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토월회와 이월화 무대 사실주의를 위한 도정과 여배우의 자리

by.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2024-12-05조회 622
배우 이월화(1904~1933,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배우의 표현수단인 몸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인 동시에 작품과 관객을 잇는 최초의 통로가 된다. 텍스트가 추상적인 문자로 쌓아올린 성채라면, 관객은 배우의 육체를 안내자 삼아 비로소 비밀스러운 문을 발견한다. 객석에 불이 꺼지면 관객들은 광막한 어둠을 불안스레 응시하지만 무대 위나 스크린 속에서 익숙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안도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텍스트의 내적 질서는 배우의 몸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얻고, 눈앞에 놓인 허구의 세계는 비로소 인간 사회를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배우는 몸을 통해서만 관객에게 현시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배우는 필연적으로 공공의 시선 앞에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출이란 배우라면 응당 짊어져야 할 숙명이겠지만 문제는 그 시선이 배우의 몸을 대상화하여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더군다나 전근대적 도덕관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훨씬 더 가혹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여배우들은 종종 화류계 여성들과 동일시되곤 했으니 이런 환경에서 여배우가 쉽게 출현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배우는 끝내 근대극장의 당당한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여배우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설움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테니 각도를 조금 달리해서 질문해보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배우의 역할은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일까? 또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어떻게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의 지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사실 여성 연행자들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예기(藝妓)들을 양성하기 위한 전통적 교육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들 중 몇몇은 협률사, 장안사, 연흥사 등의 초창기 극장들이나 ‘구극’을 주로 제공하던 광무대에서 전문 소리꾼으로 활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배우는 기술을 통해 여성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존재감 그 자체를 전시하던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별화되었다. 즉, 여배우는 생물학적 성의 동일성에 힘입어 기술로 모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 가능했다.

여배우의 등장을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재현의 사실성을 둘러싼 당대의 인식체계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것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특정한 시기를 거쳐 비로소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1910년대까지 배우와 배역의 성적 불일치는 그리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유래하여 1910년대 극장가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한 신파극은 남성 배우의 여장 연기를 일반적인 관습으로 채택했다. 이른바 ‘여형배우(おんながた)’는 여성의 무대 출연이 불허되었던 에도 막부시대 이래 가부키의 관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여형배우’는 형식미학을 중시하는 가부키의 특징과 맞물려 미학적 경지로서 숭앙되기도 했다. 남성 배우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보이는 재현의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예의 궁극적 도달점이라 여겨졌다. 

한국의 신파극단들도 이러한 관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파극단들은 여성 역할을 맡아 일세를 풍미했던 여형배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수철은 <장한몽>의 여주인공 심순애 역할을 통해 당대의 대표적 여형배우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사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수철의 사진을 보면 그의 외형은 여성스럽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비록 가발과 분장으로 가려놓긴 했지만 겉보기에도 그의 체격은 굉장히 건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는 여성을 흉내낸 그의 연기가 당대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그럴싸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고수철 (사진: 《조광》, 1935. 12.)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당대의 관객들은 극의 등장인물을 통해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기보다 그 인물이 표상하는 인간 유형이나 그들의 갈등을 통해 제의적으로 모방된 도덕체계를 떠올릴 때가 많았다. 한국의 전통연희인 탈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탈 속에 숨겨진 배우의 진짜 얼굴보다는 부네나 각시탈로 표상된 캐릭터의 고유한 성격에 관심을 기울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극은 사유하는 존재로서 내면을 가진 인간의 형상을 그려내고자 했고, 이때 표정이나 동작은 이를 외화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이제 배우는 표현하기에 앞서 존재해야 하는 이로 지목된 것이다.

이른바 이성장(異性裝) 연기란, 남성들의 여장 연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성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 시작된 소녀가극은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도 ‘배구자악극단’을 비롯한 소녀가극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또한 해방 후에는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창극의 형태가 유행하여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정년이>(정지인, 2024)가 소재로 삼았던 ‘여성국극’이 그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이 특수한 흥행가치를 만들어내며 인기를 끌었던 것과 달리 신극운동이 본격화된 1920년대에 들어서며 ‘여형배우’는 아마추어의 영역에서만 통용될 법한 결여태라 인식되기 시작했다.

