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영화의 발흥 이래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추구는 극장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카메라가 구현해 낸 재현의 정밀성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선행매체인 연극 역시 사실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극과 영화가 하나의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관객을 나눠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 속에서 그 영향관계는 훨씬 긴밀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획득한 ‘여배우’는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식민지 조선 극장문화의 지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존재였다. 재래의 관습이었던 여형배우는 여배우의 등장과 함께 전근대적 유습으로 낙인찍혔다. 이것은 배우와 배역의 생물학적 동일성이 여성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근원적인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다.
무대와 스크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여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공의 시선 속에 노출된 육체의 감각적 즉물성이야말로 여배우의 지위를 굳건한 지반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으며, 여배우들의 육체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 앞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여배우들을 향한 응시는 극장 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직업적 영역에서의 공공적 삶뿐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사적인 삶 또한 살아간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두 영역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누구라도 품을 법한 보편적 욕망이겠지만, 유독 여배우에게만큼은 직업과 일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수진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여배우가 문화적으로 ‘
구성’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1 육체를 통해 현시된 여배우의 존재감은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와 이에 기반한 극장 체험의 여파는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적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을 혼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사생활은 ‘스캔들’의 형식으로 소비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했던 전통적 관념이 맞물린 결과, 여배우의 ‘사생활’은 단순한 관심거리의 수준을 넘어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여배우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이월화 또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배우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생과 여급 일을 병행한 바 있다. 이월화에게 사치와 허영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토월회가 해산한 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복혜숙은 ‘비너스’라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마찬가지로 비난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좌)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우) 복혜숙
특히 성욕이 강한 여성이나 신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경우, 사생활 또한 문란할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 둘러싸였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도 투사되었는데, 그들의 사생활을 다룬 가십성 기사들이 신문 연예란의 단골 메뉴였던 것은 대중적 관심의 향배를 잘 보여준다. 여배우들은 수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왕성한 남성 편력을 지닌 이들로 지목되었으며,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라 낙인찍혔다. 물론, 스타의 화려한 삶과 막대한 재력에 대해 찬탄하는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천문학적 주급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물론이고 사치스러운 취미활동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선의 연예계에서 여배우는 헐리우드 스타와 같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즉, 여배우는 자신의 힘으로 직업적 성취를 이뤄낸 당당한 여성이 아닌, 생활난에 시달리는 가련한 존재이거나 끝내 ‘첩살이’ 신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이들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여배우의 전도, 남배우의 전도- 이것이야말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오늘날 만사가 초창 혁신기에 잇는 조선에 잇서서
더 크게 더 탐탁하게 바랄 수는 업다고 치드라도 인생의 흥망을 기약하는
청춘기에 잇서서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은 직업에 몸을 붙이게 되는 때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여배우 여류 무용가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지』
여자로서는- 더욱히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여성에게는 마지막 닥치는 문제는 반드시 이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에게로 가게 될까.
『첩!』 그것이야 참으로 참으로 예술가를 극도로 모욕하는 말이다.
『재산가의 부인!』 그것은 좋기는 하나 졸연히 얻어 걸리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재산가치고 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여배우니 무엇이니 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십이 넘고 나서 사면을 둘러보아야 모두가 기혼 남자들뿐이다.
『그러면 착실한 신사』 아직도 조선서는 소위 착실하다는 청년 쳐 놓고는
사리 잡힌 가정 쳐 놓고는 배우 안해이나 여배우 며느리 얻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머리 길게 기르고 누더기 가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같은 경우
같은 식경에 도취되어 있는 예술가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업시
『하는 수 있나. 사랑만 해 주면 그만이지. 첩 노릇이라도 해야지!』
눈물겨운 탄식이나 나아올 것이다. 이미 여배우 노릇을 하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장차 나아올 여배우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것은 여배우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 단체 그 사회의 죄도 아니다. 오직 조선의 민도가 일반의 머리가 아즉도
예술- 더욱히 무대예술에 존경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함으로 적어도 배우 노릇을 하고자 나서는 분은
우선 이담에 크게 고려를 하야 사랑에서 사랑으로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랴는 무거운 결심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더라도 상당한 배우자가 나기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기막힌 결심을 갖든지.
『잘 놀면 그만이지』
여배우 노릇을 부자의 눈을 호리는 수단으로 알고
무대를 매음부의 전람회 같이 알든지 이 세 가지 길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1035쪽
이춘풍, “생활로 본 그들의 내막 - 배우, 레뷰껄, 딴써 등등”(5), 《중외일보》, 1929. 11. 12.
이춘풍이 연재한 글은 사뭇 직설적이면서도 신랄하다(‘이춘풍’은
이서구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배우를 비롯하여 여류 무용가나 레뷰걸과 같은 여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자조섞인 어조로 소개했다. 그의 글 속에서 여성 연예인의 생활상은 사실상 성노동자의 삶과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 어려운” 조선 여성의 처지에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재산가의 부인”이 되자니 그들은 대부분 조혼을 해서 본부인이 있는 상태이고, “착실한 신사”에게 시집가자니 집안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법한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뿐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배우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서구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처지를 동정한다. 그가 보기에 결국 여배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방종한 여성이 되어 자유를 구가하거나,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놓고 “부자의 눈”을 홀리기 위해 극장을 “매음부의 전람회”처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영화 <
아리랑>(나운규, 1926)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일선은 배우 활동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능주(전남 화순군) 지역 부호의 자제인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다. 이른바 ‘신일선당’이라고 불렸던 열성팬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정성껏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신일선이 <아리랑>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와도 관련된 반응일 것이다. 신일선은 주인공 영진(
나운규)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는데, 호색한의 위협을 받는 순진무구하고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그러한 이미지가 배우 신일선에게도 겹쳐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만, 양승환에게는 본처가 있었기에 결국 신일선도 ‘첩살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일선이 가난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친오빠의 강권으로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지만 신일선의 근황, 특히 그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일선 이야기는 여배우의 박복한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신일선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는 여배우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남성 편력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는 데 그쳤다. 잔인하게도 여배우의 사랑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 사건’과 연관되었을 때, 즉 죽음을 담보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 조선의 유명 성악가이자, 토월회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윤심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수의 연애 스캔들에 휩싸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나,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된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재규정되기에 이른다. 영화 <
아리랑 후편>(이구영, 1930)에서 신일선의 뒤를 이어 ‘영희’ 역으로 출연했던
임송서 역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음독자살을 택한 바 있다.
