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FA 특강노트]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어떻게 볼 것인가? CSU 롱비치 영화과 정승훈

by.신재영(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2024-07-31조회 2,822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로 만나보세요.


 
정승훈 교수는 영화의 매체적 특징과 더불어 작품에 영향을 미친 사회 구조나 철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왔다.
최근에는 세계화 시대에 발생하는 영화적 경향을 생명정치와 윤리, 철학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글로벌 시네마’ 이론을 구체화하고 있다.
저서로는 Cinematic Interfaces: Film Theory after New Media(2013),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2023)가 있고,
The Global Auteur: The Politics of Authorship in 21st Century Cinema(2016),
The Mind-Game Film: Distributed Agency, Time Travel, and Productive Pathology(2021)를 공동 편집했으며,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 내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2019)”를 객원 편집했다.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와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에서 강의한 후,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 영화과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가 문화가 된 시기, 평론가로서의 시작

1980~90년대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 그리고 주한미군방송(AFKN)과 같은 TV 매체에서 방영된 해외 극영화를 통해 영화에 친근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의 등장인물 레이첼(숀 영)이 황혼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이미지’로만 관객을 매료시키는 영화의 힘을 처음 실감했으며,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에 대한 할리우드식 리메이크작 <브레드레스>(짐 맥브라이드, 1983)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제시(리차드 기어)가 경찰에게 포위당한 채 춤을 추는 장면 역시, 서사의 개입 없이 인물의 움직임만으로 작품에 집중하는 체험을 하게 해줬다. 이렇게 영화 속 이미지의 고유한 특성을 지각하면서, 스스로 주목한 작품 목록을 짧게나마 작성해보며 영화에 가까워졌다.

1990년대에 진입하면,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발견하려는 의지에서 발원한 국내 시네필 문화가 본격화된다. 월간지 《로드쇼》의 ‘도시에’란에 김홍준 감독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실었던 글을 엮은 책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1)이 고등학교 시절 발표되었다. 영화사에 대한 개괄부터 할리우드·홍콩·유럽 등지의 영화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면서 세계 영화의 면면을 흥미롭게 학습했다. 동시에 이 책에 포함되어있던 ‘영화사상 걸작선(1895년부터 1991년 사이 발표된 고전영화 91선),’ ‘우리세대의 걸작(1980년대 세계영화 100선)’과 같은 목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화 감상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특히 ‘우리세대의 걸작’ 100선에 한국영화 몇 편이 포함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이자 한국 영화학도 또는 영화인로서의 필자(김홍준 감독)가 아직은 국제무대에서 발견되지 못한 한국영화의 가치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한 대목을 읽으며, 세계에서 한국영화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좌2) <블레이드 러너>, <브레드레스> 중 (사진: "Sean Young", IMDb / "Breathless", IMDb)
(우1)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때마침 한국영화가 산업적 측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씨네21》과 《키노》 등의 영화 전문지들이 창간되었고, 1년여가 지난 후에 두 매체 모두 영화평론상 공모로 ‘평론가’를 배출하기 시작한다. 앞에 이야기한 계기들을 거치며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비평’ 분야 전반에도 흥미를 느꼈던 나에게 영화평론가라는 진로는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며 배운 문학 이론을 영화비평에 적용하기를 즐기며 영화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확립하고 있던 터라, 이를 널리 공유하는 기회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2003년에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공모 당시 이론비평을 통해 내가 다루고자 했던 내용이자, 한국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해준 주제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작가’로서의 감독이 등장했음을 알리며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 이창동홍상수 작품 간 비교이다. 

이들이 활동하기 직전인 1980년~90년대 중반, 사회비판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견지한 젊은 영화로서 박광수장선우 등이 선보인 ‘코리안 뉴웨이브’가 주목받는다. 하지만 1995~96년 즈음에 관심의 초점은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감독들의 데뷔로 옮겨간다. 이전 세대의 연장선을 밟는 한편 그보다 한층 더 높은 미학적 차원을 달성한 그들의 데뷔작은 한국영화의 질적 전환을 주도하며 많은 평론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했다. 그 전환의 과정을 들여다보자면, 이 시기의 감독들은 과거사 중심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동시대 공간을 탐구하려는 의지를 작품에 투영했다. 특히 이창동과 홍상수는 당시 서울 변두리의 리얼리티를 작품 속 ‘공간’에 내재된 의미(혹은 무의미)나 각자의 재현의 체계(혹은 비체계)에 따라 제시했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집’‘길’이라는 공간 개념을 중심으로 의미론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한편, 리얼리티 재현 과정에서 각자가 추구한 미학과 스타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창동이 유기적으로 지은 ‘집’, 홍상수가 소요하는 ‘길’

