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야부시타 다이지,다이쿠하라 아키라, 1959

by.선정우(출판기획사 코믹팝 대표, 『웹소설의 충격』『감정화하는 사회』 번역자) 2016-08-05조회 7,661
1.

2016년 6월 30일,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이 수록된 「신동헌 애니메이션 컬렉션」 DVD를 출시했다. <홍길동>은 만화가 신동우가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 삼아,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연출을 맡아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필름이 유실된 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작품이었는데, 2008년에 일본 고베의 고베플래닛영화자료도서관(KOBE PLANET FILM ARCHIVE)으로부터 일본어 더빙이 된 <홍길동>의 프린트를 입수하여 한국어 사운드 필름과 합치는 작업을 통해 상영하면서 실제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신동헌 감독의 다른 작품 <호피와 차돌바위>와 함께 디지털 색보정 작업을 해서 DVD가 출시된 것이다.

이 <홍길동>을 2012년 11월 29일~12월 2일 한국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메카데미아 학회(미국 미네소타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 팝컬처의 연구 학회)의 콘퍼런스에서, 학회 참석자를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의 협력을 얻어 상영한 적이 있었다. 이때 필자도 메카데미아 콘퍼런스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스토리 메이커」 「이야기의 체조」 저자)의 초청을 받아 같이 관람했었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홍길동>을 본 감상으로 “폴 그리모(Paul Grimault)의 <사팔의 폭군 La Bergere et le ramoneur>을 방불케 한다”며 그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이 비단 일본의 영향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발언은, 일본 내에서는 한국이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일본을 ‘흉내 내’ 발전해왔다는 식의 인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 셈이다.

물론 한국인인 필자에게 인사치레한 것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많은 개인, 회사, 단체, 기관과 자주 싸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 평론가이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터부에 가까운 ‘덴노’와 그와 관련된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고, 요즘은 아베 신조 정권이 개헌을 논하고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헌법에 대한 논의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는데 거침없이 헌법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고, 일본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 재판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어떤 다른 사람에게 배려를 하거나 인사치레를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학자이다. 그런 그가, 단 두 번 만났을 뿐으로 생판 알지도 못하는 필자를 배려하기 위해 괜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평소에도 오쓰카 에이지가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고 (아무래도 자국이기도 하니) 타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을 가하지는 않는 편으로는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국과 중국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므로, 역시나 단순히 ‘일본에서 만연하고 있는 통상적인 편견’에 대해 반대하는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되도록 중립적으로 보았을 때에, <홍길동>이 꼭 ‘절대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폴 그리모 감독의 <사팔의 폭군>은 1952년 작품으로 당시 이탈리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애니메이션이다. 다만 개봉 버전은 감독의 의향에 맞지 않은 형태로 1953년에 공개되었던 것이었는데 (제작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나도 완성시키지 못하자 공동제작자가 자금 회수를 위해 억지로 개봉시켰음), 1967년 재판을 통해 폴 그리모가 권리를 되찾은 이후 자금을 10년 걸려 모아서 1980년 <왕과 새 Le Roi et l’Oiseau>라는 제목으로 다시 개봉했다는 복잡한 뒷사정이 있다. 아무튼 구 버전인 <사팔의 폭군>은 일본에서 1955년 개봉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문부성 선정 및 우수영화감상회 추천 등을 받았다고 함),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하여 여러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팔의 폭군>은 세기영화에서 배급을 맡아 1957년 8월 31일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고 (「동아일보」 1958년 9월 4일 자 기사), 1960년에도 8월 21일부터 재개봉된바 (「동아일보」 1960년 8월 23일 자 기사)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종전 후에 한국에서는 월트디즈니는 물론이고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고, 미국 작품만이 아니라 유럽의 폴 그리모 작품도 상영되었다는 것이다.
 

 
<사팔의 폭군> 중앙극장 개봉 광고. ‘붸니스 영화제 특별대상 및 심사위원상 수상 작품’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구라파 최고의 만화영화의 시인 포-ㄹ·그리모- 제작’이라고, 유럽 감독 폴 그리모가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왼쪽 하단에는 ‘세기영화 주식회사 배급’이라고 수입사가 표기되어 있다.

