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1.
2013년, 영화진흥위원회가 홍릉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30여 년간 운영해오던 필름 현상 업무를 종료했다. 이를 끝으로 국내의 모든 필름 현상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사실상 한국의 상업적 필름 관련 산업 대부분도 정리되었다. 이제 무비 필름을 현상하고 프린팅 하려면 해외로 보내야만, 무질서하게 흩어진 필름의 은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필름이라는 매체의 물성을 점점 더 멀리 밀어내고, 디지털 이미지의 매끈하고 평평한 표면만을 우리의 시각 경험 중심에 남겼다.
미디어의 발전은 흔히 필름에서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궤적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비디오와 디지털을 먼저 접한 뒤 필름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 적어도 필름은 과거의 매체가 아니라 디지털 이후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였다.
그러나 내가 필름이라는 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 ‘뉴미디어’는 이미 영화산업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었다. 사물의 가치가 경제적 효용성과 합리성을 통해 판단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름은 디지털 매체의 편리성과 효율성에 밀려 점차 추방되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효용의 관점에서 퇴보한 기술로 여겨졌던 이 사물을 직접 다뤄 보기 전까지는 필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흔히 필름은 그저 과거의 감성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소비되거나, 디지털과 이분화된 대립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이 사라진 매체를 추억할 기억도, 향수에 젖을 과거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필름과 디지털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매체가 발생시키는 관계를 통해 필름을 이해하고, 다룬다. 오히려 이런 관계가 미디어가 하는 일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며, 선형적 시간성에 대한 기성의 인식을 갱신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투명한 감각>(2022)
독일 하메른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뒷이야기를 다룬 <투명한 감각>(2022)은 이와 같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필름 애호가들의 실천을 사라진 친구를 기억해 내기 위한 세 사람의 분투로 알레고리화한다. 카메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다리를 저는 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이. 이 세 아이는 피리 소리를 쫓아 사라져 버린 친구들이 남기고 간 사물들을 매개로 그들을 기억해 낸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조각을 덧대고 연결해가면서 서사를 작동시키고자 하는데, 이들이 재연해 낸 서사는 사라진 친구들의 시간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공동의 증언을 통해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여전히 필름으로 작업하는 이들의 창작하는 방식에 관한 은유로, 이들은 더 이상 산업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장비와 장치를 3D 프린트를 이용해 직접 생산하고, 그것들을 온라인 공간에 올려 자신과 같은 애호가들과 공유한다.
3D 모델링으로 새롭게 고안되어 공유되는 16mm 현상장비
<투명한 감각>이 공동의 실천을 통해 과거의 매체를 ‘지금, 여기’로 불러냈다면, <베르팅커>(2022)의 경우 상상력을 통해 실존하는 별자리와 가상의 신화를 연결하여 매체를 ‘지금 여기’로 소환한다.
<베르팅커>(2022)
<베르팅커>는 실제 존재하는 별자리 ‘파리자리’에 착안해, 별자리가 된 사물의 삶을 은유한 작업이다. 1603년, 독일의 천구 지도 제작자인 요한 바이어(Johann Bayer)가 만든 천체 지도 ‘우라노메트리아(Uranometria)’에는 51개의 별자리가 표기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파리자리이다. 이 작품은 ‘파리자리’에 대한 가상의 설화를 만들어 필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베르팅커>는 과거에 사물과 장소를 실로 묶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내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로, 존재한 적 없는 ‘베르팅커’라는 대상을 상실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디지털로 이미지를 촬영하고, 3D로 이미지를 생성한 뒤 이를 필름에 프린팅하고, 필름 위에 잉크로 직접 드로잉하는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추상화된 이미지는 필름의 물질적 표면 위에 드러나며, 그 후 잉크라는 물질 자체가 필름 표면 위에 새겨지는 화학적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기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제작된 <베르팅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익숙하지 않은 시각적 경험을 제안한다.
