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22년 10월 11일(화)부터 19일(수)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되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미완의 사가: 아오야마 신지(1964-2022) 추모전’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42)
언제나 많은 이해자들에게 둘러싸여 일찍이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 신지는 불우한 작가였다. 신작이 발표될 때마다 적지 않은 리뷰가 나오기는 했지만 정리된 작가론이라면 지금도 결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동서고금의 영화, 음악, 문학에 정통했던 예민한 비평가였기 때문에 아오야마 신지를 논하는 것은 비평가에게는 그 대상에 필적할 만큼의 지성과 감성을 요구하는 골치 아픈 도전이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소설가나 연극 연출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음악가로서의 활동도 단순한 취미로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다재다능함이 아오야마가 하는 일의 전모를 한층 보이기 어렵게 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아오야마와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 끝내 아오야마론을 쓰지 않은 태만한 영화비평가 중 한 명이었으며, 너무나도 이른 그의 죽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씻어낼 수가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 만다 구니토시, 시오타 아키히코와 같은 현대 일본영화의 이름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릿쿄대학 출신이었지만 세대적으로 가장 아래 세대였던 아오야마는 일찍부터 학생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었던 ‘릿쿄 누벨바그’ 선배들과는 조금 다른 경로를 거쳐 영화계에 진입하게 된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1990년대의 일본영화 산업은 크게 침체되었고, 신인 감독이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일자리를 얻는 길은 이미 완전히 막혀 있었다. 기타노 다케시 같은 반전통적인 작가가 영화계 밖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혼란을 틈탄 것이었다. 이처럼 혼미한 시대에 새롭게 등장해 성행한 것이 OV(오리지널 비디오)라고 불리는, 처음부터 렌탈 비디오용으로 양산된 저예산 영화였으며, 또 시장 확대를 위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필요로 하기 시작한 BS(위성방송)였다. 그리고 아오야마는 실로 OV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감독을 경험한 후,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유료 BS 방송국 WOWOW에서 <
헬프리스>(1996)를 찍으며 본격적인 데뷔를 장식했다. 이런 형태로 시작된 아오야마의 행보는 영화의 정의가 점점 모호해져가는 와중에 영화란 무엇인가를 매번 되묻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헬프리스>는 현장에 결집한 인재들의 면모에서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후의 아오야마의 작품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 일단 당시 WOWOW 소속이었던 프로듀서 센토 다케노리가 있다. <헬프리스>는 센토가 시작한 프로젝트 'J·MOVIE·WARS'의 하나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매년 비교적 저예산인 영화 4, 5편을 한데 모아 제작, WOWOW에서 프리미어 방영 후 극장 개봉하는 프로젝트로 해를 거듭할수록 신인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데뷔의 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여러 편의 묶음 제작은 손익의 상쇄에도 용이했기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없는 시대에 이를 대체하는 시스템의 구축을 의식했다는 점에 센토의 비범함이 있었다. 또 하나 센토가 일본영화 프로듀서로서 선구적이었던 것은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시야에 넣고 있었던 점이었다. 가와세 나오미의 <
수자쿠>(1997)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그 가장 두드러진 성과였다. 아오야마가 센토가 프로듀싱한 <
