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FA 특강노트] '한국영화’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장르적 ‘팬덤’과 ‘한류’ 담론의 관계성에 관한 한 고찰 UC 데이비스대 역사학과 김규현

by.신재영(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2024-12-11조회 526
사진: "Oldboy", IMDb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로 만나보세요.
 

김규현 교수는 근•현대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일본 대중문화(특히 만화)와 한국영화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영화 리뷰 사이트 “Koreanfilm.org”에 20여 년이 넘게 한국영화에 대한 리뷰를 기고할 만큼,
그는 열렬한 영화 팬이자 장르영화 ‘덕후’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The Age of Visions and Arguments: Parliamentarianism and the National Public Sphere in Early Meiji Japan(2008)이 있고,
“The politics of national language and wartime mobilisation of everyday life in late colonial Korea, 1937-1945”(2016),
“Pak Chan-wook’s Thirst: Body, Guilt and Exsanguination”(2013) 등의 논문을 집필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대한 연구서 출판을 기획 중이며, UC 데이비스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일본-한국 전공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숨은 주역,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

‘한국영화’에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의 변화라는 중심 주제를 상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하고 싶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한국영화는 계속 발표되어왔고, 이때부터 한국인들은 단 한 번도 한국영화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영화사 관련 문헌 자료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다만 이제는 한국영화를 인식하는 지역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이에 걸맞게 세계 영화 팬들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지 않은 이 영역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품의 텍스트를 직접 분석하거나, 작품을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고찰하고 문화•사회사 이론을 적용해 해석하는 등 각기 다른 방법으로 구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엄밀히 말하면 영화를 꾸준히 사랑해온 한 명의 ‘영화 팬’에 더욱 가깝기에, 이번 시간에는 이러한 학술적인 관점을 가지고 답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일본만화 덕후이자 컬트영화 팬이었던 내가 대학 입학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고, 지금까지 동아시아 역사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한국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한국영화의 재발견을 거듭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타인의 부추김이 동반되곤 하는 ‘공부’와 다르게, 소위 말하는 ‘덕질’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스스로 열중하게 만든다. 그 에너지는 실로 강력해서 덕질을 이어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소재를 ‘공부’하게 된다. 공부의 의의나 성취를 타인이 인정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1960~7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만화 덕후로 지냈다. TV에서 <마징가 Z>를 본 후 명동으로 가서 원작 만화를 찾아 읽으며 나가이 고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바벨 2세』(1970)를 보고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6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삼국지』 시리즈를 그리기도 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등의 흥미진진한 추억이 가득하다. 그렇게 일본문화에 익숙해지고 흥미를 붙인 끝에 일본 역사를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역사 연구자인 내가 수많은 영화에 대한 학술 논문을 내놓고, 바야흐로 박찬욱 감독 작품의 연구서를 집필하려는 의지를 다지게 된 데 역시, 타인의 인정을 애써 요구하지 않는 애호의 마음이 작용했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불리기까지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학술적 논의를 통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한 요인이 있다. 바로 ‘덕후’로서 그 애호의 마음을 발휘해온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들(retailers and brokers of popular culture)’이다. 이는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며, 일명 ‘컬트영화 팬’을 지칭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여기에 속한다. 특정 장르의 만화나 영화에 열광해 자발적으로 펼쳐온 활동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대중문화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에 부합하고 있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그레이 마켓, 그리고 광학 매체

2023년, <올드보이>(박찬욱, 2003)가 개봉 2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재개봉되었다. 나도 캘리포니아주 에머리빌의 한 극장에서 관람했다. 놀랍게도 흥행 성적이 훌륭했다. 재개봉 첫날 전미 박스오피스 9위를 기록했고, 2005년 북미 극장 개봉 당시에는 약 70만 7천 달러였던 수익이 이때는 약 170만 달러로 2배가 되었다. 개봉 직후에는 대중이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몇몇 작품은 세월이 지나며 결국 그 가치를 인정받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런 한국영화들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 즉 1990년대부터 한국영화의 발전이 본격화되는 데 기여한 몇몇 조건들이 있다. 먼저,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고 검열이 완화되며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정치적 이슈나 성적 묘사 등을 포함한 소재와 그에 대한 표현 방식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영화를 공부한 ‘영화학도’들이 현장에 참여하면서, 각자의 관점에서 모범으로 삼는 영화를 참고해 작품세계를 구상하는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인터넷 등이 발달해 정보의 송수신이 용이해져 전문가의 비평 언어가 널리 공유되었고, 특수 메이크업 효과와 프로덕션 디자인 등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도 (특히 호러나 필름 누아르와 같은 장르에서) 발전했다. 
 