이창동의 작품에서는 현대인이 돌아가야 할 원형적 공간으로 이해되는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모두가 떠나온 이곳은 그들이 다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이자 ‘탈시간적 유토피아’가 되지만,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상실된 공간이다. <초록 물고기>(1997)의 주인공 막동(한석규)의 가족은 현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진다. 막동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원형적 욕망을 지니게 되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같은 맥락으로 <박하사탕>(1999)의 유명한 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에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대상이 되는 특정 시간은, 순정에 대한 주인공 영호(설경구)의 기억을 담은 채 이제는 잃어버린 집과 같은 시공간적 향수를 자아낸다. <오아시스>(2002)에서는 종두(설경구)와 공주(문소리)가 꽉 막힌 청계고가도로에서 갑자기 공주의 집으로 이동하는 판타지적 순간이 연출되는데, 제목과 같이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이자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음이 여기서 나타난다. 이렇게 이창동은 갑자기 찾아온 현대사회가 개인을 폭력과 속도전에 연루시켰고, 이전에 간직했던 꿈과 순수, 사랑은 파괴해버렸음을 부각한다. 거스를 수 없는 변화와 상실 속에서, 잃어버린 ‘집’을 되찾고 싶다는 무력한 개인의 욕망이 자라날 뿐이다.
 
   
(좌) <초록 물고기>, <오아시스>, <박하사탕>의 '집'에 관한 설명   (우) <오아시스> 중 공주의 집에서 일어난 판타지적 순간

반면, 위와 같은 특징을 홍상수의 작품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다. 홍상수가 만든 인물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곳을 찾으려는 욕망이 없고, 그들이 잠시 머물거나 지나치는 모든 공간은 정착의 터전이 될 수 없는 ‘길’의 변주이다. ‘장소(place)’가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서 누군가의 정체성이 담지 되게끔 하는 근거지를 의미한다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텔, 술집, 식당, 정류장, 길거리 등은 이러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비장소(non-place)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은 이중 어느 한 곳에 머물더라도 곧 다시 떠나 소요하면서 또 다른 비장소로의 여행을 계속한다. 일생의 한 순간을 떼어다 놓은 듯해 시작과 끝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 자체이다. 인물이 향하거나 머무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획득하지 않는 그의 공간은 한 마디로 ‘탈근대적 아토피아(atopia)’와 같다.
 
   
(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중 여관   (우) <강원도의 힘> 중 기차역

이어서 두 감독의 작품 전반에서 리얼리티가 재현되는 방식을 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창동은 통합·정주의 아폴론적 편집증에 기반한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리얼리즘을, 홍상수는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에서 비롯된 총체성 해체의 리얼리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주1 이창동은 인물, 대사, 행동, 배경 등 작품 속 기호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호들을 활용한 미장센을 롱테이크 마스터숏으로 노출시키며 관객이 이를 역사적 또는 의미론적 차원으로 독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때 발견된 의미는 화면에서 그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기호와 결합하고, 이러한 은유가 반복되면서 기호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의미의 집’을 건축하게 된다. 이렇게 작품 곳곳에 녹아든 세부적 의미가 결합해 상위 의미 체계로 통합되는 리얼리즘을 추구한 이창동의 재현 방식은 아폴론적 편집증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달리 홍상수의 롱숏에서는 특정한 의미가 독해되지 않고, 내면이 표백된 일상적 표층 현실만이 채집되곤 한다.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행위와 몸짓, 습관, 말들이 그의 여행 여정에 흩뿌려져 장면 곳곳에서 출몰하는 광경을, 관객은 그저 관찰할 수밖에 없다. 기호들이 ‘의미의 집’을 이탈해 일상의 순간들을 따라 ‘길 가기’만을 지속하며 총체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정보를 주지 않는 화면에서 관객은 가시적·비가시적 세계, 그리고 전지적·관찰자적 시점 간 구분이 무용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홍상수의 리얼리티는 이창동과 달리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과 닮아 있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기호들이 의미와의 결합 없이 인물의 여정을 따라 자유롭게 유희하도록 놓아두기 때문이다. 두 감독의 미학이 이러한 이론과 완벽히 일치한다기보다, 극단적 위치에 있는 두 개념을 빌려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좌) <초록 물고기> 중. 막동의 집, 도로, 아파트는 차례로 전근대, 근대화 및 그 산물을 의미한다.
(우) <오!수정> 중. 마스터숏 없이 반복되는 술자리 장면과 일상적으로 오가는 말들.