유레카>(2000)로 칸 국제비평가연맹상과 에큐메닉상을 수상하는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 센토의 전략에 힘입은 바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센토와 함께 결정적이었던 것은 촬영감독 다무라 마사키와의 만남이다. 다무라는 <산리즈카> 시리즈로 알려진 급진적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집단 오가와 프로덕션 출신으로, 극영화에 진출하고 난 후에도 파격적인 롱테이크로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준 소마이 신지의 <
숀벤 라이더>(1983) 등에서 특이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특징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비정상적일 정도의 높은 감응력과, 살아있는 공간을 포착하는 카메라 시선의 철저한 비인칭성을 들 수 있다. <헬프리스>의 시작 부분에서 기타큐슈의 거리 풍경을 위에서 포착하고 이윽고 위태로운 진자운동을 시작하는 공중 촬영이라고 하는, 그 어떤 자의 시점으로도 결코 환원될 수 없는 마이클 스노우의 구조영화마저 연상시키는 카메라워크를 보면 그것은 명백해진다. 아오야마와 다무라는 이후에도 <
새드 배케이션>(2007)까지 오랫동안 콤비를 이루게 되지만, 그 관계가 일관성 있게 서로 익숙한 채로 의존하는 종류의 것과는 거리가 먼, 더없이 긴장 가득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유레카>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웅대한 환경 속에 인물을 던져놓은 다음 시간을 두고 그 생태를 쫓는다는 방향성을 정한 뒤, <달의 사막>(2001)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스탠다드 사이즈를 통해 의도적으로 공간을 한정하고, <호숫가 살인사건>(2005)에서는 멀티카메라 시스템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다무라를 굳이 세컨드로 돌린 것이다. 다무라와의 결별 후에 찍은 <
도쿄공원>(2011)과 마지막 감독작 <
구름 위에 살다>(2020)에서 나타나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로의 현저한 관심의 이동은, 결코 스타일적인 후퇴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단한 자기 혁신 끝에 처음으로 획득한 것, 더할 수 없는 복잡함을 경험해봤던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단순함의 경지였다. 아오야마는 다니엘 슈미트가 일본에서 찍은 걸작 <쓰여진 얼굴>(1995)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가까이서 관찰한 슈미트와 촬영감독 르나토 베르타와의 관계성으로부터 다무라와의 공동작업으로 연결되는 무언가를 배웠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서, <유레카> 이후 거의 모든 아오야마 작품에서 녹음을 담당하고 있는 기쿠치 노부유키 또한 다무라와 마찬가지로 오가와 프로 출신이다.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살 충동 바이러스를 음악으로 치유하는 SF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005)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아오야마 작품에서의 음향은 종종 시각적인 영상과 길항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건 소리의 공간성을 중시하는 기쿠치의 공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헬프리스>는 내용 측면에서도 아오야마에게 있어 결정적이었다. 이 작품은 나중에 만든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과 함께 ‘기타큐슈 사가’를 구성하게 된다. 개개의 작품 테두리를 넘어 공통적인 캐릭터가 오고 가면서 전체로서 큰 강과 같은 거대한 서사의 너울을 형성하는 사가라는 형식은 근대소설사에 있어서는 포크너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오야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나카가미 겐지이다(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하는 주인공의 이름인 겐지는 그에게서 유래한다). 고대로 이어지는 신화적인 땅 기슈에서 살아온 나카가미는 스스로가 피차별 부락 출신이라는 사실에 마주하여, 그 장소를 ‘골목(路地, Roji)’이라고 이름 붙이고 활황일 때부터 소멸 후까지를 사가로 그렸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나카가미의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는 <로지예: 나카가미 겐지가 남긴 필름>(2000)을 보면 분명히 나타나지만, 아오야마는 나카가미의 기슈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기타큐슈로 단순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