1921년에 전 조선을 순회하며 공연활동을 펼쳤던 ‘극예술협회’는 식민지 조선 신극운동의 효시를 쏘아올린 집단이었다. 재래의 신파극단과 차별화되기 원했던 그들은 무대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여형배우’라는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인 <최후의 악수>의 여주인공 ‘화봉’ 역할은 마해송의 몫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것은 공연 준비가 촉박한 상황에서 여배우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반면, 2년 뒤인 1923년에 창립공연을 가진 토월회는 여배우의 출연이 곧 공연의 성패와 직결된 요소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배면에는 토월회가 여타 학생 소인극단들과 쉽게 동일시되기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다. 토월회 역시 극예술협회와 마찬가지로 동경 유학생들의 모임이었지만, 극예술협회가 재일본 노동자와 고학생 단체인 ‘동우회’ 후원을 목표로 순회극단을 조직했던 것과 달리, 토월회는 공연 그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자신들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토월회 공연 당시 촬영 추정 사진
 

일본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 중에서 예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있는 사람들이 조직한 토월회에서는
이번 여름 휴식을 이용하여 경성에 돌아와 임시 사무소를 낙원동 149번지에 두고 연극회와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겠다는데,
연극은 금 6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유-젠․피롯트의 『기갈』과 안톤 체호프의 『곰』과
사람의 영혼까지 웃기게 하고야 만족하는 희극작가 버나드 쇼 씨의 희극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거짓말을 하엿나』와
박승희 씨의 『길식』 등을 올릴 터인데 전부 한 막거리로 의복과 배경은 다 동경에서 마치어 가지고 나왔다 하며...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202쪽.
“토월회 제일회의 연극공연회-동경 류학생 속의 유지자로 조직된”, 《동아일보》, 1923. 6. 13.


기존의 학생극단들은 연극을 매개로 삼아 사회사업에 소요되는 기금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월회의 경우, 별도의 공연 취지 대신 조선의 문화 향상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목표를 내세웠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토월회의 공연에서는 으레 학생 순회연극단의 공연에 수반되었던 사회자의 행사 취지 소개나 개막 선언과 같은 순서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동우회순회연극단이 《동아일보》의 공식적 후원을 얻어 전 조선을 대상으로 한 순회연극을 기획할 수 있었던 반면, 토월회는 자발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토월회는 그들의 활동에 호의를 보이던 일본인에게 600원의 자금을 얻어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일개 학생단체에 불과했던 토월회가 거금을 융자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심인물인 박승희의 아버지가 최초의 주미공사 박정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토월회의 동인들 중에는 박승희와 같은 유력가의 자제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의 존재는 언론이 기존의 학생극단에 부여했던 표상, 즉 ‘고학생 단체’로서의 성격을 희석시킨 요인이었다.*주1 그렇기에 토월회는 동경 유학생 중 예술에 뜻을 둔 ‘유지자’들의 단체로 소개되었을 따름이었다. 즉, 토월회에게 있어 ‘예술’이라는 레토릭은 그들의 공연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했던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다.

예술이라는 막연한 지향점은 ‘무대 사실주의의 확립’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되었으며, 토월회가 무대장치에 역점을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다행히 토월회는 동경미술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어선 무대장치를 갖출 수 있었다. 1923년 8월에는 부속기관인 ‘토월미술연구회’가 결성되어 무대장치를 전담했는데, 안석주, 윤상열, 이승만 등 다수 화가들의 열성적인 참여는 토월회가 보다 정교한 무대장치를 구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 결과 토월회의 무대장치는 일본 신극운동의 본산이었던 ‘축지소극장’의 수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라 평가되기도 했다.

토월회가 여배우를 섭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도 ‘무대 사실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촉박한 연습 기간을 고려할 때, 토월회가 선정한 네 편의 작품에서 여성 등장인물을 모두 여배우로 채우기 위해서는 복수의 여배우가 필요했다. 이서구와 박승희는 교대로 귀국하여 여배우를 찾아 헤맸는데, 우여곡절 끝에 진명여고 학생이었던 이정수와 이혼 후 가정에 머물던 이혜경을 섭외할 수 있었다. 다만, 배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들만으로 공연을 진행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기에, 신극좌와 민중극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던 이월화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다. 
 

동경에서 연극을 연구하던 어린이들의 모임이 곧 토월회이올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모국 한 끝에 극에 대한 새 빛을 찾으라고 그 첫소리를 금 29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외치려 한 것이올시다.
각본은 구미의 문호의 작품을 중심으로 차림은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가 오직 열성 하나로만 모든 것과 싸워 앞길을 개척하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과 같지 못한 우리의 일이오라, 뜻밖에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돌발하여
저희는 도저희 저희의 양심을 거스르지 못하겠으므로 다시 7월 4일로 공연날을 두 번 연기하였사오니 깊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223쪽.
“토월회 공연 연기”, 《동아일보》, 1923. 6. 29.