논의를 전개하다보니, 다른 한국영화 감독들의 작품 세계 역시 위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시점에서 그간 한국영화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대부분의 감독은 이창동의 방식을 택했다. 그들 각자가 한국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에 기초한 염원과 욕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 와중에 홍상수는 당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을 영화 안에서 실험하며 별개의 노선을 택한, 상당히 독특한 작가이다. 오늘날까지도 홍상수의 실험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한해서만 실행되지만, 대다수의 주류 한국영화는 이창동식 의미의 집짓기에 익숙한 모습을 보이며 이 경향을 확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연구한 세계 속의 영화 

위 주제로 이론비평을 작성하고 등단한 이후, 1년간 열띤 평론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시의적 게재가 중요한 현장 비평의 특성상, 개봉작을 특정 기한까지 감상하고 글을 써야 할 의무가 매번 주어지면서 비평에 대한 압박감이 갈수록 커졌다. 더군다나 당시 평론 활동과 불문학 박사 과정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부담이 더욱 가중되었다. 기민한 현장 비평계가 주는 자극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업이 반복된다면 투입을 초과하는 산출로 인해 내적 에너지가 소진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평론가로서의 한계에 도달했을 뿐 영화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마음도 영화로 향해 있었기에, 당시 내가 내린 결심은 영화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국영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한국사회의 ‘거울’로서의 기능에만 치우쳐 있었던 듯하다. 한국영화가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가 지속되다보니 존재론, 매체론, 현상학적 의미 등 영화의 본질에 관해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학술 개념이 국내에 적용되는 시점이 늦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불문학 도서를 번역하며 현대 문학 및 사상의 흐름을 인지함과 동시에 해외 학자들의 현대 영화 이론이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을 목격한 나로서는, 유학을 떠나 한국영화에 보편적 영화 이론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외 유학 중 작성한 박사 논문 Cinematic Interfaces를 통해 영화 속 모호하고 잠재적인 세계로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페이스’가 서사와 이론 측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던 영화학자 토마스 앨세서(Thomas Elsaesser, 1943~2019)가 2019년에 갑작스럽게 작고한 후, 그가 집필 중이던 저서 The Mind-Game Film에서 미처 완성되지 못한 부분을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보충해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 본 도서는 당시 화제가 된 “퍼즐 영화”*주2가 사회적 패러다임과 맞물려 있는 측면을 정치, 경제, 사회, 정신분석, 철학 등에서의 이론을 활용해 조명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로 오기 전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에서 강의했을 때는, 활발한 세계화의 중심지로서 그 명암을 모두 반영하고 있는 아부다비라는 공간을 체험했다. 또한 앞의 편서의 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 영화 연구에 대한 관심사도 미학 이론 너머로 확장되고 있었기에, 이들을 계기로 ‘글로벌 시네마’라는 주제를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게 되었다. 글로벌 시네마라는 용어가 차츰 언급되기 시작했지만 용어의 정의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던 때이다. 먼저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2016)에서는 당시 막연히 떠올린 글로벌 프레임에 맞게 세계 각지 영화의 작가들이 내세운 영화의 정치성*주3을 매핑했다. 이를 발판 삼아, 2019년에는 잡지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의 객원 편집자로서 ‘동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글로벌 시네마를 설명하는 글들을 모아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이러한 편집 작업에 반영되었던 관점을 발전시킨 연구가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에 담겨있다.
 