로지예>에서 역시 기슈 태생의 영화작가 이즈치 기슈가 나카가미의 텍스트를 낭독할 때 과장된 기슈 사투리가 특징적이었던 것처럼, 기타큐슈 사투리의 거의 음악적일 정도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이 아오야마에게는 중요했다.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규슈 이외의 사람이라면 전부를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은, 조야함과 순정을 겸비한 듯한 기타큐슈 사투리의 독특한 가락은 들으면 들을수록 ‘일본어’라는 통합된 개념을 불확실한 것으로 바꾸어 간다. 그리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에도 인접한 기타큐슈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말이 폴리포닉하게 교차하는 다의성을 가진 공간으로서 재정의되게 되었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에서 가장 깊이 탐구된 이 성격이야말로, 나카가미가 ‘골목’이라는 허구에 진정으로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또한 나카가미로부터 물려받은 짙은 정치성, 특히 천황제나 국가라고 하는 대문자 정치에 대한 강한 관심에 있어서는 동시대 작가들보다 오시마 나기사 같은 작가와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이미 늙어버린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하여>(2001)에는 그러한 아오야마의 정치성이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표출돼 있다. 애초에 <헬프리스>에서도 남자들을 괴롭히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상황이 쇼와 천황의 죽음과 겹쳐져 있었다. 죽여야 할 아버지가 이미 없어졌다는 사실이 남자들을 기댈 곳 없는(helpless) 고아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처럼 아오야마의 정치적 측면에서의 독창성은 천황제나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흐르는 피의 문제로 여긴 점에 있었다(전전의 국가이데올로기에서 일본 국민은 천황의 적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후 아오야마의 관심이 아버지 죽이기에서 여성적인 것의 탐구, 모성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의 속박으로 옮겨갔다는 점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무리 아이가 발버둥질해도 모든 것을 미소와 함께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사랑임에 틀림 없다. 온갖 저항이 모성으로 인해 무력화되는 개미지옥 같은 나라, 일본――절망적으로 여겨지는 한편, 그 끝없는 포용력에 희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서게 되는 그 지점에서 ‘기타큐슈 사가’는 닫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오야마의 미국문화에 대한 경도도 그 자신을 흐르는 피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성여성>(1966)의 고다르는 당시 파리 젊은이들을 ‘마르크스와 코카콜라의 아이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아오야마는 자신에게 흐르는 피의 절반이 코카콜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평생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국영화와 음악, 문학 속에서 자라나면서 현실 국가로서의 미국에게는 환멸할 수밖에 없었던 빔 벤더스를 ‘그를 논하는 것은 나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지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1) 아오야마가 보기에 전후 일본에게 있어서 미국은 아무리 그곳으로부터 독립하려고 발버둥질해도 본질적인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전술한 천황제와 같은 형식의 문제였다. 그런고로, 패전 직후 도쿄를 무대로 젊은 자매가 자신들이 사는 집을 미군 상대의 위안소로 하여 살아가는 <퇴폐자매>의 영화화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애석하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원작을 아라이 하루히코 등이 각색한 그 각본에는 “일본은 미국에 점령당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미국인의 몸을 점령해 주겠어”라는 대사가 포함돼 있었다.2)
지금 와서 새삼 생각하는 것은, ‘기타큐슈 사가’뿐만 아니라 아오야마가 남긴 모든 일들이 열린 채로 있는 거대한 사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 남은 우리는 끝내 완결되지 않고 중단되어 버린 그것들을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다뤄지고 있는 것들이 얼마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피에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 사가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필자 - 후지이 진시: 일본의 영화평론가이며, 현재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문: 현대 할리우드 영화 강의』(2008), 『되살아나는 소마이 신지』(2011), 『모리사키 아즈마 당 선언!』(2013) 등에 편저자로 관여했으며 『이와나미영화의 1억개의 프레임』(2012), 『에드워드 양 재고/재견』(2017),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2017),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2022)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번역 -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박진희
