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좋아하는 영화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 자체에 대한 애호라기보다는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처럼 여겨져서다. 영화를 보는 마음에 불필요한 무게가 실리다 보니 한 작품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확신을 줄 두 번째 영화가 있어야 한다. 그전까지는 감탄과 찬사를 늘어놓는 대신 기다리는 편을 선택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기어이 좋아한다는 말을 돌려주고 싶은 첫 영화가 나타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상영관에 불이 켜진 후에도 극장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영화. <
연지>(
오정민, 2016)가 그랬다.
10대 소녀의 불행 혹은 분투를 보여주는 여느 영화와 달리, <
연지>의 주인공은 참으로 무덤덤하다.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떠나기로 한 피크닉에서 ‘연지’는 혼자 남겨진다. 여행의 설렘을 고조시키던 물방울무늬의 진홍색 수영복과 엄마가 싸준 김밥 도시락은 이내 무용지물이 된다. 아니, 짐이 된다. 그 애가 등에 지고 꾸역꾸역 집어삼켜야 할 외로움과 모욕의 짐이다. 하지만 ‘연지’는 울지도, 악을 쓰며 매달리지도 않는다. 지극히 차분한 얼굴은 상습적인 폭력을 증명한다. 오늘은 늘 반복되었던 따돌림을 재차 확인하는 날이고, 그 애는 어떻게든 하루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 묵묵히 ‘연지’의 하루를 뒤쫓는 카메라 안에는 하루 치 이상의 상처가 담긴다.
‘연지’는 종일 바닷가와 동네를 배회하며 엄마가 싸준 5인분의 김밥을 먹어치운다. 중간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를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받고, 자기 돈으로 생일 선물을 사서 포장한다. ‘연지’의 무덤덤함에 기대어, 때로는 그 고요한 일상에 긴장하며 영화를 보았다. 한여름이 배경이지만 빛은 과하지 않고 카메라는 간격을 유지하며 움직인다. 상처를 숨기는 상처에는 끼어들기 어려운 묵직함이 깔려 있고, 관객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곤란을 지켜보는 입장이 된다. 주인공은 상황을 타개하지도 극복하지도 않고 다만 버틴다. 영화는 말없이 안간힘을 쓰는 그 인물을 조명할 뿐이다.
집에 돌아가기 직전, ‘연지’는 황급히 편의점으로 달려가 생수 한 통을 사서 머리카락과 수영복에 물을 적신다. 진짜 바다에서 놀고 온 것처럼. 감독이 엔딩에 준비해놓은 이 고약한 장면에서 ‘연지’가 통과하는 하루의 관문은 잔인하리만치 고되다. 영화는 교훈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관객을 목격자로 만든다. 보는 이로 하여금 판단을 중지한 채 타인이 감내하고 있는 시간 속에 발을 묶고 함께 버티도록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난 후로 이따금 ‘연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 앞에 서면 크게 울지도 웃지도 않고 미리 연습해둔 거짓으로 둘러댈 ‘연지’를 생각했고, 그러면 무심코 지나치거나 모른 척 넘겨왔던 소외된 얼굴들이 하나둘씩 기억날 듯했다.
<연지>
드디어 올해 영화제에서 감독의 두 번째 영화 <
성인식>(
오정민, 2018)을 만났다. 첫 영화와 비교하자면 <성인식>은 환하고, 심지어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서른이 코앞인 주인공 ‘백설’은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에서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대학원 진학을 고민한다. 그 와중에 엄마는 난데없이 딸을 찾아와서는 세계여행을 떠나겠다며, 이제부터라도 각자 자기 인생을 살자고 선언한다. 앞으로는 어떤 경제적 지원도 보장할 수 없다고 냉담하게 말하는 엄마 앞에서, 그 진심을 파악할 수 없는 ‘백설’은 짜증을 냈다가 애원 섞인 설득을 하다가 급기야 원망을 쏟아낸다. 갈 때 가더라도 월세와 생활비는 주고 가라는 딸의 타협안에 엄마는 강수를 둔다. 말 그대로 죽었다가, 살아난다.
이 장면에서 <
성인식>은 <
연지>가 그랬듯 끝내 고약해지는 쪽을 선택한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백설’은 당황한 채 구급차를 부르다가, 일순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문장을 상기하고는 엄마가 남긴 유서를 구겨버린다. 그녀에게도, 그녀의 엄마에게도, 그리고 관객에게도 짓궂은 순간이다. 불편한 농담을 통해 모녀는 나름의 성인식을 치르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얼굴이 된다. 감독은 <성인식>에서 다시금 관객에게 요구한다. 인물의 난처와 난처를 맞닥뜨린 인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팍팍한 세계를 목격하게끔 한다. 혼자인 ‘연지’와 혼자가 된 ‘백설’의 세계는 좀처럼 그들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을뿐더러, 딱히 도와주는 이도 없는 곳이다.
하지만 엄마와 작별하며 ‘백설’은 멋쩍고도 가뿐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백설’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연지’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도무지 안심되지 않던 그 얼굴이 ‘백설’의 웃음과 겹치면서 묘한 안도감을 자아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넘어가거나 속내를 감춰버리고 마는 순간을 포착한 공통의 장면들을 돌이켜보면서, 만약 ‘연지’가 15년쯤 후에 ‘백설’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혹은 어느 여름 저녁, 땅을 보고 걷던 두 사람이 골목에서 어깨를 부딪친다든가. 그런 부질없는 가정에 빠져 있을 때,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연지’와 ‘백설’의 모습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하다. 딸기 우유와 맥주를 마시며 엄마, 친구, 그리고 세상을 흉보는 두 사람.
기대할 것보다 감당해야 할 것이 훨씬 많은,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야 첫 영화에 대해 말할 용기가 나는 의심스러운 세상이지만, 옷장에 술병을 되는대로 처박아두는 ‘백설’과 배낭 앞주머니에서 온갖 쓰레기가 엉켜 나와도 아랑곳하지 않는 ‘연지’는 영화라는 세계에서 그런대로 마음 맞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상처와 고단을 움켜쥐고 겨우 어른이 될 영화들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성급한 위로와 질 나쁜 해결책을 거부하고 그저 수동적인 목격자로서의 자리만 허락한, 영화 속의 고약한 당신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