      
(좌1) 번역서  『문학의 행위』(자크 데리다, 2013), 저서 Cinematic Interfaces, 공동편서 The Mind-Game Film.
(우2)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 저서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

위 저서에 설명된 글로벌 시네마의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한국영화의 세계적 위상이 강화된 계기에 대해 생각한 바를 먼저 공유하려고 한다.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등의 작가가 등장하고 작품의 장르 자체가 다양화되며, 작품의 ‘만듦새’ 역시 개선되어 산업이 진화했다는 것이 하나의 계기이다. 한류의 인기에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OTT 등을 통해 전 세계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한국영화 관련 학술 행사와 출판물이 기획되는 경우가 많아짐을 고려할 때 한국영화에 대한 학계의 관심도 크게 증가했다고 본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한국영상자료원처럼, 앞으로는 영화를 다루는 국내 연구 조직이나 문화 거점을 해외와 연결하는 매개자가 더욱 늘어나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만큼,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갈래의 연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글로벌 시네마로서의 한국영화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탈오리엔탈리즘’이다. 세계 진출을 위해 전통문화의 효과적 재현을 중시한 1990년대와 달리, 최근의 한국콘텐츠는 우리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되 서구적 모티프나 장르의 보편성을 녹여냄으로써 해외에 비춰진 ‘한국적’ 이미지에 더는 구애받지 않고 있다. 국지적 문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글로벌리티를 동반하는, 말하자면 탈오리엔탈리즘적 글로컬리티를 지닌 것인데, 이는 뒤에서 이야기할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의 한국영화가 갖는 고유성이 되기도 한다.


‘글로벌’ 체제의 생명 정치, 그리고 이중 윤리

먼저 오늘날의 글로벌 시네마 개념에 도착하기까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영화가 거론된 방식을 돌이켜보자. ‘세계영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실제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담론적으로는 오로지 그 용어를 바라보는 ‘관점,’ 즉 프레임만이 존재한다. 이 프레임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뉘는데, 내셔널, 트랜스내셔널, 그리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글로벌 프레임이 있다. 먼저 내셔널 프레임에서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역사와 사회현실, 문화 등을 반영하는 영화들을 배치하며 ‘세계영화’의 지도를 그린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을 통해 이는 상당 부분 해체되었다. ‘영토화’에 기반한 내셔널 프레임이 민족국가 기반의 영화에게 동질성, 환원성, 폭력성을 요구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은, ‘탈영토화’ 개념에 근거해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혼종적인 영화로서 세계영화를 정의한다.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인력의 공동 제작과 더불어, 특정 작품이 다른 국가나 문화권에서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늘어났다.

또 다른 프레임으로서 내가 설명하고 싶은 관점은 '글로벌' 프레임이다. 이는 세계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재영토화’된 시점에서부터 정치, 사회, 윤리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데서 기인한다.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양분되어있던 두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1990년대 들어 자본주의에 따른 새 시장질서 속의 민주주의적 세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포괄되어 일컬어지는 ‘포괄적 체제’가 긍정되며 세계화가 시작됐고, 여기에는 관용과 환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내세운 ‘연성 윤리(soft ethics)’가 시대정신으로서 동반된다. 서로 다른 체제나 이념을 타도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 및 대립의 중요성이 사라졌으며, ‘타자’ 역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받아들여진다. 정치적으로 추구되었던 자유와 평등이 이제는 타자와의 공존 속에서 대두된 ‘윤리’로 자리 잡은 것인데, 이를 가리켜 탈정치적인 윤리적 전환이 발생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탈정치적 세계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윤리적 경향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존중과 관용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연성 윤리는 어떤 경우에도 ‘관용될 수 없는’ 행위 역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관용될 수 없는 행위’가 연성 윤리의 지지를 받는 포괄적 체제를 해칠 때, 그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어쩔 수 없이 작동한다. 배제의 징후가 차별, 혐오, 추방과 같이 폭력적인 양상을 띠더라도 이를 정당화하는 ‘경성 윤리(hard ethics)’가 연성 윤리의 이면으로 노출된다. 배제된 타자들은 이 체제로 다시 통합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재차 폭력으로 맞서면서 두 세력 간의 ‘새로운 적대’ 관계가 형성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통합되었던 세계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운 9.11 테러와 이후에도 줄곧 이어져 온 대테러 전쟁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좌) 베를린 장벽 붕괴 (사진: "The Fall of the Berlin Wall", German-American Heritage Museum)
(우) 세계영화를 바라보는 세 가지 프레임, 그중 '글로벌' 프레임의 '새로운 적대' 관계에 관한 설명.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는 정치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지만, 윤리적 체제를 둘러싼 이 적대 관계는 오히려 ‘생명정치(biopolitics)’의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인간 생명의 탈취 또는 구제 여부를 결정하는 힘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이 정치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가 주권과 안보 수호를 명목으로 자신의 체제를 무한 정의의 편에 세우고 타자를 향해 생명정치를 초법적으로 자행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존재들이 발생한다. 체제에 속하지 못하거나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생명정치에 의해 주체(subject)로 살아갈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비체(abject)들이다. 글로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이 폭력적 메커니즘을 생명정치적 비체화(abjection)라고도 부른다. 


