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로 만나보세요.
스티브 최(Steve Choe) 교수는 영화와 미디어 이론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 기초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독일과 영미권 출신 작가뿐만 아니라 박찬욱, 이창동 등을 중심으로 한국영화 감독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관련 논문을 집필했다.
최근에는 한국드라마에서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을 개념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도 하며,
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화비평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2016),
그리고 논문 “The Paradoxical Universal of Korean Cinema(2022)”,
“Park Chan-wook beyond Globalization(2022)”, “Sympathy for the K-Drama(2024)” 등을 집필했다.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
미국과 유럽의 영화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반갑다. 나는 영화에 관한 서적을 몇 권 집필했고, 그중 한 권은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다. 오늘은, 대학원을 시작으로 영화학계에서 내가 학술적으로 전개해 온 노력과, 그 과정에서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국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의 연구는 바로 이 책,
Sovereign Violence(20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로부터 8~10년 전부터 이미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2007년에 박찬욱 감독에 관해 쓴 에세이가 시작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한국영화에 대해 영어로 작성된 연구 결과물이나 자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영화와 관련해서는 어떤 작품 또는 감독이 중요한지, 한국영화를 둘러싼 이론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한국영화의 미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래서 독일영화라는 나의 연구 분야를 토대로, 한국영화 연구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학계에 새로운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2016)
위에 언급한 책은 1960년대에 출생한 감독들의 작품이,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통해 제기된 윤리적·도덕적 질문에 응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흔히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2001년부터 2013년 정도까지의 시간 동안 발표되었고 비평적 접근 역시 가능한 예술영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관련 감독들은 1996년 즈음 처음 개막한 국내 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등)들에서 출품한 작품을 바탕으로, 일부 고전영화가 과거에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윤리나 도덕성을 교육했던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장르의 일종으로서가 아니라, 관객의 ‘
감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또는 내러티브의 구조로서의
멜로드라마 영화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특히 복수를 다루는 작품에서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은, 관객이 어떻게 영웅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고 악인에게 이입하지 않게 되는지, 과거의 상업영화가 이러한 공감 구조를 어떻게 직조하는지를 포착해 비판한다.
멜로드라마는 UC 버클리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던 시절, 내가 훈련받은 학술적 연구 영역이기도 하다. 지도교수님들 중 한 분이셨던 린다 윌리엄스(Linda Williams) 교수님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영화계의 맥락 안에서 멜로드라마를 재정의하는 데 관심이 많으셨다. 예를 들어, 인종과 민족적 정체성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에서, 인종에 관한 편견이 투영된 인물에게 관객이 어떻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지 등을 연구하셨다. 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2000년대 초반 한국에 맞게 맥락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의 발발로 인해 자국의 도덕성과 정의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적’ 가치나 도덕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측면에서는 진보 세력이 보다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박찬욱 또는
봉준호 감독과 같은,
한국고전영화와
할리우드영화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국내 영화인들이 작품 연출 과정에서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린다 윌리엄스 교수님께서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요소라고 말씀하신) 기존 멜로드라마에서의 감정 이입 방식과 연관 지었다. 마치 사진이 찍힌 것처럼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 문화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엿보이는
사고(Thinking)의 방식이 궁금했다.
이와 같은 방향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미국에서 지냈기에, 일생 동안 미국식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학부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미학 이론에도 관심이 있어 니체, 프로이트, 앙리 베르그송, 푸코 등으로부터 비롯된 논의를 자주 접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에 영화와 관련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첫 주에는 <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더그라스 서크, 1955)이라는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작품에 대해, 그다음 주에는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에 대해 배웠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상업적 멜로드라마를 파스빈더와 같은 감독이 예술영화의 형태로 리메이크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영화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되 그 바깥의 무언가를 달성해 낼 수도 있을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영화 연구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영화의 관계에 접근하고자 채택해 온 방법론 역시 이때 깨달은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순정에 맺은 사랑>(1955) (사진: "All That Heaven Allows", IMDb)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사진: "Angst essen Seele auf", IMDb)
현재 미국에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아도르노가 전개한 문화산업론에 여전히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그의 논의와 일맥상통하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대중을 조작하고 감상성을 내세운 상업영화는 기피하고, 비판적 시선을 담지한 내셔널 시네마와 같이 섬세한 예술영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우게 된다. 나 역시 아도르노의 이론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데, 단어 자체가 ‘재생산’ 또는 ‘대중문화’ 같은 개념을 단정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문화가
어떻게 상업적이게 되는지,
지나치게 대중적으로 변모하게 되는지(소위 ‘나빠지는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학부 재학 중 관련 주제로 아도르노와 베토벤에 관해 논문을 썼다(아도르노에 따르면, 베토벤은 작곡한 곡에 대해 대가를 받았으면서도 시장의 자본주의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이후, 대학원에서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연극이나 문학과는 구분되는 ‘영화’만의 특징이 무엇인지가 논의되곤 했다. 특히 영화가 처음 등장한 1895년부터 유럽의 예술영화가 주목받은 1920년대 사이에 이러한 논의는 두드러졌다. 영화만의 차별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은 ‘
생동감 있는 움직임’이다. 비인간 존재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뱀파이어, 골룸,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19)에 등장하는 인물과 같은 비현실적 존재들은 오직 영화에서만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항상 ‘
죽음’의 개념도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은 영화인들의 작업에는 죽음이나 무생물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고, 오히려 이들 자체가 영화의 특징인 ‘움직임’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선택하고, 말씀드린 알레고리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짚어내며 연구를 진행했다.