미수 사건에 그치진 했지만
이애리수의 ‘정사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행가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가 높았던 이애리수는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배동필의 부모는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했고, 결국 그들은 다음 생에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이루고자 동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소식은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국 배동필의 부모가 이애리수의 연예계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훗날 배동필의 본처가 찾아오게 되자 위협을 느낀 이애리수는 재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이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좌) 윤심덕 (우) 이애리수
이처럼 여배우를 둘러싼 시각은 냉랭했으며, 때로는 음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은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에 머물기보다
예술의 주체로 거듭나기 원했으며,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론장에 기입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전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가시화되었다. 1931년에는 ‘Y.Y생’이라는 필명을 내세운 필자가 《동아일보》를 통해 “여배우 언 파레이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주2 비슷한 시기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무대 스타- 순방기”는 매 회차마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한 쌍으로 묶어 주요 활동이력과 연기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에
서광제는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다룬 “세계영화계 행각”을 연재했는데, 이 글들은 여배우를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예술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직업적 전문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춘풍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여배우는 이제 공공적 담론장에서 ‘예술가’로 조명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여배우’가 타고난 외형이나 신체적 조건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전경화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노출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신카나리아는 유명 여성인사들의 새해 포부를 밝히는 지면을 통해 장차 연극을 연구하며 일생을 배우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으며, 새해에는 연극 이론서를 집중적으로 독파할 것이라 밝혔다.
*주3 1933년에 《매일신보》가 개최한 신년 좌담회에 참석했던 이경설과 이애리수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배우가 오히려 남배우들보다 “책임 있게 일을 잘 한다”고 주장했다.
*주4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이명우, 1935)의 주역이었던
문예봉은 발성영화에 좀 더 “적합한 억양”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으며, 극예술연구회의 대표적 여배우인
김복진 또한 “어린애 역부터 늙은이 역까지”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제몫을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주5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장기간 연재된 “스타의 기염” 시리즈에서도 여배우들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차홍녀,
한은진, 남궁선과 같은 연극배우는 물론이고, 문예봉,
김소영을 비롯한 영화배우들까지 총망라된 이 시리즈에서 여배우들은 자신이 곧 예술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같은 맥락에서 <
미몽(죽음의 자장가)>(양주남, 1936)의 한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당대의 최고 인기스타였던 문예봉이었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까지 버렸던 인물로, 그의 일탈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찌보면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처벌 서사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을 둘러싼 해석의 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의 쇼트들은 내연남인 창건과 함께 무용 공연에 참석했던 애순이 박경림(
조택원)의 독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시선 편집(eyeline match)이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게 될 경우, 시각 주체의 욕망과 그것이 투사된 대상의 정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다면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이 장면만큼 주인공 애순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노출된 순간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몽(죽음의 자장가)> 중
이 장면이 문제적인 것은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식민지기의 극장 속에 착종된 욕망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객석에 앉은 애순의 모습은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시선의 대상으로서 포착된다. 시선의 주체로서 애순은 무용가의 춤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응시는 창건이 자리를 비운 직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객석에 앉은 애순을 향한 남성들의 응시는 부재하는 창건의 자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경우, 무제한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은 애순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시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잡담을 주고받는 산만한 남성들과 달리 무용가의 춤에 집중하면서 극장의 본래 취지에 걸맞는 ‘이상적 관객’의 형상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이 지닌 미묘한 해석의 결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미몽>은 ‘신여성’을 부정적 표상으로 낙인찍고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결코 포합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 또한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애순’의 모습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폭압적인 시선을 예술적 주체를 향한 주목으로 바꿔놓기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의 무지함에 대해 항변하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허히 채우고자 했으며, 극장문화의 공진화적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한 바 있다. 기계장치의 냉혹한 메커니즘 속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만 영화를 통해 해방의 서사를 발견한다. 즉,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게 되지만, 그 가혹한 테스트를 의연하게 버텨낼 뿐 아니라 적극적 상호침투를 통해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를 넘어 예술적 주체로 발돋움하기 원했던 식민지 조선 여배우들의 인정투쟁이야말로, 영화를 현대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복수’를 가하는 장치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생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
주1.
우수진, 「여배우의 사회문화적 구성과 이월화」, 『현대문학의 연구』 82, 한국문학연구학회, 2024.
주2.
‘Y.Y생’은 김유영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주3.
기사, “직업여성의 가두에서 맛는 1931년 - 신산한 그들의 생활에서 새해의 출발을 보자!”, 《조선일보》, 1932. 1. 2.
주4.
기사,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 1. 3.
주5.
기사, “백화요란한 음악, 미술, 극, 영화, 무용 각계의 성관 - 예원에 활약하는 여성들”, 《동아일보》, 1936. 1. 1.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