글로벌 시네마: 비체의 이중 죽음과 대안 윤리

정치·윤리적 패러다임 변화가 비체화를 일으킨다는 글로벌 프레임을 영화에 적용하여, 오늘날 글로벌 시네마의 주제를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정치적 변화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재난 또는 재앙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재난이나 재앙’이 우리 시대 주류 상업영화에 가장 굳건히 자리 잡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극중 위기 극복에 기여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해결책도 던지지 않는 대신, 그 빈자리를 디스토피아적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 즐거움으로 채운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양상이 부정적이라고는 절대 단정할 수는 없으며,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 자체의 반영이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내러티브의 경향은 대체로 ‘이중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된다. 작품 초반에 발생하는 특정 사건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주인공은 온전한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비체화’되며, 사회적으로 소생하지 못하는 상징적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다만 비체화된 주인공은 희생자로만 남아있지 않고,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에이전시(agency; 미션 수행을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동인을 의미하는 철학 용어)’를 발휘한다. 그들의 에이전시 발현을 촉진하는 목적으로는 재주체화(잃어버린 세계 또는 자신을 버린 공동체로 돌아가 다시 통합됨), 복수(자신을 비체화한 어떤 존재에 대한 복수), 테러(자신이 비체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을 테러), 자살(어떠한 목적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음) 등이 있다. 에이전시가 발현된 결과 이 목적들이 달성되는지를 결말에 확인할 수 있고, 달성에 실패할 시 주인공의 물리적 죽음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비체들의 에이전시가 꼭 위와 같은 목적에 의해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잠재적 대안 윤리,’ 즉 연성 윤리와 경성 윤리가 충돌하는 글로벌 체제로 환원되지 않고, 오직 비체들 사이에서 서로를 위한 긍정적 잠재성을 실험하며 형성되는 윤리를 제시하는 작품도 있다. 에이전시를 발휘하고 있는 비체들이 공존하다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실존적 선물이 되어줄 때, 그리고 이렇게 선물이 되어주며 서로 간 네트워킹이 실현될 때, 대안 윤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비체들 간 네트워킹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아토피아적 네트워킹’이다. 그들이 만나고 흩어지면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선물되기 경험은 영원할 수 없고 어느 하나의 이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 경험의 소중한 잠재성만은 여전한 채로 과정으로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작품에서의 주체를 ‘비체적 에이전시’로, 공동체를 ‘선물적 아토피아’로 재해석하여 글로벌 시네마 분석을 이어가고 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2000년대 이후 활동한 글로벌 시네마 작가의 작업을 관련 사례로 연구해왔다.
 
2000년대 글로벌 시네마 작가들에 대한 간략한 매핑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와 그 변주