(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 (우) <노스페라투>(1922)
마지막으로, 몇 년 전 집필한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에 관한 책 한 권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작년에 작고했으며 <
프렌치 커넥션>(1971), <
엑소시스트>(1973), <
소서러>(1977) 등의 작품들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올드 할리우드’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고 검열이 해제됨에 따라 예술영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영화, ‘
뉴할리우드’를 개척한 감독들 중 하나이다. 이런 뉴할리우드의 경향은 내셔널 시네마에 한해서만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투자금 유치, 검열 완화 등의 조치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나 재현 방식을 반영한 영화가 탄생하는 데도 분명히 기여했다.
영화 영문 연구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
이제 영어로 진행되는 영화학에 관한 주요 쟁점 두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영화학의 특성과 소재가 변화하는 양상을 다뤄볼 수 있다. 영화학 연구의 영역은 점차
미디어 분야로 확장되며 학문 자체가 ‘
매체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영화연구는 매체고고학(Media archaeology)적 접근과 더불어 미디어가 사회 기반시설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를 감지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주변세계(umwelt)에 더욱 주목함에 따라, 이제 영화학계에서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연구에 비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 즉 네트워크, 클라우드, 플랫폼 등에 대한 연구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동시에 아카이브를 통해 관련 문서를 조사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특정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작성된 계획안, 공연에서 스모크 머신을 사용한 방식, 미술 전시에 쓰인 공간 등 개별 작품이나 작가가가 아니라 그것을 지원한 요소들에 대한 기록에 집중하게 된다. 해당 문서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다면 훨씬 유리한데, 이를 통해 국내 매체의 기반시설을 영어로 연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은 대학에서의 한국영화 연구가 대개 ‘
한국학’이라는 분과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학계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학을 포함한 동아시아학, 즉 미디어학이 아닌 특정 문화권 관련 언어문명학부에서 연구된다. (북미와 남미, 유럽 지역 학생들이 한국에 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영화 역시 이러한 학문 분과의 특성에 맞게,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방법론(팬문화 연구 등)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 중심의 인문학적 접근법이 도입되는 사례가 드물어 아쉽다. 나는 SNS를 통해 팬들이 생성한 해시태그 개수를 측정하기보다, 보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국내 미디어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본 강연을 진행하신 다른 연구자분들께서도 이에 관한 내용을 전달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학계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중심의 방법론을 지향해 영화를 연구하고 계신 데 경외를 표한다. 사실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연구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충분히 진행될 수 있지만, 해외 학계의 제도적·언어적 장벽, 경제적 지원의 한계 등으로 인해 이들은 거의 매번 동아시아학 관련 분과에 소속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이들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해 인간, 윤리, 도덕,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기반 등에 관한
커다란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나 역시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라는 학술지의 공동 편집자로서, 최근에 투고된 국내 영화배우
문예봉에 관한 글과 같이, 한국 출신 인물이나 한국에 관한 기타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매체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더욱 받아보고 싶다.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페이지에 대한 설명
한국드라마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정서적 막간
위의 내용을 마무리하며, 이제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관한 나의 최근 관심사로 주제를 바꿔보고자 한다. 연구자 이민주는 한 논문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모으며 발생한 초국가적 미디어 및 관광 현상으로서의 한류를 설명한다.