***
1) 아오야마 신지, 『나의 영화를 발견했다』(われ映画を発見せり), 세이도샤, 2001, 142쪽.
2) <퇴폐자매>의 시나리오는 《영화예술》 480호(2022년)에 실려있다(96-121쪽).
(원문)
青山真治、未完のサーガ
藤井仁子
常に多くの理解者に囲まれ、早くから国内外で高い評価を獲得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青山真治は不遇の作家だった。新作が発表されるたびに少なくないレビューが書かれはしたが、まとまった作家論となると決定的なものは今も存在しない。彼自身が古今東西の映画、音楽、文学に精通した鋭敏な批評家であったために、青山真治を論じることは、批評家にとっては対象と匹敵するだけの知性と感性を求められる厄介な挑戦だったのである。青山はまた小説家、舞台の演出家としても成功をおさめ、音楽家としての活動もたんなる趣味として片づけられるようなものではなかった。そうした多才さが、青山の仕事の全貌をいっそう見えづらくした面もあろう。かくいう私も、青山といつでも連絡がとれる距離にいながらとうとう青山論を書かなかった怠惰な映画批評家の一人であり、あまりにも早すぎる彼の死を前に、忸怩たる思いを拭い去ることができない。
青山は黒沢清、万田邦敏、塩田明彦といった現代日本映画の名だたる作家たちと同じ立教大学の出身だったが、世代的にいちばん下だった青山は、早くから学生映画の世界で評判をとっていた「立教ヌーヴェル・ヴァーグ」の先輩たちとはいささか異なる経路をたどって映画界に参入することになる。バブル経済の崩壊後にあたる1990年代の日本映画は産業としては大いに低迷し、新人監督がメジャー・スタジオで仕事を得る道はもはや完全に閉ざされていた。北野武のような反伝統的な作家が映画界の外から突然出現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そうした混乱に乗じてのことにすぎない。この混迷の時代に新しく登場して盛んになったのが、OV(オリジナル・ビデオ)と呼ばれる初めからレンタル・ビデオ用に量産された低予算映画であり、また、市場拡大のためにオリジナル・コンテンツを必要としはじめていたBS(衛星放送)であった。そして青山は、まさにOVの世界で初めて監督を経験した後、開局間もない有料BS放送局WOWOWで『Helpless』(1996)を撮り、本格的なデビューを飾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かたちで開始された青山の歩みは、映画の定義がますますあいまいになっていくなかで、映画とは何かをそのつど問いなおすものにならざるをえなかった。
『Helpless』は、現場に結集した人材の点でも内容の点でも、その後の青山作品を規定する決定的な第一歩であった。まず、当時はWOWOWに所属していたプロデューサーの仙頭武則。『Helpless』は仙頭が立ちあげたプロジェクト、「J・MOVIE・WARS」の一本として製作されたが、これは毎年、比較的低予算の映画を4、5本まとめて製作し、WOWOWでのプレミア放映後に劇場公開するというもので、年を追うごとに新人監督に積極的にデビューの場を提供す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数本を束ねての製作は損益の相殺を容易にするもので、スタジオ・システムなき時代にそれに代わるシステムを構築しようと意識していた点に仙頭の非凡さがあった。もう一つ、仙頭が日本映画のプロデューサーとして先駆的だったのは、早くから海外進出を視野に入れていたことだ。河瀬直美の『萌の朱雀』(1997)がカンヌ国際映画祭で受賞したのはそのもっとも目立った成果だった。青山が仙頭のプロデュースした『EUREKA』(2000)でカンヌの国際批評家連盟賞とエキュメニック賞を受賞するなど、フランスを中心に世界的な名声を得ていくことになるのは、この仙頭の戦略によるところが大きかったといえる。
青山にとって仙頭と並んで決定的だったのは、撮影の田村正毅(のちに改名してたむらまさき)との出逢いである。田村は『三里塚』シリーズで知られる先鋭的な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製作集団、小川プロダクションの出身で、劇映画に進出してからも、型破りな長回しで世間の度肝を抜いた相米慎二の『ションベン・ライダー』(1983)などで特異な個性を発揮していた。その特徴としては、キャメラの前で生起しつつある出来事に対する異常なまでの感応力の高さと、生きた空間を捉えるキャメラの視線の徹底的な非人称性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Helpless』の冒頭で北九州の街並みを真上から捉え、やがて危うい振り子運動を始める空撮の、何者の視点にも決して還元することのできないマイケル・スノウの構造映画さえ思わせるキャメラワークを見れば、そのことはあきらかだろう。青山と田村はその後も『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2007)まで長くコンビを組むことになるが、その関係が一貫して馴れあいからはほど遠い、きわめて緊張に富むものだった点に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シネマスコープの『EUREKA』で人間を圧倒する雄大な環境のなかに人物を放ち、その生態を時間をかけて追うという方向性を極めた後、『月の砂漠』(2001)ではすでに滅びかけていたスタンダード・サイズに空間を意図的に限定し、『レイクサイド マーダーケース』(2005)ではマルチキャメラを採用したばかりか、たむらをあえてセカンドに回したのである。