그렇다면 이러한 글로벌 시네마의 특징이 한국영화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내가 비평 활동을 시작했던 2003년, 공교롭게도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되며 역작들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작품들 대부분은 ‘포스트-뉴 웨이브’라고 불리는 386 세대가 연출했다. 이 세대 감독들은 시기를 고려할 때 문화적으로는 세계화를 경험했지만 각자 한국 근현대 역사를 목도하며 모종의 정치성을 탑재했다(대체로 1980년대 불법적 국가 폭력이 남긴 상흔이 모티프가 된다). <올드보이>(박찬욱, 2003) 속 사적 감옥에서의 감금과 폭행, 공상과학 영화의 외양을 한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2003)에서 비체화가 이뤄진 배경,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이 비춘 당시 사회 및 경찰 수사의 폭력적 측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감독 각자가 격동의 한국 사회 속에서 확립한 정치적 감각이 비체화 내러티브와 에이전시의 방향성에 징후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관련 작품들이 거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유사한 구도, 즉 아버지-어머니-아들로 구성된 가족 삼각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 부정적인 법이나 권력, 제도 등을 상징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비체화하고, ‘아들’은 ‘아버지’에 저항하며 복수를 꿈꾸지만 영화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삼각 구도는 작품이 암시하는 권력과 욕망에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관객의 욕구를 자극한다.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이후 대중적 인기를 몰며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천만 영화’들은 앞에서 세계화 시대 한국영화의 특징이라고 잠시 언급했던 글로컬리티를 짙게 반영한다. 생명정치로 비체화된 작품 속 인물들이 에이전시를 발휘하는 동기에 힌트가 있다. ‘나쁜 아버지(가족, 국가 등)’로서의 전근대적 주권자는 초법적인 생체권력을 동원해 주인공인 ‘아들(백성, 시민 등)’을 비체화한다. 비체들은 역시 에이전시를 발휘하지만 그 결과로 달성하려는 목적이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적 정의 실현에 가깝다는 점이 한국 천만 영화의 특징이다. 자신들을 비체화한 ‘나쁜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로 대체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염원이 담긴 내러티브에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고 호응해왔다. 생명정치로 발생한 비체들이 대안 윤리를 모색하는 글로벌 프레임에 한국사회의 정치적 실패라는 역사적 국지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천만 영화는 이렇게 ‘나쁜 아버지’로 표상되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을 계속해서 소환하고 그것을 환상적 또는 역사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데, 이를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라고 표현하고 싶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비체화한 무능하고 폭력적인 국가가 유토피아적 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 또는 법치국가가 되기를 욕망하며 연대해 역사 또는 재앙 판타지를 조성한다. 더불어, 이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비체들은 함께 연대하는 와중에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선물의 윤리’를 체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안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딸을 잃은 주인공이 재앙 도중 구한 아이와 밥을 먹는 <괴물>(봉준호, 2006)의 한 장면에서처럼, 가족에 가까운 관계로의 발전을 돕는 과정으로 한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음식 공유’를 통해 ‘식구’가 되는 것이 대표적 방식이다. 
 
      
(예시)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로서의 천만 영화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에서 비체화를 초래하는 근원이 정치권력에서 점차 경제권력으로 전환됨을 관찰할 수 있다. 자본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이나 경제인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비체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양극화 사회의 단면이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생충>(봉준호, 2019)은 그 변화의 결정판이다. 글로벌 IT 자본가와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precariat) 가족이라는 양극화된 인물 설정, 그리고 경제적 계약 관계에 내재된 이중 윤리도 인상적이다. 극중 동익(이선균)과 연교(조여정)는 기택(송강호) 가족을 상냥한 태도로 존중하는 동시에 피고용인으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암묵적으로, 하지만 명확히 전제한다. 계약에 근거해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용인으로서 선의를 베풀지만, 피고용인이 그 이상을 요구하거나 불필요하게 간섭하는 등 그들이 전제한 ‘선’을 넘는다면 이들을 ‘혐오(비체화)’한다. 자신들이 혐오 받고 있음을 지각한 피고용인들의 분노는 결국 테러를 유발한다. 역시나 정치의 개입 없이 부자와 빈자 간 격돌만 존재하는 탈정치적 생명정치 프레임이 적용된다. 다만 비체 간 매개나 연대 없이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을’들 간의 권력 투쟁만 이어진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사회 속 비체의 특성을 반영하는 듯 내러티브가 한층 더 비관적으로 변주되었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오징어게임>(황동혁, 2021)은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설정을 통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정당화되는 체제를 상정해서 자본주의가 자연화된 세계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권력이 낳는 비체화가 최근 주류 한국영화 및 한국 콘텐츠에서 자주 나타나면서 기존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전형에 변형을 가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길항: 수행적 자기 모순
 