2.

그뿐만이 아니다. 자주 지적되지 않고 있지만 사실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은 1963년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란 작품이었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DVD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는 일본에서 1959년 12월 25일에 개봉된 토에이애니메이션(당시는 토에이동화) 제작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에서 시네마스코프로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첫 번째 작품인데, 토에이애니메이션 사이트의 소개를 보아도 그 당시 첫 시도였기 때문에 “제작에 엄청난 곤란을 겪었으나, 그 성과는 매우 훌륭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실제로 1960년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아동영화 부문 황금사자상(그랑프리)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문부성 선정과 우수영화감상회 추천을 받았다. (<사팔의 폭군>과도 마찬가지) “이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는, 영화 산업의 일각에 안정적인 지위와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라고까지 토에이애니메이션이 자평하고 있을 만큼, 토에이 초창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는 1958년 개봉된 <백사전> 이후 토에이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몇몇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토에이가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초기작이었던 것이다. 토에이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은 중국의 설화, 그것도 「서유기」나 「삼국지」처럼 아시아 전역에서 유명한 고전이 아닌 작품을 원작으로 한 케이스였다. (중국의 4대 민간설화 중 하나라서 오래전부터 한국과 일본 등에도 물론 전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인지도가 「삼국지」 「서유기」 「수호전」만큼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는 일본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루토비 사스케’라는 캐릭터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말하자면 토에이가 중국 원작인 <백사전>을 만든 다음 소위 ‘신토불이’랄까 일본적인 것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마음에 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작품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자, “시대극이라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평가가 높았다고 토에이 측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사루토비 사스케는 소위 ‘닌자’라고 하는 일본 창작물 속의 존재를 대표하는 캐릭터인데, 원래는 일본에서 2차대전을 전후하여 유행했던 ‘강담’1) 등과 같은 대중소설 비슷한 장르를 통해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 배경이 있다.

그리하여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이후 토에이는 <서유기>(1960), <안주와 즈시오마루>(1961), <아라비안나이트 신드배드의 모험>(1962), <개구쟁이 왕자의 큰뱀 퇴치>(1963) 등 장편 애니메이션을 속속 개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축으로 성장해갔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백사전>(왼쪽), <안주와 즈시오마루> DVD

3.

이같은 작품인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가 일본에서 개봉한 지 4년 만에, 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지 3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된 것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빠른 수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약간 편법을 사용한 수입이었고, 그로 인하여 아직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던 1963년 당시에 국내에서는 반발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63년 12월 7일 「동아일보」에 왜색 영화의 서울 상영에 대해 비판하는 독자 투고가 실렸고, 12월 17일 자 같은 「동아일보」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의 사진까지 인용하여 ‘눈가리고 아웅/판치는 왜색 붐’이란 비판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를 ‘일본 토에이(동영) 작품’이라고 명기하면서, “백 퍼센트 왜색물이라는 것과 그것이 미국을 거쳐 들어온 상품이어서 당국이 관용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즉 일본 작품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했던 것이다. 공보부(이후 문화부로 이어지게 되는 정부기관)에서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만이 아니라 역시 왜색을 이유로 수입이 제한되어 있던(하지만 그 이야기는, 수입 시도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병 동경에 가다> 역시도 수입 규제를 풀어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59년 일본 동영 제작·야부시다 감독인 <사루토비 사스케>를 MGM에서 영어로 자막을 넣어 배급(RELEASE)한 것이 틀림없는 만큼 완전히 일본 작품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 아닌 미국이나 이태리 등지에서 제작 또는 제공, 배급된 일본 작품은 수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결론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동아일보」)
(※여기 표기된 ‘야부시다’란 감독 야부시타 타이지를, MGM은 미국의 영화 배급회사 MGM을 가리킨다.)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동아일보」 1963년 12월 17일 기사