*주1 그는 기술이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
감정’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도르노는 감정은 가치 없고 상업적인 것이라며 비판했는데, 그의 관점대로라면 보는 이의 감정을 상업적인 의도로 북돋는 콘텐츠가 가득한 최근의 뉴스와 미디어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는 수많은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이 갖가지 감정을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발생시키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드라마’는
감정과 미디어의 관계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데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한국드라마가 감상자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데 특화되었다는 점에는 많이들 공감하지만, 이 감정이 ‘어떻게’ 불러일으켜지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관련하여 내가 소개하고 싶은 개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
정서적 막간(Affective interlude)’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음악이 흐르며 화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거나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을 말한다. 인물들이 자신에게 아픈 기억을 안겨 준 다른 인물을 회상하는 등의 장면에 주로 사용되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등장하는 첫 쇼트에서 감상적 의미가 부여된 소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음악은 감상자가 리듬에 맞춰 장면 속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도록 한다. 여기서만큼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가 아니라 드라마의 미학적 특징이 모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1920년대의 독일영화들처럼, 그 자체로 알레고리인 장면(단 한 장면일지라도)을 통해 모든 의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한국드라마 특유의 기법은, 감상자가 ‘무언가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강박적일 정도로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최근 드라마 <눈물의 여왕> 중 백현우(
김수현)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홍해인(
김지원)에게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정서적 막간이 자주 사용되곤 했다. 홍해인이 본래 백현우가 사랑한 아름답고 미덕을 갖춘 인물이며, 그런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백현우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 흐르는 음악과 슬로우 모션의 반복 등을 통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정서적 막간은 이렇게 인물이 경쟁적인 사회 환경으로 인해 본래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되더라도 사실 연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이를 계기로 관객이 그의 진심에 이입하게 만든다.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 대한 연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의 순간에 밀착해 세밀하게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박사 과정 중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떠올렸던 질문, 즉 미학적 측면에서 특정 작품의 관객은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한국드라마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드라마에 대한 연구 전반의 다양성과 깊이가 향상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정지현, 2022) 속 정서적 막간 역시 보여드리려고 한다. 이 장면은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드라마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한국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해외 팬들이 한국적 감성에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는 사전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이 장면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지만, 백이진(
남주혁)은 화면이 분할된 경계를 넘어 나희도(
김태리)의 손을 잡고 그를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오고, 등대를 향해 뛰어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진이 과거에 남긴 음성메시지를 희도가 반복적으로 듣는 모습이 나타난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음성메시지를 재생하는 공중전화기를 매개체로 설정한 이 장면은 더더욱, 팬데믹 기간 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던 이들의 시공간을 이어준 미디어 기술의 효과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장면의 시간적 배경 역시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발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8년으로 설정함으로써, OTT 플랫폼을 이용하는 수많은 해외 감상자들이 한국인들만이 느낄 수 있던 감정과 애환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디어는 물리적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시공간을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그리고 나희도는 음성메시지를 반복 재생하기 위해 공중전화기의 버튼을 계속 누르고, 그가 눈물짓는 모습 역시 소프트 포커스에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한국드라마나 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OTT 플랫폼은 사실 한국인들의 감정을 아카이빙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접하기 위해 이용자는 이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매체의 생태학과 연관된 측면 역시 이 장면에서 지각할 수 있다. 물론 극장상영 문화 역시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감상자의 마음에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문화로 자리매김한 ‘스트리밍’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콘텐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의 중요성
한국영화의 영문 연구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강연을 마치고 싶다. 젊은 학생이나 연구자들이라면,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물론 기존에 발표된 논의를 많이 살펴보고 존중할 필요도 있지만, 여기에는 미디어를 통해 상기하게 되는 유의미한 질문들이 빠져있을 때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방법,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 정의에 대한 이해, 한국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같이 아직 충분히 답해지지 못한 질문들에 집중해보자. 한국드라마의 매력을 분석하는 연구 분야에 한해서는 특히 ‘감정’이라는 주제가 더 많이 연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본능적으로 친숙함을 느끼는 영역인 만큼, 한국인들이라서 더욱 민감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연구를 체계적인 학술 프로젝트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영화나 미디어와 관련해 주로 연구하고 계신 윤리, 도덕성, 감정 등은 상당히 초국가적인 주제인 것 같다. 그런데 ‘한국영화와 드라마’라는 내셔널 시네마에 근접한 개념을 활용해 이를 연구하신다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을 듯한데, 관련하여 고민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실지 궁금하다. 동시에,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초국가적 콘텐츠가 되면서 다른 국가의 콘텐츠 창작에 발휘하는 영향력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답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국가성을 띤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을 안고서라도 연구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련 주제를 연구할 때 주로 참고하는 텍스트는 롤랑 바르트의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1980)로, 바르트는 여기서 사진에 항상 죽음과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논의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촬영된 어머니의 사진을 다루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집필을 이어간 시점에서 해당 사진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사진이나 영상의 이면에는 ‘인식’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잊지 않은 채로 영화를 연구했으면 한다. 이미지에 대한 빠른 소비는 오해와 오독, 정치적 편향을 낳기 쉽다. 어떠한 인식을 전제로 이미지에 접근하는 것이 위험할 수는 있지만, 바르트 역시 사물이나 현상의 ‘전체’를 드러낼 수 없는 사진만을 주제로 위 논의를 이어갔기에, 그 역시 어느 정도의 위험을 품고 이미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시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콘텐츠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보면 국가 또는 남성주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연구에도 이 관점을 적용하고자 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 드리자면, 사실 최근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콘텐츠가 초국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국가의 창작자들이 한국 콘텐츠를 얼마나, 또 어떻게 모방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감정’의 발생을 강조하는 한국드라마나 영화가, 영상 매체의 내러티브에 잠재된 감정 전달 능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해당 연구 주제는 한국 콘텐츠가 아니라 ‘미디어’와 관련된다고 이해해할 수 있다.
