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대한극장을 기억하다

by.공영민(영화사 연구자) 2024-09-30조회 975


대한극장이 영화 상영관으로서는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아쉬움 가득한 회고가 쏟아진다. 과거의 화려했던 극장 건물이 허물어지고 고층 빌딩으로 변신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안녕을 고하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20세기 대한극장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1958년 4월 4일과 1998년 4월 4일

1998년 4월 4일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이 정식 개관하기 전까지 극장의 규모나 흥행수입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곳이 서울 중구 충무로의 대한극장이었다. 우연인지 한국 극장역사의 필연인지, 대한극장은 최초의 멀티플렉스 개관으로부터 40년 전인 1958년 4월 4일 개관했다. 개관작은 1994년 리메이크해 국내에서도 사랑받았던 <러브 어페어(Love Affair)>(글렌 고든 카론, 1994)의 원작인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레오 맥캐리, 1958)이었다. 극장 측은 대지 660평, 연건평 1,432평의 무창(無窓) 5층 건물에 냉난방 장치와 고급 좌석, 최신식 상영 설비 등을 갖춰 외국 극장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건전한 오락과 영화문화를 위하여 많은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라는 위풍당당한 출정 소감을 밝혔다.*주1

하지만 1년도 채 못돼 운영난을 겪게 되면서 1959년 2월 극장의 운영권은 영화 수입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던 세기상사로 넘어갔다. 세기상사는 폴 뉴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상처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로버트 와이즈, 1956)을 ‘신발족(新發足)’이라는 야심찬 문구를 곁들여 광고하며 대한극장 인수를 알렸다. 한편으로는 입장객에게 피아노와 고급상품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마련하고,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내한공연을 올리는 등 새롭게 출발하는 대한극장의 다양한 면모를 알리기도 했다.
 
   
(좌) <잊지 못할 사랑> 전단   (우) <상처뿐인 영광> 전단


대형극장의 위용을 갖추다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는 국도, 명보, 단성사 등을 잇는 후발주자의 느낌이 강했던 대한극장이 본격적으로 대형극장, 흥행극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국내 최초로 70밀리 초대형 영화를 상영하면서부터였다. 1961년 9월 2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남태평양(South Pacific)>(조슈아 로간, 1958)은 영화의 내용과 평가를 넘어 영화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케 하고, 당해 연예계의 주요 뉴스에 꼽히는 등 영화 매체의 큰 변화로서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남태평양> 이후 대한극장이 국내 제일의 대형극장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한 영화는 <벤허(Ben-Hur)>(윌리엄 와일러, 1959)였다. <벤허>는 1962년 2월 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해 10월 8일까지 무려 8개월 동안 장기 상영했고, 10월 9일부터는 세기상사가 소유한 또 다른 개봉관인 세기극장으로 이동해 상영을 이어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의 기록적 흥행과 초대형 영화관람의 경험은 여러 차례에 걸쳐 <벤허>가 재상영될 때마다,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대중을 극장으로 이끄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벤허>가 대한극장에 관한 회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이다. 

   
(좌) <벤허> 국내 포스터   (우) 1986년 대한극장의 모습
 
<벤허>와 더불어 <오클라호마(Oklahoma!)>(프레드 진네만, 1955), <캉캉(Can-Can)>(월터 랭, 1960), <왕중왕(King of Kings)>(니콜라스 레이, 1961) 등 70밀리 영화들의 연이은 상영은 대한극장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대형 스크린과 좌석 수 2천이라는 규모, 그 위용에 걸맞은 초대형 영화, 그리고 극장 앞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의 모습을 삽입한 광고는 1990년대까지 대한극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대형극장으로서의 위용과 이미지는 1990년대까지 단관극장으로 버티는 힘이 되었다. 1990년대 말 대한극장의 상영⋅배급을 담당했던 임철호의 구술처럼 영화 한 편이 “터졌다 하면 하루에 만 명인데, 열흘 만에 십만 명이 되”*주2는 규모를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화하며 극장 지형과 극장 문화 또한 변화를 겪었지만, 단관극장의 매력과 흥행의 묘미가 남아있었던 20세기 말 충무로의 풍경에 대한극장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70밀리 대형영화와 마무리한 단관극장의 여정

멀티플렉스의 성공적인 안착과 함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또한 마무리에 들어가면서 들고 온 프로그램들은 역시나 70밀리 초대형 영화들이었다. 또다시 재탕이라는 소리도 들었겠지만, 대한극장다운 프로그램 선정이었다. 1998년과 1999년 상영한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데이빗 린, 1962),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데이빗 린, 1966) 등은 여전히 단관극장과 초대형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호응을 얻었다. 국내에서 단관극장의 마무리가 어땠는지를 둘러보면 비교적 아름다운 행보였다고 할 수 있으려나.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대한극장도 멀티플렉스로 전환하면서 충무로의 풍경 또한 변했다. 그동안 충무로와 종로, 을지로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극장들을 계속해서 목격했다. 사라진 극장들과 20세기의 대한극장을 기억하면서 꽤 오래전 광화문 네거리의 동화면세점을 국제극장이라 지칭하시던 택시 기사님이 불현듯 떠올랐다. 구술채록을 하면서 대한극장에서 원로영화인을 뵐 일이 많았는데, 그들과 나는 항상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대한극장에서 만났지만, 그 기사님처럼 우리는 늘 20세기의 대한극장을 떠올리며 약속을 정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 본다. 어쩌면 나는 대한극장의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상영 전 대기할 변변한 장소도 없어 극장 밖 거리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 순서를 기다리던 20세기 후반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천 명이 함께 <미저리(MISERY)>(롭 라이너, 1990)의 공포를 느끼고, <라밤바(LA BAMBA)>(루이스 발데스, 1987)의 OST를 소리 없이 따라부르던 그 시절로 말이다.
 


***
주1.
“새영화-잊지 못할 사랑”, 《경향신문》, 1958. 4. 5., 4면.

주2.
채록연구 공영민, 「임철호」, 『202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90년대 수입외화의 변화 3』, 한국영상자료원, 2020, 153쪽.



공영민(영화사 연구자) l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인 구술사의 채록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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