이처럼 비판적인 논조이기는 하나, 이 기사를 읽고서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가 일본 작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독자는 없을 것이고, 즉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정식 수입·개봉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나중에는 이처럼 비판론이 나오는 바람에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수입을 허가해주지는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초에는 분명히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수입이 되었다는 것을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입’이라기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지만 미국 MGM이 배급을 맡았으므로’라는 이유로, 크게 검토하지 않고 단지 실무적 차원에서 수입이 이루어졌던 것 같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한국의 여러 신문에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TV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이라는 사실을 (주로 비판하는 논조로) 자주, 또 크게 다루었고,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심지어 전문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서조차도 일컬어지는 “과거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국적을 속인 채 한국 작품인 것처럼 방영하였다”는 말이 실은 잘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 MBC나 KBS의 방송국 연감을 살펴보더라도 해당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임을 (굳이 강조는 하지 않았을지언정) 감추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까지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비판 기사를 싣는데 감춰질 수도 없고, 한국이 그때 일본과 교류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신문사에 일본 특파원도 있고 사업차 일본에 드나들던 사람들도 있는 상황에서, 방송국이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없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및 극장 상영은 ‘일본대중문화 3차 개방안’에 의해 2000년 개봉된 <무사 쥬베이>(원제 <수병위인풍첩>)가 아니라 1963년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당시 개봉 제목은 <요술 소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더불어 또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은,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가 1963년 개봉되면서 당시 국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도 이 작품을 보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 당시엔 아직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지금처럼 흔한 장르가 아니었고, 월트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 작품에 환호하면서 “우리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초기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가까운 일본이 만들어낸 상업 장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필자가 앞서 2012년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의 <홍길동> 관람 소감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에 전달하였을 때에, 2008년 복원 상영 당시 신동헌 감독이 가장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아시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중국의 <철선공주 鐵扇公主>(1941년 1월 1일 개봉)였음을 밝혔지만,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도 본 적은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는 2012년 당시 필자에게 이렇게 밝혔다.

“초당 24프레임의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을 기조로 했으면서도 부분적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점, ‘선 녹음 후 작화’2) 방식을 고수한 점, 천체망원경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고안한 그림자의 표현 등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두고 부단히 노력하며 새롭게 고안한 것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클래식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음악과 움직임의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해학’은 오롯이 감독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감독님은 ‘유머’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고, 그런 감독님의 세계는 유명한 진로소주 등 CF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미 잘 보여지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필자 역시 상영 당일에 오쓰카 에이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홍길동>의 배경 그림이나 몇몇 부분이 ‘조선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나 소나무 등의 묘사’와 ‘작품에 흐르고 있는 해학’에 대해 지적한 바 있었는데, 이 같은 필자의 감상이 어긋난 방향이 아니었음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의 이런 설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역시도,

“<홍길동>에 관한 정보, 감사합니다. 제 안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아주 분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역시 <철선공주>였군요. 그리고 디즈니. 제가 마침 지난 11월에 중국에서 <철선공주>는 디즈니의 기법으로부터 ‘로토스코프’를, 일본의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은 ‘멀티플레인’을 채용함으로써 각각 서로 다른 스타일이 성립되었다고 강의를 했습니다. <철선공주>로부터의 영향, 디즈니 수용 형식의 차이점, 그리고 각국의 전통양식과의 관계라는 3가지 시점에서 <홍길동> <철선공주>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을 대비(對比)함으로써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사(史)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쓰카 에이지가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이처럼 아시아의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관계와 각국 작품의 비교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모색을 시도했다. 2012년 당시 오쓰카 에이지는 혹시 <홍길동> 관련으로 나중에 심포지엄이나 세미나가 열린다면, 개런티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강연이든 패널로든 참석하고 싶다고 했을 만큼, <홍길동>과 아시아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연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5.

신동헌 감독은 2009년 11월 7일 일본 나고야의 아이치 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시네마 코리아 2009 ~한국 고전 애니메이션 특집~’에서 <홍길동> 상영의 게스트로 초대받아 열린 무대 인사 및 토크 이벤트에서, 참고를 하거나 의식했던 외국 작품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을 했다.