(질문2)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인지도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작품들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해외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지역을 북미로 한정한다면, 북미 내에서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연구들이 어떤 방식과 비전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고 보시는지도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학술지를 편집하다보면,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주제로 한 원고가 최근 상당히 많이 투고되고 있다. 다만 필자들은 대부분 인도나 동유럽, 러시아 출신이고, 영어권 필자들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그 이유가 근래 한국영화의 중요도가 낮아져서, 혹은 K-팝이나 한국드라마를 분석하는 방법론이 여전히 모호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연구자들이 과거에 학계에서 교육받은 내용은 이제 구시대적인 방법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찾고, 최근 영화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주 관심사인 동시대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편의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에서 발표된 상업영화들은 아쉽게도 ‘상업영화’라는 이유로 학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영문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므로, 누군가가 시작하여 텍스트를 마련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문3)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서 올드 미디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신 점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그룹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한 비디오테이프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한국드라마와 K-팝(뮤직비디오)의 미학적 정체성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더불어, 시간의 정치성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독일과 미국, 한국의 영화를 다루심으로써 초국가적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야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발생한 시대에 근대적 및 전근대적 요소를 비롯한 이질적 사회적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개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한데, 세 국가의 시간성을 어떻게 병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지에 대해 듣고 싶다.
(답변)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는 데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이 정서적 막간에서만큼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음악과 이미지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이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공간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 자체로 초국가적이면서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요소이다. 그래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구조를 갖추게 되는 듯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연구에 임할 때 내 자신을 ‘지식인’으로 설정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급해주신 블로흐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비껴간(untimely) 세계에서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며 세 국가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보다 동시대 학생들이 주목하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다.) 연구를 시작한 초반에는, ‘독일 분과의 유일한 한국인’ 또는 ‘영화학과에서 윌리엄 프리드킨에게 관심을 가진 유일한 학생’과 같은 신분이었기에, 연구자로서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설득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여러 국가나 문화권의 이론을 참고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감상하기는 하지만, 이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사실 아직 ‘외부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금의 젊은 세대의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현재 본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 주저하지 말고 연구를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과거에 연구를 시작한 시점의 나 역시, 미국에 위치한 한국계 지식인으로서 내가 가졌던 관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블로흐의 개념을 빌려 해석해주신 점이 정말 흥미롭다.
(질문4)
현재 비교문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함께 연구하는 동료 중, ‘한국드라마’를 소재로 설정한 이들은 대부분 해외 출신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연구를 위한 적당한 방법론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영화처럼 분절된 텍스트가 아니기에 드라마 특유의 연속성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 상업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비평적으로만 독해해서 단순히 문화산업의 산출물 중 일부로만 취급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서라도 한국드라마를 연구 주제로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그래서 어쩌면, 드라마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이 연구 주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나 굳이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부상시키는 주체는 외부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이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자 한다.
(답변)
나 역시 수업 중 외국인 학생들을 만나 그들이 한국드라마의 어떠한 부분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물어야 할 때가 있다. 다만 그들과 나는 출신 국가는 물론 성별이나 연령이 다른 경우가 많기에,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특정 작품이나 장면을 인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인류학적 연구 방법론으로서, 외부인이 특정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구성원들을 지켜보는 참여 관찰법(Participant observation)에서와 같은 태도를 갖춰 보기를 권한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외국인 연구자들의 드라마 감상 후기에 대해 직접 문의하고 대화함으로써, 그들이 한국드라마에서 새롭게 짚어낸 지점을 발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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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Min Joo Lee, “Touring the land of romance: transnational Korean television drama consumption from online desires to offline intimacy”,
Journal of Tourism and Cultural Change, vol. 18., No. 1., 2020, pp. 6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