   
2000년대 초 제작된 <장화, 홍련>(호러), <지구를 지켜라!>(SF)

개인적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성격이 1987년을 기점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경제 발전, 세계화, 정보통신기술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복합적으로 발현된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보다 넓은 계층에게까지 공유될 수 있었고,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영화’를 제작해 해외에 선보이고 싶다는 국내 영화계의 오랜 과제가 수행되는 데 추진력을 더했다. 여기에 불법 비디오의 유통으로 ‘영화 덕후’들의 감상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한편, 1990년대 시네필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평론은 학구적 색채를 띠기 시작해,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진동하는 영화 글쓰기가 가능해지는 특별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다.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떴음’이 분명해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정답은 없고, 나 역시 주관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아마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 <장화, 홍련>(김지운, 2003),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2003) 등이 개봉한 2003년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2003년에 한국영화에 열광한 이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관객이, 그 이후부터 등장한다. 준-불법 비디오 시장인 이른바 ‘그레이 마켓’이 융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는 비디오 유통 체인점이 잘 다루지 않는 블록버스터 등을 접할 수 있었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화제와 어느 정도는 연계된 유통망을 구축해놓기도 했다.

또한 DVD라는 매체가 출시되며 영화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 VHS는 매체 특성상 좋은 화질과 음질로 감상되기 어려웠지만, DVD는 ‘복원된’ 영상과 음성 소스를 수록할 수 있기에 같은 작품이더라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상 경험을 제공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과는 다르게) 한국영화 DVD에는 대부분 영어자막이 탑재되어있어 해외 시장에서 유통되기도 쉬웠다. 이러한 시류에 힘입어, ‘고상하지 않지만 매우 재미있고 폭력적인’ 일본 시대극들처럼 그간 그레이 마켓에서 주로 관심 받던 작품들의 대열에 한국영화가 합류하면서, 한국영화가 각지의 로컬 컬트영화 팬들로부터 각광 받는 길이 열린다. 이때 한국영화의 세계적 유통에 컬트영화 팬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체감하게 해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했던 비디오점 “Le Video”에 가니, 당시 내가 온라인에 게시했던 <올드보이> 리뷰가 가게의 전시창에 붙어있었다. 할리우드나 기타 영화 전문업계에서 생산한 평론보다, 실제 ‘덕후’가 남긴 리뷰를 통해 또 다른 ‘덕후’들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비디오 유통을 촉진하는 것이 이 가게의 전략이었던 것 아닐까? DVD 시장에서 출발한 작품의 흥행이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의 활동에 상당 부분 의지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악령의 밤 2>(마리오 바바, 1977), <서스페리아 1977>(다리오 아르젠토, 1977) 블루레이 (사진: Amazon)

사실, 역사적으로도 DVD와 블루레이 시장 자체가 대개 장르영화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북미 지역에서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값비싼 복원판 디스크 제작의 트렌드가 마리오 바바나 다리오 아르젠토와 같은 감독들의 컬트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북미 영화 팬들은 그간 극장의 개봉작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해외 장르영화들에 대한 접근성이 광학매체의 유통과 함께 눈에 띄게 높아진 데 열광했다. 그리고 영상 복원 기술은 고전 호러, SF, 필름 누아르 등의 장르영화 디스크의 소스가, 제작자들이 의도한 느낌에 가까운 영상으로 팬들에게 전해지는 데 기여했다. DVD, 블루레이라는 매체에 의해 새로운 영화문화가 조성되는 첫 단계가 바로 장르영화를 바탕으로 진척된 것이다. 이들 특유의 감성과 스펙터클은 북미 주류 사회의 ‘정치적 공정함’과 ‘고상한 취향’에 도전한다고 여겨져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팬들의 관심은 홍콩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 이어 한국영화로도 향했다.*주1 그러다가 2010년대 후반, 넷플릭스 등의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VOD 시장을 지배하면서 위의 그레이 마켓을 무대로 번영한 비디오 가게들, 즉 ‘대중문화 소매상’들의 활동은 쇠퇴했다.*주2 하지만 2017~2018년부터 벌써 넷플릭스에 등록된 한국어 콘텐츠의 양이 상당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아 여전히 여러 OTT 플랫폼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서구 장르영화를 닮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박찬욱과 봉준호의 작품들은 왜 북미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일까? 박찬욱 감독에 집중해 설명하자면, 그의 작품이 전 세계 장르영화의 계보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올드보이>는 <현기증>(알프레드 히치콕, 1959), <차이나타운>(로만 폴란스키, 1974), <강박관념>(브라이언 드 팔마, 1976) 등 서구 장르영화 걸작의 기조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금기시된 사랑, 공허한 허구에 대한 집착 등의 소재도 반복되지만, 무엇보다 ‘서스펜스’라는 요소의 활용이 돋보인다.