<기생충> 중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수행적 자기 모순이다. 작품들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비체 간 대안 윤리를 모색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비판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살찌우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거둔 기록적인 성과는 영화에 상품성을 불어넣어 글로벌 체제로 빠르게 흡수되도록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비관적인 사회상을 그리게 되기까지 동시대에는 어떠한 문제가 고질적으로 누적되어왔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노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은 화제의 작품을 찬양하고 소모하면서 그 안에 담겨있던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수신하지 않는다. 다양한 해석과 전유의 가능성을 지닌 작품일수록 이를 즐기는 관객을 통해 수입이 증대되지만, 이렇게 화제성을 얻어 글로벌 미디어 현상으로 번진 작품은 시뮬라크라(simulacra)로서의 바이럴 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네트워크가 ‘바깥’을 지시하는 어떠한 시도도 허용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자본주의는 체제의 바깥을 상정하는 비판적 텍스트마저도 무섭도록 강력한 포섭력으로 다시 흡수함으로써 태연하게도 비대화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발생한 콘텍스트와 여기에 저항하는 텍스트 간의 이 길항적 공생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게 숙제로 남아있을 것 같다. 오늘 특강에 찾아와준 여러분들도 함께 고민해주시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 1)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유사-할리우드’를 흥행 전략으로 삼았다. <쉬리>(강제규, 1999)와 같이 할리우드 스타일이 주를 이루되 한국적 요소를 가미해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올드보이>가 200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후부터 ‘한국영화’가 전 세계에 하나의 장르와 같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영화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장르로 거듭나며 국제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오늘 강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000년대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적 특성을 지닌 작품들이 글로벌 시장에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 질문 해주신 듯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요인을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영화인들의 열정과 애정에서 찾고 싶다. 1980년대 서울대 얄라셩영화연구회 회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울영화집단’의 선집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2000)에 장선우 감독이 기고한 「새로운 삶. 새로운 영화」나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들을 보면, 당시 시네필 문화를 견인한 인물들이 서구 영화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어떻게 자신들만의 주체성을 담지할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각성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해외 영화의 수준에 근접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저에는 어떻게든 우리만의 영화를 스스로 만들어보려는 열망도 있었고, 이 기세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일군의 감독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과거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폭력의 가해자로서의 정부나 제도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한국사회 자체에 대한 애정은 충만한 것이다. 이는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판적 측면을 영화화하고자 하는 집단적 지성이자 욕망과 같다고 본다.
 
   
(좌)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우) <괴물> 중. 재난 상황을 해결하려는 인물은 거의 '일반 시민'이다.
 
 한국영화에서의 ‘장르’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저서에서 다룬 ‘재난 영화’는 한국에서 2000년대 들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할리우드 스타일을 복사해 적용했다. 화재, 건물 붕괴, 비행기 추락 등 할리우드 재난 영화가 사용한 도상을 추출해 한국적 맥락에서 토착화하려는 시도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작품 자체의 질적 완성도를 높임과 동시에 한국적 특성을 더 정교하게 반영함으로써 걸출한 한국형 재난 영화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는데, <괴물>(2006) 정도가 그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영웅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괴물>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형 재난 영화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인물들은 거의 일반 시민이며, 이들은 비체가 되어 고난을 겪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스스로 사건을 해결한다. ‘유사-할리우드’ 전략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가 빠르면서도 완성도 높게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독창적 한국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각별한 애정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질문 2)
강연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국영화는 유독 한 작품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도록 하려는 욕구를 강하게 내비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은 인위적인 연출의 느낌을 주거나 메시지의 일관성을 해친다는 점에서 국내 관객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언젠가부터 해외에서 먼저 이 장르적 혼종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국영화에서 엿보이는 장르 혼종적 특징이 결국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향후에도 이 특징이 작품에 지속적으로 반영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답변)
장르 혼종에 대한 한국영화의 집착이 계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며,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워낙 여러 감독에 의해 반복되다 보니 이후 세대 감독들 역시 의식적으로 유사한 경향을 도입하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혼종을 시도해 작품에 개성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장르적 혼종의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그와중에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수요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강연에서 이야기한 마인드게임(mind-game) 영화와 같이 병리학적 증상을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이 맞닥뜨린 게임 상황을 관객과 함께 헤쳐 나가는 스타일은 할리우드의 여러 작품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중이다. 이처럼 유사한 영화적 스타일이 전 세계에 걸쳐 긍정되는 현상은, 어떻게 보면 동시대 문화와 미디어 전반에 형성된 광범위한 네트워크의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그 ‘바깥’을 떠올리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안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영화와 같은 ‘텍스트’에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이를 둘러싼 삶의 현장으로서의 ‘콘텍스트’ 측면에서는 ‘핵인싸’가 되고 싶어한다. 조금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견고한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영화적 경향이나 스타일이 동시다발적으로 긍정되는 현상도
이와 같은 측면에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질문 3) 
한국 상업영화만의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형적 인물상이나 신파성 등이 해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답변)
한국영화 전체를 일반화해 답변드리기가 어려워, 하나의 사례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부산행>(연상호, 2016)의 경우 개봉 당시 국내에서는 신파적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해외에서는 신선한 좀비 영화로 긍정적으로 조명된 바 있다. 서구적 좀비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 나타나서 그럴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해외 좀비 영화에서는 인간과 좀비의 구분이 명확해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좀비가 되면 즉시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부산행>과 같은 한국의 좀비 영화는 좀비로 변했더라도 그 인물에 대한 다른 인물의 감정적 반응이 지속된다. 한국문화에서 엿보이는 ‘정’이나 ‘유대’의 개념이 투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을 해외 관객들은 색다르다고 느낀 것 같다.