“당시에는 (참고할 만한) 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당시 장편 만화영화라면 디즈니 정도. 그리고 존 하라스3)가 만든 <동물 농장> 정도였죠.” (「시네마 코리아」 채록)

한국에서는 특히나, 1960년대에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서적이 번역되거나 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직접 작품 자체를 보는 것 외에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일본에서도 과거에는 비슷한 상황이었으므로,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 같은 경우에도 2차대전 종전 후인 1951년 <밤비>(1942년 미국 개봉)가 일본에서 개봉되었을 때에 영화관에서 무려 100번 이상이나 관람한 다음 1952년에 (월트 디즈니 사의 허락 없이) <밤비>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서 만든 만화 판을 출간하기도 했던 것이다.4) <홍길동>도 마찬가지로, 디즈니나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실제로 어떻게 그러한 화면을 만들어내었는지 참고할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작품만 보고 어렵게 제작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에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는 점, 또한 월트 디즈니 역시도 애니메이션이란 장르 자체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므로, 영화라는 장르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역시도 어느 누구 한 명의 천재가 전부를 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조금씩 새로운 기술이나 창작을 덧씌우면서 발전되어 왔다는 점은, 이런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그와 같은 애니메이션 장르 초기의 교류사(史)를 연구함으로써 당시 세계 각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왔는지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국내의 애니메이션 사(史)에 관한 서적은 물론 일본이나 서양 쪽의 서적에도 과거에 출판된 책 중에는 그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반영되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앞으로 애니메이션 학계에서 좀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6.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일본 토에이의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가 미국 MGM 배급으로 국내 수입되는 바람에 개봉이 가능했다는 것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런데, 일본에서 필름이 발견된 <홍길동> 역시도 수출 자체는 미국 회사인 20세기폭스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신동헌 감독은 ‘시네마 코리아 2009’ 토크 이벤트에서 본인은 일본 수출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당시 제작회사였던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만 언급했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당시 신문에 기사가 실린 바 있다. ‘만화영화 홍길동 등 일본에 첫 수출’(「경향신문」 1968년 6월 12일), ‘<홍길동> <7공주> 수출’(「동아일보」 1968년 6월 13일) 등이다. 국산 만화영화 <홍길동>과 실사영화 <칠공주>를 세기상사가 미국 20세기폭스사의 일본지사에 수출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기상사 작품인 이 두 영화는 폭스사 영화의 한국 수입과 바터로 수출이 결정된 것이다. 폭스사는 <홍길동>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 금년 여름에 일본 전국에 공개하며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제작, 배급한다.” (「동아일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선 ‘바터’로 수출이 결정되었다 함은 바터무역(barter trade), 즉 특정 상품의 상호 교환을 통한 수출입거래를 말한다. 바터무역은 본래 금전 거래가 없는 물물교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출액과 수입액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무역을 말한다. 즉 한국에 할리우드 영화를 팔아서 돈을 벌고 싶은 국내 영화사(세기상사)에, 외국영화만 수입해오지 말고 한국영화도 수출해야만 그에 비례하는 만큼의 외국영화를 수입해올 수 있다는 식의 조건을 내걸었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특히나 외화벌이가 중요했던 시기이니만큼 비단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통상에 있어서도 바터제를 조건으로 내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세기폭스사가 일본지사를 통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개봉을 추진했던 것을 보면, 20세기폭스 측에서는 당시의 한국영화가 미국에서보다는 일본에서 그나마 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기사에서 폭스사가 <홍길동>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라고 한 부분은 즉 일본어 더빙을 했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홍길동> 필름은 일본어 더빙이 되어 있는 것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 복원했을 때에는 한국에 남아 있던 사운드필름을 가지고 한국어 음성을 새로 덧입혔다.) 그리고 실사영화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배급한다고 되어 있는데, 슈퍼판이란 자막판을 뜻한다. 즉 주로 아동이 보게 될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아이들을 위해 더빙판으로, 성인이 보게 될 실사영화는 자막판으로 제작해서 일본에 상영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국 수입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일본 수출도 양쪽 모두 미국의 배급 업체(영화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필자가 평소에 1970년대 초반의 일본 TV 애니메이션 수입에 있어서도 미국 방송국의 역할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던 점과도 연관되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에 관련해서 올해 들어 일본의 애니메이션 연구자와 논의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한일 간 애니메이션 교류 역사의 일환으로써 언젠가 다른 기회에 발표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1. 강담(講談)이란 연기자가 무대 위 책상에 앉아서 관객들에게 역사나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낭송해주는 일본의 전통 예능의 일종. 이것이 일본 메이지 시대에 속기술이 발달되면서 강담의 연기 내용을 속기해서 만든 ‘강담 속기본(講談速記本)’이란 것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고, 이 강담 속기본의 유행이 일본에서 구어체를 보급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일컬어진다. 1911년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코단샤(講談社)가 강담 속기본의 인기를 바탕으로 잡지 「강담 구락부(강담 클럽)」를 창간하는 등 일본 출판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최대 출판사인 코단샤의 회사 이름부터가 바로 이 ‘강담’ 및 잡지 「강담 구락부」에서 따온 것이다.