서스펜스(Suspense)는 ‘매달리다’라는 의미의 “Suspend”에서 비롯된 용어인 만큼, 영화에 쓰일 때는 떨어지기 직전의 존재가 무언가에 매달린, 즉 아직 불씨가 당겨지지 않은 감정이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응어리져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히치콕은 그 요소를 작품에 기막히게 배치하는 거장으로 불리고, 비슷한 경향이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서도 엿보인다. 이렇게 추락하기 직전에 매달려있는 인물을 볼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보다 복잡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박찬욱은 서스펜스를 통한 감정의 이 복합성을 이전 세대 장르영화 감독들로부터 멋지게 계승했다. 인물의 선과 악이 뚜렷한 평면적인 스릴러에 나타난 윤리적 지형을 벗어나, 관객이 왠지 모를 불편함을 감지하면서도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 감정을 느끼러 영화를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파업주동자>와 <올드보이> 속 추락 직전의 인물
(사진: (좌) "1000 Frames of Saboteur (1942) - frame 974", The Alfred Hitchcock Wiki / (우) "Oldboy", IMDb)

일례로 히치콕의 <파업주동자>(알프레드 히치콕, 1942)에서 악당 프라이가 추락사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추락 과정의 부감숏과 일그러진 얼굴의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은 악당의 파멸을 지켜보고자 하는 가학적 욕망과 동시에 추락하고 있는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발생하는 공포라는 두 가지 감정을 모두 체험한다. <올드보이>에서 수아(윤진서)의 추락사도 유사하다. 악당 이우진(유지태)의 시점에서 수아는 추락 직전의 상태로 비춰지고, 관객은 이우진이 악당임을 알면서도 누나의 추락 과정을 지켜보는 그의 죄책감을 공유하게 된다. 이는 인물이 뒤늦게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다룬다는 필름 누아르 장르의 특성과도 연결되는데, 박찬욱은 그만의 현대적 언어로 이를 훌륭하게 재현해낸다. 극중 진실의 탐구자(Investigator of the truth)로 상정된 오대수(최민식)가 자신의 믿음은 거짓이고 진실은 따로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윤리적 세계와 작품의 서사적 자기 완결성은 모두 괴멸해버린다. 예기치 못한 이 괴멸을 지켜본 관객은 복합적인 감정의 늪에 빠지지만, 그로써 영화에 더욱 젖어든다. <박쥐>(2009)에서 송강호가 창문으로 향해 비상하는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의 시점에 따라 인물의 움직임이 추락으로도, 비상으로도 보이도록 연출해, 관습적 인식의 작동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적 순간을 어김없이 직조해냈다고 볼 수 있다. 

<올드보이>를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장도리 액션씬’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면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지 궁금하다.
 

(관객)
“아프겠다”
“웃기다”
“너무 리얼하다”
“처절하다”
“주인공이 아무리 맞고 찔려도 쓰러지지 않자 악당들이 공포스러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맞다. 주인공의 멋진 모습이 부각되는 보통의 액션영화에서의 장면과는 확실히 다르다.*주3 데이비드 보드웰은 저서에서, 홍콩 무술영화의 매력은 ‘발레’처럼 ‘합이 맞는’ 액션이 설계된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씬’은 액션을 정교하게 설계하기를 거부하고,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함께 발생하지 못하리라고 판단되는 감정들이 육감적이고 정서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도록 놓아둔다. 맞고 때리는 사람의 피곤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육체적’ 액션이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싸움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인물들이 실존적 질문을 던졌을 법하다는 추측도 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이 현실성을 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의 미적 성취를 거둔 ‘멋있는’ 장면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대수를 연기한 최민식과 다른 배우들의 육체에서 발산되는 피로감에 관객이 공감하는 과정이 그 성취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의 육체가 작동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객이 관찰했기에 이런 공감이 가능해진다. 보통 예술영화에서는 장면이 시각적으로 정교해지는 데 기여하는 장치들을 일부러 노출해 영화의 작위성을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소격 효과를 체험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도리 액션씬’에서는 정반대이다. 액션의 기술과 구성 모두 허술하지만, 관객은 그들의 싸움에 집중하며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깊이 연루된다.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왜 이렇게 반응했는지’를 신기하게 느낄 만큼. 최소한의 장치로 특정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효율성의 시네마’를 지양하고, 감각적•감정적으로 다양한 반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촬영된 장면이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또 다른 작가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 가보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은 어떻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고 북미 영화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그의 소감에서 연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길 수 있게 해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미국에서 ‘봉준호’라는 작가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낮을 때였음에도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매번 그의 작품을 꼽아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특히 본인이 “학교에서 마티(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보며 공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등분해 나눠 가지고 싶을 만큼 함께 후보에 오른 영미권 출신 감독들(마틴 스코세이지, 샘 멘데스, 쿠엔틴 타란티노, 토드 필립스)도 존경한다고 밝혔다. 자신을 장르적 개성에 완성도를 더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계승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이 계보를 함께 이어나가고 있는 동료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읽힌다.