たむらとの訣別後に撮られた『東京公園』(2011)と最後の監督作『空に住む』(2020)に顕著な俳優たちの演技アンサンブルへの関心の移動は、断じてスタイル的な後退などではなく、こうした絶えざる自己革新の末に初めて獲得されたもの、複雑さを極めた者だけが到達することのできる単純さの境地であった。青山はダニエル・シュミットが日本で撮った傑作『書かれた顔』(The Written Face、1995)で助監督をつとめた経験を持つが、このとき間近で観察したシュミットと撮影監督レナート・ベルタとの関係性から、たむらとの共同作業に通ずる何かを学びとったように思えてならない。ちなみに、『EUREKA』以降のほぼすべての青山作品で録音を担当している菊池信之は、たむらと同様、小川プロの出身である。人を自殺させるウイルスの蔓延を音楽によって癒すSF『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2005)にあきらかなように、青山作品にとって音響はしばしば視覚的な映像と拮抗するほど重要なものだったが、それも音の空間性を重視する菊池の貢献あってのことだっただろう。
先述したように、『Helpless』は内容の点でも青山にとっては決定的だった。この作品は、のちに撮られる『EUREKA』、『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とともに「北九州サーガ」を構成することになる。個々の作品の枠を超えて共通するキャラクターが行きかい、全体として大河のような巨大な物語のうねりをかたちづくるサーガの形式は、近代小説史にあってはフォークナーによるものが広く知られているが、青山への直接の影響源となったのは、そのフォークナーの影響を受けた中上健次である(浅野忠信演じる主人公の役名、健次は彼に由来する)。古代につながる神話的な土地、紀州に生を享けた中上は、自らが被差別部落の出身である事実と向きあい、その場所を「路地」と名づけて活況から消滅後までをサーガとして描きつづけた。青山にとって中上の影響がいかに絶大であったかは『路地へ 中上健次が残したフィルム』(2000)を見ればあきらかだろうが、青山は中上にとっての紀州をただたんに自分の生まれ故郷である北九州に置き換えたわけではない。『路地へ』でやはり紀州生まれの映画作家、井土紀州が中上のテクストを朗読する際の誇張された紀州訛りが特徴的であったように、北九州弁のほとんど音楽的な魅力を再発見することにつながった点が青山にとっては重要だった。九州以外の者には日本人観客でもそのすべてを聴きとることは容易ではないものの、北九州弁の粗野と純情を兼ね備えたような独特な調子は、聴くほどに「日本語」という統合された概念を不確かなものへと変えていく。こうして、海を挟んで朝鮮半島にも面する北九州の土地は、多様な人と言葉がポリフォニックに交差する、多義性の空間として再定義されることとなった。そして、『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もっとも深く探究されたこの性格こそは、中上が「路地」という虚構に真に期待していたものでもあったのである。
青山はまた中上譲りの深い政治性、ことに天皇制や国家といった大文字の政治への強い関心において、同時代の作家よりも大島渚のような作家とはるかに近い場所にいた。『すでに老いた彼女のすべてについては語らぬために』(2001)には、そうした青山の政治性がもっとも直接的なかたちで表出されている。そもそも『Helpless』では、男たちをさいなむ父の不在という状況が昭和天皇の死と重ねられていた。殺すべき父はもはやいなく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事実が、男たちを寄る辺のない(helpless)孤児へと変貌させたのである。このように、青山の政治面での独創性は、天皇制や国家権力というものを、自らの肉体を否定しようもなく流れる血の問題として考えた点にあった(戦前の国家イデオロギーにおいて日本国民は天皇の赤子と位置づけられていた)。その後の青山の関心が、父殺しから女性的なものの探究、母性による骨がらみの呪縛へと移っていったことは、この文脈において捉える必要がある。『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真に恐ろしいのは、どれほど子があがいてもいっさいを微笑みとともに受けとめてしまう母の「愛」にほかならない。あらゆる抵抗が母性によってすべて骨抜きにされてしまう蟻地獄のような国、日本――絶望的に思える一方で、その底なしの包容力に希望を探りあてるしかないという認識に立ったところで「北九州サーガ」は閉じられるのだ。
このように考えることで、青山によるアメリカ文化への傾倒ぶりも、彼自身を流れる血の問題であったとわかるだろう。『男性・女性』(Masculin, féminin、1966)のゴダールは、当時のパリの若者たちを「マルクスとコカ・コーラの子供たち」と呼んだが、その伝に倣えば、青山は自分に流れる血の半分がコカ・コーラでできているという事実から生涯眼をそむけることがなかった。だからこそ、自分と同じようにアメリカの映画と音楽と文学で育ちながら、現実の国としてのアメリカには幻滅するしかなかったヴィム・ヴェンダースのことを、「その人を論じることが自分について語ることに等しい」ほど重要な同志と感じていたのである 。青山の見るところ、戦後日本にとってのアメリカは、どれほどそこから独立しようともがいても本質的な従属関係からは脱け出せないという意味で、先述した天皇制と同型の問題であった。それゆえに、敗戦直後の東京を舞台に若い姉妹が自宅を米兵相手の慰安所にして生きぬく『退廃姉妹』の映画化が実現しなかったことが惜しまれてならないのだ。島田雅彦の原作を荒井晴彦らが脚色したその脚本には、「日本はアメリカに占領されたけど、これからはあたしたちがアメリカ人の体を占領してやるのよ」という台詞が含まれていた 。
今、あらためて思うのは、「北九州サーガ」のみならず、青山の遺したすべての仕事が開かれた巨大なサーガをな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がついに完結することなく中断されてしまったことを、後に残されたわれわれは糧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そこで扱われている事柄がいくらかでも自分自身の血に流れていると感じる者なら誰一人、このサーガの登場人物である事実から逃れることはできないの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