이 강담 속기본에 대해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찾아본 바로는 국내에 2013년 「최천종 살해사건을 소재로 한 실록체 소설 연구」(경희대학교 대학원 동양어문학과 안대수)라는 논문에서 특정 강담 속기본 작품을 비교 대상으로써 사용했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지브리가 발행하는 소책자 잡지 「열풍」 2011년 12월호~2013년 8월호에 연재된 「잊혀진 이야기─강담 속기본의 발견」(야마시타 타이헤이) 정도가 강담 속기본에 대해 연구된 얼마 안 되는 사례인 것 같다.

강담 속기본이 ‘줄거리를 가진 대중/통속 창작물로서, 표지와 내지에 그림이 있고 캐릭터를 중시한 표현이 특징이다. 구어체로 씌어졌으며 당대와 후대의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라이트노벨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 듯한데, 야마시타 타이헤이는 ‘라이트노벨과 비교할 때 표지나 삽화의 그림이 내용과 전혀 관련없는 경우도 많고, 둘 다 통속 문화로서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단 것은 비슷하나 그나마 라이트노벨은 인터넷 상에서나 소수의 비평가, 연구자들 사이에선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강담 속기본은 당대에나 후대에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양자의 비교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강담 속기본이 일본 근현대에 있어서 현재 알려져 있는 닌자 전설, 사무라이 전설과 그 캐릭터의 태반을 만들어내었다는 점 등 일본 대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강담 속기본은 일본에서 초기의 소설, 카미시바이(종이연극), 영화, 만화 등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향후 일본에서도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강담 속기본은 어디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의 원류 중의 하나일 뿐 그 외에도 현재의 만화나 라이트노벨 등 일본의 대중문화는 할리우드 영화, 미국이나 유럽의 SF·판타지 소설, 펄프 픽션 등 수많은 영향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강담 속기본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일본 고유 문화론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연구자들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테고,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연구할 때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란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2. 프리 레코딩(prerecording; 선 녹음)이란 애니메이션 등 영상 작품에서 대사나 음악을 먼저 녹음하는 수법을 말한다. 다른 용어로는 ‘프리스코어링(prescoring)’이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제작비 절감이나 작화 스케줄 때문에 ‘애프터 레코딩’(후시 녹음)을 주로 사용하지만 미국에서는 보통 프리 레코딩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3. 존 하라스(John Halas)(1912~1995년)는 헝가리의 애니메이터.

4. 테즈카 오사무는 <피노키오>도 마찬가지로 월트 디즈니에 무단으로 만화화한 다음 출간한 바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테즈카판 <밤비>와 <피노키오>는 2005년에야 디즈니의 허락을 얻어 복각판이 출간될 수 있었다. 테즈카 사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1994)의 내용이 테즈카의 만화(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정글 대제>(한국 방영 제목 <밀림의 왕자 레오>)와 유사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디즈니 측에서는 <라이언 킹>은 <밤비>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착상을 얻었을 뿐이라고 반박했었는데, 이에 대해 테즈카 프로덕션 측에서 “만약 테즈카 본인이 살아 있었다면, ‘내 작품이 디즈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영광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라는 성명을 내놓는 것으로 끝낸 바 있었다. 또한 실제로 <정글 대제> 연재 도중에 <밤비>가 일본 개봉되었으며 테즈카가 <밤비>를 100번 이상이나 관람했던 만큼, 실제로도 <밤비>를 보고 감명을 받게 되면서 <정글 대제>를 당초 구상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던 테즈카 본인의 문장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라이언 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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