재치있게 언급된 <텍사스 전기톱 학살>(토비 후퍼, 1974)이라는 작품 역시, 뉴욕현대미술관에 역사상 가장 훌륭한 미국영화 중 한 작품으로 영구보존되어있고, 영화 매거진 Sight and Sound 선정 2012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250편 중 183위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일부 마니아층만 찾는 고전호러영화이자 장르영화라고 생각할 법한 작품도, 할리우드의 영화적 계보 상에서 영화사적 가치와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흐름을 따라 현재까지 활동을 지속하는 영미권 영화감독들과 동료 관계를 형성했고, 그 역시 그러한 계보의 연장선에서 ‘뉴 코리안 시네마’의 적자로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서구를 포함한 전 세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주류의 영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그만의 매력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특히 북미 관객이 열광하는) ‘덕후들의 장르’의 경향에 수렴해서, 즉 ‘좋아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서’가 아닐까?

과거의 한국사회가 천대한 문화가 지금은 당당히 한류의 주축이 된 것처럼, 걸작도 한때는 쓸모없고 천박한 영화로 치부되곤 했다. 소수에게만 환영 받는다고 해서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해 작품의 존재를 숨기지 말자. 이전에도 그랬듯이, 누군가(가령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는 계속 찾고 있을 그 작품을 영화 팬으로서 계속 지지하고 싶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불법 비디오 중심의 그레이 마켓이 크게 위축된 오늘날의 OTT 시대에는 말씀하신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답변)
넷플릭스를 보면, 전 세계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적 문법을 사용했는데도 여전히 대중의 관심 밖에 있는 작품들(예를 들어 동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서 제작된 호러영화들)이 너무 많다. 이들은 단순 B급 호러영화로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거나 높은 장르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OTT 플랫폼이 아니라면, 그리고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그 플랫폼에서 이들을 발견해내는 불특정 다수의 애호가들이 아니라면, 이런 작품들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동시대 영화 제작의 기술적 수준은 빠른 속도로 평준화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영화 제작과 감상이 (국가나 문화권 단위가 아니라) 특정 취향을 매개로 뭉친 애호가들(예를 들어, ‘오대수 그룹’과 같이!)에 의해 활성화되는 경향이 크게 두드러지리라고 예상한다.

이처럼 영화를 향한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의 열정은 OTT 시대에도 가려진 걸작들을 발견하는 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당분간은 OTT 산업이 그들의 활동을 무력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보다 먼 미래까지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질문2)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이 널리 인정받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저만의 기우일수도 있지만, 이렇게 미국 장르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이 향후 한국영화계에서 다시 등장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혹시 교수님께서 이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눈여겨보신 이가 있으신지, 혹은 유사한 인물이 더는 출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보시는지를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나도 그렇고, 많은 분들께서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은 1980~90년대 한국 현대사를 지나며 민주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영화학의 도입과 시네필 문화의 융성 등의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세대이다. 그래서 이후 세대의 감독들이 보여줄 작품의 형식과 내용도 그들의 작품에서와 같이 복합적일지에 대한 우려가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은 제기하고 싶다. 바로 한국영화 내 ‘작가주의’의 지속성에 대해서이다. 작품의 예술성을 좌우하는 주체는 감독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한국영화계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고, 연출과 제작 과정의 상당 부분은 감독 개인의 결정에 맡겨진다. 이러한 작가주의적 경향이 지속될 수 있을지가 조금 궁금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에 관한 지식이 편재하게 되면서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가 평준화된 오늘날, 오히려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다양한 집단(각기 다른 특징을 지닌 영화애호가 집단 등)이 영화 제작과 유통, 감상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영화를 다각도로 바라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주의의 점진적 소멸이 그리 부정적인 현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본 질문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소용돌이 속 한국사회의 형성을 목도한 세대 이후의 감독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최근 국내 장르영화의 문법이 독창적으로 발전하려는 신호가 보인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는 다른 종류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은 연상호 감독의 행보,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등의 작품은, 한국 영상 콘텐츠의 장르적 언어가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전망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
 
