까? 미군이 내내 흘리던 눈물과 가진 슬픔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방독피>는 스토리 텔링이 중심인 영화이고,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들이 교차되고 하나로 합쳐지면서 절정을 만드는 예측 가능한 구조를 취했다. 구조는 예측 가능하겠으나, 영화가 관객을 이끌고 간 결말은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지면서 발생하는 어떤 쾌감과도 다르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 전 서울 시장이었고 선거일에는 서울 시장 후보였으며 현 서울 시장인 오세훈 시장은 투표 마감과 동시에 발표된 출구 조사 결과 이후 잠적했고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몇 시간 동안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보는 것이 <
방독피>와 관객이 만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정치 풍자가 목표는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엔 영화의 결말이 많은 대상을 공격하고 있다. 이런 결정 뒤에는 세상을 파란 색과 붉은 색으로 나눈다고 문제가 단순해지진 않는다는 곡사의 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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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독피>는 독특한 영화이지만 곡사의 이전 영화를 생각해보면 비교적 쉽고 재미있는 영화이다. 쉬운 이야기를 통해 관객과 만나려고 했던 <
뇌절개술> 같은 영화에 가깝다. 그리고 정치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
자가당착>과 <자가당착2>와 연결되어 있으며, 세 작품을 연작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혹은 이어질 연작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곡사는 새로운 장편 상업영화를 촬영 중인데, <방독피>가 그것과의 또 다른 연결고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영화를 부지런히 만들어온 그들이 내놓을 새로운 영화는 과연 어떨지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