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을 관람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해의 경향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특정 주제나 장르가 반복해서 등장하거나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이 유사한 경우, 그 경향성이 무엇에 대한 반응 혹은 징후인지 묻게 된다. 물론 그러한 문제의식이 구체적인 작품들을 오히려 경직된 틀로 포괄하는 결과를 낳을 때도 있고, 평론가의 자의식만 앞세운, 실은 별 의미가 없는 물음일 때도 있다. 그래서 심사평이나 선정의 변처럼 어쩔 수 없이 ‘올해의 경향’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작품을 어떤 경향성 안에서 재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올해에도 여러 영화제에 응모한 장편들을 몰아서 볼 기회가 있었다. 영화들을 일련의 범주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예년과 다른 하나의 흐름이 자꾸 눈에 걸렸다. 그것은 흑백영화의 확연한 증가다. 흑백영화 편수의 증가를 변화나 경향으로 단정하긴 망설여지지만, 이 현상이 안긴 의아함은 무시하고 지나가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에 든 의문은 당연하게도 이런 것이다. 이들은 왜 흑백의 세계를 선택해야만 했을까. 관람자의 위치에서 그 영화가 흑백으로 재현되어야만 하는 서사적 맥락을 납득하기도, 미학적 효과를 체감하기도 어려웠다는 말이다. 짐작할 수 있는 의도들은 있다. 관습적으로 흑백화면은 현실보다는 꿈의 분위기를, 현재보다는 지나간 시간을 그리는 데 자주 사용되어왔으나 적어도 그간 보아온 독립영화들을 떠올려보자면, 그것은 세계의 사실주의적인 감각을 고양하고 부각하기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에서 색을 제거해버리는 선택이 오히려 영화가 현실의 어둠을 그대로 마주하는 방식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롱테이크의 느린 호흡이나 허수아비 같은 형상으로 화면 안에 존재하는 표정 없는 인물은 흑백화면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요소들이다.
올해 본 흑백영화들도 대체로 그랬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 이런 인상의 흑백영화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이 새삼 이들의 의도에 의문을 더한다. 흑백으로 된 세계의 무엇이 그들을 매혹한 것일까. 그들은 흑백화면의 영화적 필연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문제는 이들 영화에서 아무리 그 의도와 효과를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긍정해보려 해도, ‘희망 없는 현실의 암울함을 표현하기 위한 편의적 수단’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감독들이라면 세상이 어두우므로 세계의 색채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식의, 일차원적이고 구태의연한 대답 이상을 들려줄 수 있을까.
흑백영화를 선택했던 기성 감독들의 견해를 잠시 우회해보려 한다.
이준익은 <
동주>(2015)에 대해 우리의 기억 속 윤동주가 흑백사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영화 또한 흑백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설명이 다소 단순하게 들리긴 해도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그 짧은 말에 내포된 역사적인 층위와 한 예술가에 대한 기억의 맥락에 공감하게 된다.
홍상수는 <
북촌방향>(2011)을 편집단계에서 흑백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영화 속 풍경이 주는 느낌이 흑백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직관에 근거한 그의 설명은 언제나처럼 모호하게 다가오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그가 언급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세계의 정념에 깊게 동화될 수밖에 없다.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적 선택에 대해 관객을 이해시킬만한 명확한 의도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둘의 예를 든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흑백화면의 선택이 (어쩌면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라도) 세계를 대하는 고유한 태도로, 낯설게 다시 경험하게 만드는 특수한 통로로, 그리하여 영화의 중대한 형식적 결정으로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흑백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색을 지우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공기를 즉물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시각화하는 문제다. 세계의 색채를 변환하는 일은 문장 수십 개를 쌓아 올려 묘사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지평이지만, 영화 안에서는 즉각적으로 편리하게 구현 가능한 것이다. 올해 마주한 흑백영화들은 흑백의 효용성과 독창성에 대한 고민은 미흡한 채, 그 편리함만을 취한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이들이 아무리 서사구조에 복잡한 시도를 가해도 영화가 여전히 평면적으로 느껴졌던 점 역시 같은 맥락에 기인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 평면적인 느낌과 관련해서 이 영화들이 공유하는 장면의 의아한 상태에 대해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이려 한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영화들에서 롱테이크는 주로 인물들의 대화 장면을 바라보는 데 할애된다. 흑백의 화면 속, 한 자리에 고정된 카메라 앞에 인물들이 마주 보며 앉아 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핵심도 중심도 긴장감도 유머도 감지되지 않는다. 짐짓 심각한 체 하지만 속이 비어 있거나 일상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상성을 오인하는 대사 내용만의 문제는 아니다. 카메라가 시간을 적극적으로 감각하는 대신, 한 자리에 서서 그 시간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며 그저 쳐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주는 것이다. 이런 대화 장면이 시나리오를 반영한 것이든, 배우들의 즉흥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것이든 그것을 관장하는 리듬과 시선에서 입체적인 활기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카메라 앞의 시간에 개입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는 둔감함을 그 세계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착각하는 건 아닌지 반문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