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죽음을 설명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나왔으면 키딩

by.김시선(영화평론가) 2021-09-27조회 7,645

“방송에서 죽음을 다루고 싶어요.” 

무려 30년 동안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받은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이끈 피클스 아저씨는 갑자기, 주시청자인 아이들에게 ‘죽음’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상해볼까? 색종이 한 장으로 어린 시절을 알록달록 채워준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선생님이 어느날 빨간색 종이를 접어 시체를 만들자고 한다면 그걸 보는 부모와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다른 건 몰라도 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끊기질 않을 거다.

어린이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세트장은 검은색보단 핑크색 계열이 어울리고 음악은 돈 얘기나 욕이 들어간 랩보단 동요가 흘러나오는 게 정상으로 보인다. 여기에 기분이 우울해지는 목소리 톤보다는, 듣는 것만으로도 운동장으로 뛰쳐나가야 할 것 같은 뽀미 언니의 하이 레벨 톤도 필수! 귀여운 단발 스타일을 한 피클스 아저씨 역시 노래하는 인형을 통해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어른들에겐 잊고지낸 동심을 찾아준다. 모두가 바라는 그대로… 그런 피클스 아저씨는 어째서 어린이 프로그램의 금기인 ‘죽음’을 다루고자 했던 걸까. 나는 그 점이 흥미로워 <키딩>을 밤새서 보고 말았다.

마지막 화를 막 끝낸 시점에, 난 알아버렸다. ‘죽음’을 다루기 좋은 매체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어린이 프로그램이라는 걸.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가볍게 <키딩>의 흐름을 살펴보려고 한다.
 

짐 캐리가 연기하는 피클스 아저씨는 오랜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사랑받아온 TV 프로그램 진행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선한 영향을 끼쳤냐면, 거리에 주차된 차량을 훔친 강도들은 부품 하나하나를 팔려고 하다가 피클스 아저씨의 친구, 우쿨래리(사실은 피클스가 연주하는 악기)를 발견하곤 분해된 차를 재조립해서 그대로 되돌려 놓는다. 강도에게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 선이 ‘피클스 아저씨’인 것. 이렇게만 설명하면, 피클스 아저씨는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지만 그에게도 어른들의 세상이 존재한다. ’인형극장’ 프로덕션 사장이자 피클스의 아버지 셉은 동심을 더 많은 돈으로 바꾸고 싶어하고, 프로그램 밖에서 제프로 살아가는 어른 피클스는 아내와 이혼한 돌싱으로 누구보다 외롭게 홀로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인 ‘피클스’이자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못한 어른 ‘제프’. 동시에 그 둘은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키딩>의 주요 이야기는 그 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물 ‘제프’ ‘피클스’를 따라 진행된다. 그걸 지켜보는 게 이 작품의 묘미.

이쯤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질문. 피클스 아저씨는 왜 ‘죽음’을 다루려고 하는 걸까? 그냥 하던대로 하기만 해도 유명토크쇼에도 출연하고, 피클스 인형도 잘 팔수 있는데 말이다. 원래 어른이 된다는 건 새로운 도전보단 가진 걸 지키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혹시 제프에겐, 반드시 ‘죽음’을 다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게 뭘까.
 

정해진 시간, 정해진 주제에 따라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은 방송된다. 오늘 주제는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서 다룬 아름다운 색. 얼마나 지겨웠는지 제프는 아버지 셉에게 “색깔에 관한 방송을 또 해야 해요? 하늘이 파란색인 건 애들도 안다”고 말하지만 1억 1200만 달러짜리 가치를 지닌 피클스 아저씨를 지키기 위해 사장 셉은 제프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네 안에 두 사람이 있어. 한 명은 피클스 아저씨. 다른 한명은 제프야. 별거 중인 남편이자 슬픔에 잠긴 아버지.” 아- 차, 현실을 사는 제프에겐 쌍둥이 아들이 있는데 한 명을 교통 사고로 잃어버린 것. 이 글을 쓰면서도 놀란 건 나조차 죽음을 ‘죽었다’라 표현하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우회해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나름 어른이 된 나조차 죽음은 이토록 어색하다. 그러니, 평생을 아이들과 소통해온 어른 제프에게 죽음은 얼마나 낯설었을까? 게다가 다른 누구의 아이도 아닌 자기 자식의 죽음은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을 서투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프’와 ‘피클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한 아버지가 바로 그 증거. 제프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피클스는 현실의 슬픔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마주할 수가 없다. 그건 거짓말이니까. 거짓말을 하는 어른은 나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 이런 상황에서 제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딱 하나다. 자신의 또다른 분신 ‘피클스 아저씨’를 통해 아이들을 만나 죽음을 설명하는 것.

