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1980년대 초반의 서울은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1천 달러를 넘어서면서 적어도 보릿고개는 면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세계도시’의 말석에 자리하게 된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다. 1974년 최초의 지하철 개통으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2, 3, 4호선이 거의 동 시기에 착공되었으며, 1979년 800만 명을 돌파한 서울의 인구는 단 4년 만에 다시 100만 명이 증가하는 등, 1980년대 초반의 서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과 팽창을 거듭하는 도시였다. 이 시기에 형성된 서울의 도시구조, 다양한 건축과 교통, 토목 인프라 시설은 2020년대의 서울에도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의 팽창을 지탱한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었다.
1981년에 개봉한
김수용 감독(1929-2023)의 <
도시로 간 처녀>는 바로 이 시기, 1981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실존하는 미아운수라는 시내버스 회사를 배경으로, 지방에서 상경한 버스 여차장(안내양)과 버스 기사, 그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당대 노동자들의 희로애락을 그려낸 이 작품은, 영화진흥공사가 선정한 우수 영화로 대종상 작품상 후보에까지 오르는 등 당대에 이미 가치를 인정받은 영화였다. 한편으로는, 첫 개봉 당시 운수업 종사자의 실상을 왜곡했다는 이유 등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부터 상영 중지 요청을 받고 일단 극장에서 내려진 후, 문제 장면의 삭제와 재촬영 등을 통해 재개봉이 이뤄졌다는 특이한 일화를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개봉으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를 둘러싸고 다양한 평이 존재하지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당시로서는 시의적절하고, 제법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다는 총평에는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서울 시내의 안내양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답게, <도시로 간 처녀>의 카메라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버스의 움직임을 쫓아서 1981년 상반기의 서울 구석구석을 담아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안내양들이지만, 그들의 일터이자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1981년의 서울 또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미 1960년대부터 서울의 모습은 총천연색 컬러로 영화 속에 담기기 시작했으나, 1981년이라는 시점은 현재의 서울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 이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 여전히 또렷한 기억을 가지고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로 간 처녀> 속 서울은 ‘가까우면서도 살짝은 멀게 느껴지는’ 과거의 서울과 현재의 서울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더욱 깊이 들여다볼 가치를 지닌다.
청량리역 구 역사
영화는 주인공인 문희(
유지인)가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1분경에 등장하는 청량리역의 모습과 지금의 청량리역 주변을 비교해 보면 과연 같은 역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영화가 촬영되던 시기엔 영동선, 중앙선의 열차가 반드시 청량리역에서 시종착을 했지만, 지금은 많은 열차가 서울역까지 연장 운행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청량리역이 가지는 의미를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지방에서 출발한 열차가 서울역까지 직통 운행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이가 청량리역 광장에 내렸을 때의 느끼던 두려움과 낯섦은(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과거만큼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 장충단 입구 교차로의 시내버스 (하) 남대문 부근의 시내버스
2분 40초경에서 3분에 걸쳐서, 카메라는 장충단 입구와 남대문 부근의 버스 행렬을 훑는다. 지금도 이 일대는 버스로 넘쳐나기는 하지만, 지금보다도 버스의 대중교통 분담률이 높았던 시대답게, 도로를 빼곡히 메우는 버스의 행렬은 가히 장관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스카라극장의 내부. 특유의 둥근 파사드가 눈에 띈다.
19분경, 영옥(
이영옥)은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바람을 맞고 돌발적으로 극장 구경에 나선다. 이 장면이 촬영된 극장은 실존하던
스카라극장(1935년 준공, 2005년 철거)으로, 특유의 둥근 전면 파사드가 인상적인 근대건축이었다. 이 무렵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는 당연히 익숙한 공간일 테지만, 이 시기를 살아보지 않았던(특히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에게, 총천연색으로 담긴 스카라극장 내부의 모습은 정말로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 시청 방면에서 바라본 서대문 고가차도의 시점부 (하) 지하철 공사 바리케이드
36분경에는 서대문 고가차도를 미끄러지듯 내려온 버스의 주변에 서울시의 공식 휘장과 ‘지하철’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리케이드가 화면에 잡힌다. 이 일대(지금의 아현역-충정로역 사이)가 1980년부터 시작된 지하철 2호선 공사 현장이었음을 드러내는 의도하지 않은 미장센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여전히 시내버스는 서울시 대중교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일부 구간만이 운행되던 40년 전에는 아침 출퇴근길에 있어서 시내버스의 존재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살포시 등장하는 지하철 공사 바리케이드는, 시내버스의 절대적인 존재감이 점차 옅어지는 과도기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성수대교
49분에서 50분에 걸쳐서, 문희와 광석(
김만)이 조각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은 지금의 강변(뚝섬한강공원 일대)으로, 한강 건너편의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성수대교가 배경으로 잡힌다. 이 무렵 압구정현대아파트는 이미 준공되어 입주가 완료된 때였지만, 한강종합개발사업(1983년 착공)이 이뤄지기 전 무언가 삭막한 한강변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장면에 담긴 푸른 빛깔의 성수대교는 영화 촬영으로부터 불과 13년이 지난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일으키면서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량으로 거듭났다.
(상) 고속터미널 청사와 아치 (하) 고속터미널 아치의 2011년 모습 (필자 촬영 및 제공)
66분부터 69분에 걸쳐서, 문희가 원양어선을 타고자 하는 광석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1981년 10월의 전면 개업을 코앞에 둔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하 고속터미널)의 웅장한 모습이 곳곳에 담겨있다. 특히 69분 언저리에서, 광주고속 소속의 벤츠 고속버스가 거대한 고속터미널의 청사를 배경으로 옛 랜드마크였던 거대한 출입구 아치를 통과하는 모습은, 당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던 이들에게 서울 입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고속터미널의 아치는 이후 터미널을 본뜬 구조물로 바뀌었고, 2011년 말 2012년 초 사이에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주변의 미개발지
영화의 말미, 86분에서 88분에 걸쳐서 카메라는 다시 압구정현대아파트를 찾아가 그 옆의 빈곤층 거주지를 훑는다. 1980~81년 무렵만 해도 강남 일대는 토지구획정리만 진행되었을 뿐 주택이 들어서지 않은 땅이 지천에 존재했으며, 이들 지역에는 개발 이전부터 살아온 원주민 혹은 구 도심에서 떠밀려 온 저소득층이 곳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난한 가정의 실상을 담아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였을까, 카메라는 시종일관 판잣집을 겨우 면한 가옥과 뒷배경의 산뜻한 압구정현대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아파트 공사장을 원경으로 잡으면서 대비를 시도한다.
이렇듯 <도시로 간 처녀>는 경관과 건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서울 곳곳의 경관을 비춰주면서 빠져들도록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에 익은 곳이 등장할 때, 기뻐하지 않을 관객(특히 서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40년 전 노동자의 일상과 다면적인 서울의 모습을 미디어의 발달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총천연색으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낀다.
참고문헌
송아름, “
두번의 검열과 <도시로 간 처녀>(2) : 어떻게 버스안내양들의 고난이 감추어졌는가?(1970년대)”,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18. 4. 16.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