2.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경험은 더욱 개별화된 가운데 선택의 폭은 더 넓어졌다. 영화 역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작 과정에서도 물리적·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렇게 확장된 선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이라는 체계는 우리의 선택의 폭을 익숙하고 비슷한 관심사 안에 가두고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역시 정해진 프로그램과 에셋(Asset)의 사용에 의존하여, 역설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는 디지털 기술이 전례 없는 창작의 자유와 효율성으로 모두가 영화를 제작, 배포할 수 있는 민주적 시대를 열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대로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세계가 과연 우리의 경험을 민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확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패터슨>(2016)
영화 <
패터슨>(짐 자무쉬, 2016)의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는 버스 안에서 만나는 무작위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이자 소아과 의사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시 또한, 진료 현장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탄생했다. 영화 속 래퍼가 읊조리는 윌리엄스의 시구 “관념이 아닌 사물로(No ideas but in things)”는 이러한 ‘직접적 접촉(immediate contact)
*주1’이 창작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직접적 접촉’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람이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확장해가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접촉을 통해 개별화된 ‘나’ 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이 접촉의 중요성은 비단 창작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데,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관람이라는 행위를 통해 예상치 못한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낯선 이야기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 영화는 그런 낯선 접촉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확장한다. 반면 최근 디지털화된 우리의 경험은 점차 통제 가능하고 선택된 것들로 제한되며, 예측 불가능한 접촉에 대한 면역력을 잃어 가는듯하다.
이런 디지털 시대에, 필름 작업은 창작에서의 접촉과 제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필름 장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을 통해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퇴역한 군인의 삶, 때로는 사라져 버린 극장의 은퇴한 영사 기사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필름이라는 물질적 저장 매체는 단순 도구를 넘어, 창작자와 물리적 환경, 그리고 그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작업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
(좌) 카메라 관련 장비수리 진영사 / (우) 서울아트시네마 전 영사 기사님의 작업실
또한, 필름의 물리적 특성은 창작에 있어 물리적 제약을 제시한다.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필름의 길이에 의해 제한되며, 이미지를 보기 위해 복잡한 현상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온도와 습도, 스크래치 등 물리적 조건에 민감한 필름은, 디지털 기술에서 간과되는 물질성과의 상호작용을 다시 일깨우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경험이다.
작업 중 만나게 되는 이러한 예상 밖 사람들과 물리적·시간적 제약은 상상력을 요청했고,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알지 못했던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상상력은 현실적 제약과 접촉을 토대로 성장하며, 디지털 세계의 무한한 자유만으로는 물질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최근의 작업 <루프>(2024)는 이렇듯 디지털 장치들의 물질적 조건이 신비화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 세계는 디지털 매체가 지닌 물질성을 얇은 표면 안으로 숨기고 이음새를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마치 그것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특징은 디지털 이미지가 무한히 확장 가능하고, 물리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신비화의 전략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단편만을 경험하게 한다는 비판 아래, 최근 이미지 지지체들의 얇아진 세계를 열어젖혀 이미지 기기의 기능 중 하나인 반복 재생의 기능을 루프라는 시스템으로 가시화했다. 보다 가볍고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디지털 미디어의 시간에서, 인간의 몸을 비롯해 유한할 수밖에 없는 물질세계와 마주해 보려는 의도로 진행한 작업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디지털을 경유한 필름의 이미지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세계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필름 이미징 작업은 단순히 과거 매체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롭게 주어진 선택지를 활용해 지금의 선택지들을 재평가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필름은 우리에게 ‘관념이 아닌 사물’로서,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진 제약과 타인의 이야기로부터 예상치 못한 응답을 이끌어내는 활동이 아닐까? 디지털 시대에 불편하고 현실적인 제약에 끊임없이 응답해야 하는 접촉과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필름 작업은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영화가 가진 힘을 재조명하며, 다양한 존재와 현실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하는 상상력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
주1.
윌리엄스는 시는 도서관 같은 고독한 공간에서 벼려진 시인의 독특한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거의 무시되어온 사물이나 환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쓰여져야 한다고 믿었다. (진은영, 김경희, 「영화 <패터슨>에 나타난 시와 예술의 공공성」, 『문학치료연구』 50호, 한국문학치료학회, 2019, 181쪽.)
윌리엄스가 다루는 대상은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오로지 평범함을 통해서 평범함을 벗어나([the] banal to escape the banal)(SE 236)고자 하였으며, 오로지 상상력을 통한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사소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광대한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류기택,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적 상상력과 상대성 이론」. 『영어영문학연구』 41호(1), 32쪽.)
한우리(미술작가) l 물질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포털>(2024), <루프>(2024), <베르팅커>(2022) 등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