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3부작으로 묶이는 <
말하는 건축가> <
말하는 건축 시티:홀> <
아파트 생태계>,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제는 하나의 챕터를 끝내고 새로운 챕터를 시작해야 하는 느낌이다. 아직 새로운 챕터의 주제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렇게 지속적으로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여기까지 지극히 자연스럽게 온 것 같다. 훌륭한 시민들의 개인적인 지원과 공적 기금으로 내 관심사를 조금씩 넓혀 올 수 있었다. 내 관심사가 타인의 관심사이기도 할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과연 그런지 잘 모르겠다.
2009년 겨울, 다큐멘터리 메이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
말하는 건축가>의 촬영을 시작했다.
정기용 선생과 수차례의 통화를 하고 동선을 확인했다. 극영화를 만들던 연출자 마인드로 촬영현장을 진행했다. 역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인물을 밀접하게 팔로우하는 다큐멘터리를 원했다. 그런데 정기용 선생의 하루는 나의 하루와는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기용 선생을 찾아왔고 하루에도 여러 번 외부에 미팅과 강연을 가셨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지방 출장을 다녀오셨다. 한낱 카메라 한 대로 기록되기에 그의 삶은 방대했다. 나는 한 건축가가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건축 작업은 극영화처럼 하나의 프로젝트가 꾸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카메라를 대체 언제 켜고 언제 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촬영하다가 이제 별게 없겠지 라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끄면 어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생기곤 하는지… 참으로 현실은 미스터리 했다. 시네마베리테 스타일의 완고한 기록 정신으로 촬영을 이어가던 다큐멘터리 영화는 몇 개월이 지나도록 이야기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기용 선생의 삶에 끌려다니며 육 개월 이상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정기용 선생이 진행했던 다양한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돌아보았다.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조예가 없는 내가 보기에도 별로로 보였다. 세련되고 멋진 공간들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스러웠다. 물론 무개성의 저렴한 빌딩을 대충 만들어놓고 내부공간도 대충 나누어 쓰는 일반적인 건물과는 달랐다. 뚜렷한 콘셉트가 있어 보였고 스케일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후져 보인다. 그것은 결국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돈 문제였다. 정기용 선생의 대표적인 공공작업인 무주 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가 모두 최소한의 예산, 그리고 작업자들의 헌신으로 때워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인공을 이해하려는 마음이었다. 한 공간에서 오래 머물며 들여다보니 공간들이 이용하는 이들에게 그 어떤 불편함과 위화감을 주지 않는 것도 느껴졌다. 그 동네 주민들의 편안하고 일상적인 옷차림과 공간이 잘 어울렸고 이상하리만큼 소음은 공간에 스며들었다. 어디든 시끄럽지 않았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햇볕이 잘 들었으며 이용하는 주민들은 오후가 될수록 많아졌다. 그렇다고 그 공간들이 딱 마음에 든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좋아한다고 믿었던 공간과 건축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촬영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정기용 선생의 건축사무소 직원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말했다. 정기용 선생님은 누군가 꼭 기록을 해둬야 한다고. 그래서 나에게 늘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가 원하는 기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기록이란 사랑하는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자 홈비디오를 구입하는 젊은 부부의 애틋한 마음 같은 거였다. 그 애틋한 마음에 이끌려 끝을 알 수 없는 기록자의 임무를 나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제작비를 모았고 장기전을 대비하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촬영을 이어나갔다. 정기용 선생은 자타가 인정하는 기록광이었다. 식당의 냅킨에 남긴 자필 메모마저 스스로 챙기는 분이었다. 어린 시절 쓴 일기마저 버리지 않고 사무실 한켠에 은밀하게 보관하는 사람이었다. 며칠 건너뛰고 촬영을 하러 가면 그는 촬영하지 못한 현실을 아쉬워했다. 그저께 눈이 펑펑 내린 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말로 묘사하면서 그걸 촬영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정기용 선생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버리지 않았고 자신의 일상과 말들이 모두 기록되기를 희망했다. 그것이 정기용 선생의 타고난 천성인지 아니면 죽음을 앞둔 인간의 회한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기용 선생은 삶의 쓸모없는 부스러기조차도 사랑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낭만적인 분이었다. 내가 다큐멘터리로 정기용 선생의 삶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었던 말을 세상에 전하는 메신저로 내가 선택되었을 뿐이었다.
정기용 선생을 존경하던 어떤 교수님은 암 투병 중인 선생을 끌고 다니며 촬영을 진행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선생님의 건강을 악화시켜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야윈 모습을 극장에 공개해 돈을 버냐며 나를 비난했다. 영화 <
말하는 건축가> 안에는 죽음을 향해 가는 정기용 선생의 육체가 고스란히 노출되어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면서 그 행위에 대해 윤리적인 질문을 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말이다. 만약 큰돈을 벌게 된다면 그 윤리적인 질문은 더욱 피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극영화처럼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주고 고통을 재현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로 돈을 벌기를 원하지 않는다. 몇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유사한 기획의 다큐멘터리가 많아진다. 극영화의 흥행공식이 존재하듯 다큐멘터리 영화의 흥행공식도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을 촬영하는 대가로 나는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를 비난했던 그 교수님이 <
아파트 생태계>를 보러오셨다. <아파트 생태계>를 보고도 그분은 냉정한 비판을 이어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은 비판이 미안했는지 본인의 수업 중에 <
말하는 건축가>를 다시 본 이야기를 했다. 개봉 당시에는 나에게 무척 화가 났지만 이번에 다시 보면서 그래도
정기용을 영화로 남겨둬서 다행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나에게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속성에 눈뜨게 한다. 당장은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는 그 기록들이 시간이 지나 어떤 변화를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하는 건축가>에 담긴 시간의 기록과 영화가 공개된 이후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달라진 기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어쩌면 도저하게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에 맞서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나는 가급적이면 다큐멘터리에서 타인의 고통을 많이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자세하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 영화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뛰어드는 일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점점 넓어져 간다. 그 과정에서 이해하지 못할 말들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애틋한 우정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분노는 에너지가 되고 친절은 위로가 된다.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함께 밥도 먹는다. 서로에게 특별한 비용을 제공하거나 향응을 베푸는 일도 없다. 그저 같이 시간을 보낸다.
다큐멘터리가 기록을 통해 완성되는 이야기라고 할 때 나는 비교적 성공적인 선택을 한 셈이었다.
정기용 선생의 주변인들은 그가 기록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꾸준히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정기용 선생은 기록되는 것이 남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역사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기용 선생은 말했다. 어딘가에 길이 하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길로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길을 찾아 헤맨다. 다른 한 사람도 같은 길을 헤맨다. 그렇게 사람들이 헤맨 길이 다시 새로운 길이 된다고.(끝)
#1. 아파트 생태계(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2. 말하는 건축 시티:홀(Talking Architect City:Hall) -우리가 공간에 대한 결정에 직면했을 때
#3. 말하는 건축가(Talking Architect)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