위의 인용문은 예정된 창립 공연을 앞두고 토월회가 신문에 게재했던 광고문이다. 토월회는 구미 문호의 작품을 각본으로 선정했음은 물론, 무대 배경을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 만들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변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고문의 실제 목적은 공연 일정을 미루게 된 사정을 밝히면서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는 데 있었다.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서 부득불 공연일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박승희의 회고에 따르면 문제를 일으킨 여배우는 이월화였던 것으로 보인다.*주2 여배우 중 가장 뒤늦게 합류했던 이월화는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에 어머니가 연극 출연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출연을 고사한 바 있다. 이월화의 출연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토월회는 공연일정을 연기하기로 하는데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토월회는 이미 창립 공연 일정과 장소를 한 차례 변경한 전력도 있었다.*주3 그렇지만 토월회는 “도저히 저희의 양심을 거사리지 못하겟슴으로” 연기를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양해를 구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그만큼 토월회가 여배우의 존재를 중시했다는 점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김기진을 비롯한 동인들은 직접 이월화의 집에 찾아가 그의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겨우 출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으며, 다행히 창립공연은 애초의 캐스팅대로 진행되었다. 

안타깝게도 토월회의 창립공연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큰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박승희가 회고했듯, 토월회 공연은 “은그릇에 담아 놓은 설렁탕”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훌륭한 무대장치와는 대조적으로 아마추어의 티를 벗지 못한 연기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토월회 동인들의 애초 계획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한차례 공연만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곧바로 2회 공연 준비에 돌입한다. 동경대진재 이후 급격히 흉흉해진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일본에 돌아갈 수 없었던 상황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토월회가 절치부심하여 준비한 2회 공연은 연일 만원관객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창립공연의 레퍼토리가 네 편의 단막극으로만 구성되어 단조로웠고, 대중들에게 난해한 내용일 수 있음을 파악한 그들은 보다 대중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자 했으며, <알트 하이델베르히>와 <부활>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선정했다. 그리고 두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이월화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사실 이월화를 캐스팅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마찰도 있었다. 이미 기존의 신파극단들도 제한적이나마 여배우를 기용하기 시작했으니 여배우를 섭외하기 위해서는 기성극단에 문의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월회 동인들은 “신파에 물들지 않은 무경험자”를 찾고자 했기에, 신파극단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던 배우들을 선호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월화의 영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월화는 토월회에 합류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판단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영화의 영향력이 가로놓여 있다. 이화진이 지적한 것처럼 당대의 관객들은 같은 시기, 심지어 같은 극장에서 서양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주4 카메라의 기계적 재현성에 기반한 영화가 이미지의 리얼리즘을 태생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여형배우는 영화에서 쉽게 용인될 수 없는 관습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월화는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였던 <월하의 맹서>(윤백남, 1923)의 주연배우이기도 했다. 토월회 공연이 있기 불과 몇 달 전에 공개된 이 영화를 통해 이월화는 실제 여성에 의해 재현된 여성성의 표본을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바 있다. 어쩌면 토월회가 이월화를 통해 획득하고 싶었던 것은 여전히 신파극의 태를 벗지 못한 그의 무대 경험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보증된 이미지의 사실성 그 자체였다고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분명 토월회의 공연은 여배우의 기용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보편적 상식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점차 영화 관람에 친숙해진 당대의 관객에게 배역과 배우 성별의 불일치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토월회가 그러한 흐름을 민감하게 읽어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식민지기 극장은 연극과 영화가 공존했던 공간이었고, 이곳에서 형성된 관객들의 취향은 생산자들의 기획과 긴밀한 피드백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극장 속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나간다.

 
<지나가의 비밀, 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 중 이월화(우)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
주1.
김기진, 김복진 형제의 아버지는 충북 영동의 군수였으며, 이서구는 안양 부호의 자제였다고 알려져 있다.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2.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3.
토월회의 당초 계획은 “륙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공연하려는 것이었으나, 공연 직전에 “예뎡을 번경하야 오는 이십구일부터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닷세 동안을 흥행”하는 것으로 변경을 고지한 바 있다. (“토월회 공연 연기-이십구일부터 개시”, 《동아일보》, 1923. 6. 28.)

주4.
이화진, 「여배우의 등장 - 근대 극장의 신체와 섹슈얼리티」, 『여성문학연구』 28, 한국여성문학학회, 2012.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