   
<지옥>(연상호, 2021)과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질문3)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 달리 할리우드의 계보 바깥에 위치하면서도 ‘한국적’ 특색을 선보임으로써 북미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감독 또는 작품이 존재할까?
 
(답변)
두 사람도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할리우드의 문법을 모사하지 않으면서 한국사회의 일면을 효과적으로 영화화한다. 할리우드마저도 이들의 연출 방식을 모방하는 현상을 보면, 둘의 작품세계가 지닌 독창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영화 한 편으로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주기는 어렵다. 문화에서 ‘고유’의 영역을 분리해낼 수는 없듯이, 한국문화는 곧 한국인들의 총체적인 삶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미처 분석하기 어려운 갖가지 요소들이 뒤섞여있고, 상호 모순적으로 보였던 요소들이 정체 불명의 통일성을 띤 채 놀랍게도 공존함이 드러나면서 한국문화의 위대한 성취가 엿보인다. 한국인들의 삶에서 녹아있는 이 혼잡한 뒤섞임과 공존을 어떻게 영화 한 편으로 압축해 선보일 수 있겠는가?

(질문4)
교수님께서는 영화인이 공유하는 공통 언어로서 ‘장르’를 인식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는데, 교수님께서 영화의 ‘장르’를 정의하시는 방법을 여쭤보고자 한다. 한편, VHS와 DVD가 영화에 미친 영향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던 것처럼, 영화의 텍스트는 매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트리밍’ 매체가 영화에 대해 지닌 영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혹시 가능하시다면, 교수님의 VHS 경험에 대해 더 듣고 싶다.
 
(답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나는 사실 주류영화도, 예술영화도 아닌 영화들을 ‘장르영화’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딱히 ‘장르’라는 용어의 정의를 전제하고 있지는 않으며, 이에 대한 관점은 애호가 또는 연구자별로 다양하다. 그런데 사실 장르는 예술의 종류와 관계없이 오래 전부터 적용되어온, 많은 이들이 익숙해져있는 개념이다(에드가 앨런 포가 집필한 대부분의 소설이 호러 또는 미스터리로 여겨지는 것처럼). 작품의 종류를 상업적 필요에 따라 분류한다거나 그 개념을 둘러싼 관습이 서서히 누적되는 과정을 추적해 개념의 정의에 접근하는 일은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스트리밍 시스템이 영화 텍스트에의 접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만약 그 반대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2023) 의 범세계적인 흥행이 설명될 수 없다. 스트리밍 맞춤형 콘텐츠만 환영 받는 환경이라면, 러닝타임 3시간 동안 인물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으로만 대부분 구성된 이 작품이 어떻게 인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극중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은 노트북이나 태블릿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 작품의 극장 상영의 가치가 충분하고 극장의 관객이 이 점을 공감했기에 가능한 흥행이었다. 이런 작품들의 인기가 스트리밍 시장에서 흥행하는 콘텐츠에 비해 밀릴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사실 VHS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매체에 대한 접근성은 아주 높기에 국외 작품일지라도 더빙판 등이 복사된 자료를 보며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DVD는 접근성에 더해 수록된 영상의 품질까지 담보해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광학 매체의 발전이 4K UHD 블루레이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여전히 누군가는 고품질 홈비디오를 찾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나 역시 <죠스>(스티븐 스필버그, 1975) 의 4K UHD 판본을 보면서, 1970년대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감상하며 받은 느낌이 그대로 재현됨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이렇게 감상자 개인에게 높은 수준의 화질과 음질 경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한 광학 매체 시장 역시 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아직까지도 1930~40년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영화들을 수록한 DVD가 무수히 많이 발매되고 있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성 영화감독 아이다 루피노의 작품 등). 스트리밍 시장에서 주목받기 어려운 이 같은 작품들은 계속 해서 홈비디오의 형태로 마니아들에게 찾아온다. 따라서 나는, 어릴 적 영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준 VHS라는 매체에게 감사하지만, 그립지는 않다. 그보다 뛰어난 영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홈비디오의 가능성이 이미 전 세계에 열려있으므로.

