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1973년, 서울로의 휴가 <야행>에 나타난 1970년대 한국의 경관

by.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2024-06-28조회 2,018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 속 공간적 배경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리 없는 배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곤 한다. 그 어떤 대사가 주어지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뒤에서 극의 전개를 뒷받침해주면서,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에게 때로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다. 따라서 영화를 감상할 때, 배경이 되는 공간(도시일 수도 있고, 농촌일 수도, 자연일 수도 있다)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행위 또한 신선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특히 1960-70년대에 걸쳐 총천연색 컬러로 제작된 한국의 영화들은 공간적 배경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자료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1980년 12월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기 이전까지, 대한뉴스를 비롯한 국가 주도의 기록 영화를 제외한다면 당대 한국의 ‘공간’을 총천연색으로 담아낸 매체는 오직 영화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당시에도 컬러 ‘사진’은 존재하였지만, 아무리 사진의 해상도가 뛰어나다 한들, 24프레임으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이 주는 생동감에 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 필름이라는 프레임 속에 담긴 공간은, 그 화각이 사람의 시선에 비해 제한적이라는 특성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경관(landscape)과는 또 다른 ‘의도된 경관’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의 시선, 혹은 그 시선의 기저에 깔려있는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이러한 ‘경관’에 의도적으로 녹아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므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의도된 경관’으로 재해석할 때,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영화 해석의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 <야행>(김수용, 1977)을 살펴보는 것은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 1973년에 촬영이 이뤄졌으나 당국의 검열로 인해 1977년에 개봉된 <야행>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당대 일간지에서의 영화평은 물론이요, 201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비평이 이어져 오고 있는 ‘꼭 봐두어야 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야행>에 담긴 공간적 배경(당대의 ‘의도된 경관’)을 살펴보는 것 또한, 영화 제작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 서울 도심 전경, 삼일고가도로, 광화문 지하보도를 넘나드는 도입부의 시퀀스

<야행>의 약 2분여에 걸친 도입부는 많은 비평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한적한 농촌을 가로지르는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도심의 삼일고가도로, 삼일빌딩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감상하는 시점과 무관하게 상경의 과정을 나타내는 시퀀스임을 누구나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멋진 구성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퀀스에서 주로 비치는 공간은 고속도로,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고가교, 서울 도심의 삼일고가도로, 그리고 광화문 지하보도라는 ‘입체 공간’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감독이 어디까지 의도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서울이라는 장소의 근대성, 도시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2024년 현재의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의 외관 (필자 촬영 및 제공)

주인공 현주(윤정희)가 근무하는 은행은, 안국동 로터리에 위치한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 김중업 설계)으로, 서울 도심 중에서도 ‘한복판’인 곳이다. 지하 1층, 지상 15층의 갱생보호회관은 대폭 리뉴얼을 거친 지금에도 여전히 위용을 뽐내는 건물이니, 반세기 전 서울에서는 더더욱 그 존재감이 돋보였을 것이다.


 
현충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반포주공아파트로 걸어들어가는 현주의 모습

현주가 거주하는 반포주공아파트는, 영화가 촬영되던 시점에 갓 입주가 이루어진 말 그대로 최첨단의 아파트 단지였다. <야행>에 대한 비평 이외에도, 반포주공아파트의 의의에 대한 논설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에서 한강 이남에 지어진 최초의 중산층을 겨냥한 아파트 단지로서, 현재의 강남 아파트 신화의 방아쇠를 당긴 단지에서, 주인공은 겉으로 보기엔 유유자적하나 심리적으로는 항상 결핍된 ‘모던한 삶’을 살아간다.


 

소월길에서부터 덕수궁까지 배회하는 현주의 시퀀스

영화의 20분-23분경에서, 현주는 정처 없이 서울 도심을 배회한다. 남산 소월길을 걷다가 구매한 마스크를 두르고, 시청 앞 덕수궁에 들러서 동물을 감상하거나, 정관헌에서 차를 마시는 현주의 행동은 50년이 지난 지금, 퇴근 후 직장인들의 모습을 종종 관찰할 수 있는 덕수궁의 풍경과 금세 오버랩된다.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카메라는 그저 현주와 풍경을 비출 뿐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무언가 심적으로 허전해 보이는 현주의 심리 상태를 체감할 수 있는 훌륭한 시퀀스이다. 꺽다리 빌딩 사이에서 조용히, 혹은 외로이 문화유산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는 덕수궁, 그리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익명의 도시인들의 모습이 현주라는 등장인물의 행동으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주의 고향, 홍성군 홍주읍성의 조양문

영화의 40분 이후, 현주가 잠시 생각의 전환을 위해 귀성한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군이다. 카메라는 장항선의 옛 역사, 홍주읍성의 조양문, 읍내의 도로를 컬러로 비추며, 최첨단을 달리던 대도회지 서울과는 대조적인 경관을 훑는다.
 


강변1로와 5로(현재의 노들길 동작역 부근), 그리고 갓 준공된 반포주공아파트의 부감 시퀀스

51분경에 등장하는 현주의 주거지, 반포주공아파트를 부감하는 씬은 만약 이 씬만 떼어놓고 본다면 마치 대한주택공사의 홍보 영화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대적이며, 도시적이다. 특히 씬의 도입부를 1971년에 갓 개통된 동작동 강변1로와 강변5로(현 노들길)의 경계점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감독은 초고밀도의 서울 도심, 비포장도로 천지인 현주의 고향과는 대비되는 인공적이고 균질하며, 인간성이 결여된(실제로 영화 촬영 시점에서는 입주가 100% 완료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시가지 강남’을 이 씬에 담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한국은행 앞 사거리의 육교

영화의 후반부, 60분과 68분경에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은행 앞 육교가 동일한 구도에서 시간대만 낮과 밤으로 달리한 채 등장한다. 재밌게도, 이러한 구도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한형모, 1966) 등의 타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단골’ 구도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도회지 서울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구도로서 너나 할 것 없이 이 육교를 꼽았던 것이다. 


 
걸음을 서두르는 박대리와 그 뒤에 우뚝 솟은 갱생보호회관의 전경

영화의 막바지, 74분경에 예상외의 행동을 하는 현주에 당황한 박대리(신성일)는 안국동 사거리의 육교를 황급히 걸어 내려오며 은행으로 들어가는데, 이 씬에서 당당한 풍채의 갱생보호회관 외관이 잠시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78분 즈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현주가 거주하는 반포주공아파트가 다시 비친다. 비록 영화 전체에 걸쳐서 공간적 배경이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으나, 현주와 박대리의 상반된 물리적 관계가 유지되는 두 곳의 장소 모두, 결국에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보면 반포주공아파트와 갱생보호회관은 ‘의도된 경관’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2024년 현재 아쉽게도 반포주공아파트와 갱생보호회관 모두 촬영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전자는 바로 지난해 재건축을 위해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후자는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영화 촬영 당시와는 외관이 상당히 바뀌었다. 예정된 파국을 맞이했던 현주와 박대리 두 사람의 관계처럼, 두 곳의 ‘의도된 경관’ 또한 현실 세계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사실상 자취를 감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영화 <야행>을 온전히 역사의 영역에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ㅣ일본 도쿄대학 박사과정에서 일제 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를 연구하며,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있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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