(질문 4) 
설명해주신 ‘글로벌 시네마’는 역사와 정치,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 주제의식과 내러티브를 설정한다. 반면 이렇게 거대한 프레임으로 동시대 사회를 조망하는 영화적 구도에 피로감을 느낀 창작자들은 개인의 삶이나 감정을 미시적으로 다룬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시는지 알고 싶다.
 
(답변)
사실 현재 연구 중인 주제로서 오늘 강연한 ‘글로벌 패러다임’은 동시대를 따라 이미 흘러가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한 글로벌 프레임을 넘어서 다가올 사회를, 그리고 그 속의 개인을 살펴보는 작품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2010년대 이후에는 탈정치적 모순에 따른 이중 윤리 외에도 사회 안에서 여러 복합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반영하는 작품들이 계속 발표되고 연구되리라고 예상하며, 나 역시 새로운 흐름을 지켜보고 싶다.

(질문 5)
강연 초반 이창동과 홍상수의 작품에 대한 공간적 키워드로의 분석을 보면서, 두 감독 등장 이전 세대라고 언급하셨던 감독들의 작품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집’과 ‘길’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까? 특히 장선우 감독의 경우 홍상수 감독의 ‘길’과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이를 다소 모호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

(답변)
두 감독 이후의 한국영화 감독들이 거의 이창동 감독의 방식을 따랐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 세대 역시 유사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이창동 감독의 이력을 고려할 때 그의 작품 세계의 바탕에 문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한국문학계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이어지는 와중, 보다 주류에 가깝다고 논의된 사조는 리얼리즘이었다. 또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 감독들의 공간이 지닌 리얼리티 역시 이창동 감독의 방식에 가깝게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1991)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가 원작으로 하고 있는 소설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을 보인다. 다만 장선우 감독의 이력을 참고할 때, 이러한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이 그의 작품 세계가 지녔던 맥락과 조금 어긋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 이야기한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에서 나타난 장선우 감독의 의지는, 포스트 모던을 대표하기보다 한국적 공연 및 서사 문화의 감각을 유기적인 체계로 조직하는 데 가까웠기 때문이다. 1995년 정도부터 영화계의 ‘코리안 뉴웨이브’에 대한 주목이 차츰 줄어든 배경에는
이러한 어긋남이 자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
주1. 
니체가 『비극의 탄생』(1872)에서 비극(예술)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 빛의 신 아폴론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특성을 이용한 방식을 참고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 태양과 같은 밝음과 그 밝음 아래서 사물이 드러내는 균형 및 질서 등을 의미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무질서한 혼돈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생명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주2.
복잡한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을 게임으로 초대하는 200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한 경향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2000)와 <인셉션>(2010) 등이 해당한다.

주3.
영화 작가주의 개념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할 때 정치적 운동의 일환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세상을 향한 21세기 영화 작가들의 태도에서 정치성은 훨씬 더 징후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고, 이를 다각도로 분석한 필자들의 글을 동료와 함께 취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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