(질문4-1)
선생님께서 아직 버리시지 못한 VHS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물론 있다. 한국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의 <3인조>(1997). <달은…해가 꾸는 꿈>(1992)은 DVD로 발매되어 반갑게 구매했지만, <3인조> DVD는 아직 발매되지 않았다.

(질문5)
영자원 역시 한국고전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VOD 채널(유튜브, KMDb, 네이버TV)을 운영 중이고, 구독자 대부분은 해외 국가 출신이다. 본 채널에서의 서비스 품질 향상 방법을 고민하다가 기관이 직접 복원한 영상을 4K 해상도로 게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회수 증가 속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져, 광학 매체를 통해 대두된 ‘화질’의 중요성이 스트리밍 분야에서도 유효함을 깨달았다.  관련하여, 위에 말씀드린 영자원의 VOD 채널이 교수님께서 계신 미국 내 영화학자나 한국영화 팬들에게 얼마나 알려져있는지, 그들에게 본 채널이 주는 도움에 대해 체감하신 바가 있으신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장 김홍준)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중 4K 리마스터작 재생목록
 
(답변)
지금이라도 한국영화를 찾아보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에게 화질과 음질의 수준은 매우 중요하다. DVD라는 광학 매체가 처음 발매된 지 20여 년이 지났고, 이에 대한 시청각적 경험이 그만큼 많은 미국인들에 의해 학습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전 한국영화는 촬영 기술, 사회적 통념, 미학적 스타일 등의 측면에서 시대적 한계를 지녔더라도 대중에게 매력적인 작품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도 국내에서 고전영화는 물론 장르영화에 대해서도 밀도 높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점이 안타깝다. 기회만 있다면 이들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데 말이다. 앞선 질문에 답변한 내용에서처럼, 실체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한국의 ‘대표성’을 보여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고전영화는 물론이고 한국영화의 장르적 매력을 소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고전영화를 고해상도로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자원의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싶다.

(질문6)
오래 전부터 “koreanfilm.org”에 올리신 리뷰를 통해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저 자신도 여기에 글을 남기며 교수님과 인연이 닿았다. 당시 ‘한국영화’에 대해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신 계기가 있나? (영화번역가 달시 파켓)
 
(답변)
단순하다. 영화 팬으로서 멋있고,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는 한국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쓰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라서 좋아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영화 팬인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한국영화계가 갑자기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제작한 작품이더라도, 독특한 매력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 얼마든지 ‘덕질’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가 발표하는 작품들의 완성도에서는 충분히 희망이 보인다. 중소 규모의 제작사에서 만든 한국영화들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고보니 조금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나는 역사 연구자임에도 영화를 사회적 사상이나 이념의 반영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오히려 영화 연구자분들께서 그와 같은 ‘사상적-이념적’ 관점으로 연구하시는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코멘트)
비디오 리터러시 또는 시네마 리터러시라는 용어가 있듯이, 만약 ‘장르 리터러시’라는 용어도 성립 가능하다면 영화산업과 아카이브 모두에게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자원도 현재 같은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름 아카이브로서 장르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가 세계 또는 한국영화사의 어떠한 맥락과 닿아있는지를 관객에게 더욱 열심히 알려 대중의 장르 리터리시 신장에 기여하고 싶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맞다. 김기영 감독의 재발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르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지역에 관계 없이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 접근하고자 할 것이고, 이렇게 조성된 관문을 통해 관객의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한국고전영화의 가치도 더욱 전파되리라 기대한다.


***
주1.
물론 이 과정에서 아시아 장르영화가 과도한 폭력과 성적 묘사를 강조한 “익스트림 시네마(Extreme Cinema)”라는 프레임으로만 인식되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비판도 있다.

주2.
그러나 넷플릭스도 실상 그 기원을 따라가면 광학 매체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은 초반에 ‘연체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DVD 렌탈 서비스’를 표방했고, 방대한 양의 소장자료를 자랑하며 그 어디에서도 감상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비디오 및 디스크 대여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점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주3.
기술 발전에 힘입어 세련되게 촬영된 액션영화들에서도 <올드보이>의 영향을 발견할 수는 있다. 넷플릭스 <데어데블> 시리즈 중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인물들이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싸우도록 한 인상적인 복도 액션씬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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