이제 피클스 아저씨가 굳이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죽음’을 다루려고 한 속사정을 알게 됐다. 여기까지만 알고 봐도 <키딩>은 한 인간의 내면을 현실과 방송으로 분열시키고, 다시 융합하는 과정을 통해 보는 이의 마음을 치유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보고 나면, 누구나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제프와 피클스를 연기하는 짐 캐리의 얼굴도 무시할 수 없다. 과거엔 끼 많은 배우였지만, 지금은 주름 사이로 이야기까지 담아낼 줄 아는 배우가 되버렸다. 짐 캐리가 연기한 피클스 아저씨 얼굴만 봐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니까. 여기까지 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근데, <키딩>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앞서 나는 ‘죽음’을 다루기 좋은 매체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했다. 실제로 죽음을 다룬 어린이 프로그램을 본 적은 없기에 부득이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예로 설명해야 함을 이해해주시길.

일단, 죽음이 무엇일까? 파스칼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죽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죽음에 대해선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이처럼 똑똑한 어른도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죽음’이라는 거다. 그런 ‘죽음’을 도대체 제프는 어떻게 피클스 아저씨로 빙의해서 아이들에게 설명한 걸까?

‘제프’와 ‘피클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그는 급기야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뒤 소아병동에 있는 한 아이를 찾아간다. 뇌종양 수술때문에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낸 아이에게 피클스는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린 두피 표면을 만지게 한다. 보기엔 흉한 것이 만지고 나니 별 게 아니다. 이윽고 수술로 인해 비어버린 자신의 두피를 만지는 아이. 아이는 웃는다. 이처럼, 아이들이 ‘죽음’을 미리 만져볼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다음 피클스 아저씨는 셉에게 말한다. “이번 시즌엔 사라진 것들에 대해 다루려고요. 머리카락처럼요.”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제프는 피클스를 통해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 제프는 사장 셉에게 “우리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지 않으면, 아이들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 생겼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라는 셈이 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식을 한순간에 잃은 현실의 제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며 TV 속 피클스로 살고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제프는 죽음을 미리 만져볼 수 없지만, 피클스는 가능하다. 피클스 아저씨는 여러 인형 친구들이 있는데, 그 중하나가 심장을 표현한 쿵쿵이다. 마냥 귀여운 쿵쿵이가 고통스러워하자 피클스 아저씨는 단 번에 그걸 쭈욱 뽑아버린다. 피클스는 쿵쿵이를 만지며 방송을 보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이 고통엔 이름이 있어”

이 짧은 순간을 다시 살펴보고 싶다. 심장을 상징하는 쿵쿵이를 뜯어내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 그 ‘죽음’에 동반되는 고통. 피클스는 이젠 멈춰버린 심장을 만지며, 이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려고 한다. 나는 살면서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 않는가. 단지 그걸 표현해도 되는 지 모를 뿐인 거다. 제프가 고통스러운 건 그때문이고,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도 그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표현하라고 말하는 어른도,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도 많아지면 좋겠다. 밝은 색이 아니라 어두운 색을 칠해도 좋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걸 뒤늦게 알게된 제프가 피클스를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애들이.. 심장이 있던 곳에, 느끼는 감정을 표현 못 하는 건 두려운 일이에요”

비록 작품 속 어린이 프로그램이지만, 어른이든 어린이든 집에서 <키딩> 속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봤으면 좋겠다. 단언컨데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용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키딩>은 청소년 관람 불가로 분류됐고 그 말은 아직 피클스 아저씨가 바라는 (아이들에게 ‘죽음’을 소개할 수 있는) 세상은 <키딩>에서도, 현실에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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