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_ 먼저 책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한울), 이 책은 1990년 5월부터 1991년 5월까지, 한 번을 쉬고 12달 동안 (지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잡지 「로드쇼」에서 ‘도시에(dossier)’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내용을 이듬해에 한 권으로 묶은 것입니다. 올해로 어느덧 책이 나온 지 25주년이 되었는데, 이 책을 지금 돌아보면서 어떤 느낌이 가장 먼저 들게 됩니까? 사실 이 글이 연재되는 동안에는 제가 이 잡지의 편집장이었기 때문에 저도 이상한 추억에 잠기게 됩니다.
김홍준_ 개인적으로는 ‘도시에’를 연재하는 일 년 동안은 ‘도시에’를 쓰는 것이 내 삶의 전부였습니다. 먹고, 자고, ‘도시에’ 쓰고. 그게 다였습니다. (웃음) 난 이전까지 영화를 좋아했고, 8미리 영화도 찍어봤고,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성’에서도 있어 봤고, 서울영상집단에도 있었고, 심지어는 유학을 가서 영상인류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내가 직업으로서 영화를 택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를 쓰면서 일로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가장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도시에’를 쓰면서 비로소 내가 영화인이 되었구나, 라는 것입니다.
정성일_ 25주년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이 책의 판매 부수(한울 출판사 집계 2016년 1월 현재, 초판 30쇄 44,000부)보다 더 큰 의미는 25년이라는 시간을 견뎠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홍준_ (단호하게) 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성일_ 아니, 이 의미는 필자의 동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객관적으로도 이 책이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출판사 한울에서 절판시켰을 테고, 인쇄를 하고 창고에 두는 것이 다 돈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의미에서 봤을 때에도 이 책을 남겨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가 주관적인 대답이었다면, 객관적인 사실로서 이 책이 오래 견딜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혹은 왜 이 질문을 부정하고 싶은지요?
김홍준_ 왜냐하면, (잠시 생각) 책이 절판 안 되고 고맙게도 계속 나오긴 했지만, 이 책이 영향을 미칠 만큼 사람들에게 팔리고, 읽히는 부수는 굉장히 미미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이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영화라는 세계로 나서기 위한 문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이끌어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책과 정보가 필요했던 시절에 운 좋게도 내가 이 역할을 맡았던 것이고, 그래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반응을 일으키고 팔렸던 것입니다. 이 책이 감당했던 역할과 반응들은 어느 시점에선가는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적인 시효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이 책을 본다는 것은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 혹은 하나의 복고 취미로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책 자체의 의미로서 (현재까지 유효한 정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책의 가치가 있다면, 이 책은 당시 90년대 초의 나 자신의 기록이자, 한국 영화 청년들의 공통된 문화 기록이라 생각합니다.
「영화의 이해」 「세계 영화사」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2년 판
정성일_ 거기에 대해서 나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이미 한국에는 영화에 대해 알고 싶다면, 훨씬 더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가 번역되어 있었고, 세계 영화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잭 C. 엘리스의 「세계 영화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나왔을 때,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 25년이라는 세월이 짧은 시간은 아닌데 그 시간 동안 이 책이 견딜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주변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책이 교과서들이었다면, 이 책이 유일한 시네필 입문서였다는 점에서 저는 이 책이 갖는 매우 독특한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네필들에게 교과서를 보고 영화의 사랑을 일깨우라고 말하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단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과 SNS가 없었던 시절에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심지어 시네필이라는 단어가 ‘수입’되기도 전의 시네필들, 그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서 거의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외로운 시네필들이 아아, 한반도에도 나와 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 있구나,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나에게는 시네필 선배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닐까, 라는 연대감이랄까 공감의 공명이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홍준_ 그렇다면 시네필 커밍아웃을 한 책인 건가....(웃음)
정성일_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대한민국 시네필의 영년(零年, zero year)이라는 자리, 그 시간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홍준_ 그 말을 들으니, 자생적 공산주의라는 말이 있었듯 일종의 자생적 시네필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군요(웃음). 시네마테크가 있어서 선배들이 야, 저기 가서 영화 좀 봐라, 해서 가 봤더니 비슷한 동료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책을 쓸 때 영화판에 들어와 있는 조감독이었다거나 영화비평을 하고 있는 평론가였던 것도 아니고, 정말 영화계와는 공식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아마추어이자 시네필이었습니다. 이 책을 쓰고 나서 충무로에 들어갔던 것이지, 영화 현장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이 책의 바닥에 깔린 목소리는, 위에서 옆에서 간섭을 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영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이 책을 쓸 때와 가장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때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 일을 할 때였습니다. 나는 프로그래머의 여러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고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가져야 할 태도는, 내가 어떤 영화를 보자마자 그 영화가 너무 좋아서 흥분한 상태로 돌아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친구를 흔들며 방금 어떤 영화를 보고 왔는데 그 영화 죽인다고, 그러니 그 영화를 보러 가라고 설득하면서 막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책도 그런 의미에서 소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방금 깨달은 건데, 이 책이 아직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갈급한데, 그걸 채워줄 길이 없었고, 기존의 영화 잡지도 없었고, 「로드쇼」「스크린」이 있었지만 팬덤 잡지에 가까웠고, 종이 매체들도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디 가서 자랑하는 게 있는데, 왕가위의 <
열혈남아>(1988) 한글리뷰를 처음 썼다는 것입니다. (웃음) 이런 것이 ‘도시에’가 했던 일이고. 나는 단순히 정보가 부족했던 시절에 나름대로 정보를 집약했던 책이라 사람들이 좋아했나 보다, 그리고 지금은 낡은 정보이고 틀린 정보도 있을 수 있고, 손쉽게 정보를 구할 수 있으니 시효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정성일 평론가가 말한 그 점에 있어서처럼 시네필의 목소리로, 그래서 시네필의 정체성을 드러낸 채로, 친구에게 동료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느낌을 사람들이 받을 수 있다면,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이 책에 거짓말과 틀린 정보가 있더라도 적어도 이 책을 쓴 저자의 태도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니까.
정성일_ 이 책이 처음에 열렬히 받아들여지고 긴 시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은 정보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책을 읽는 동안 전달되었던 태도와 감정적인 공감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2016년에 와서 보면 이 책에 있는 많은 정보는 교양이 되었습니다. 1995년 「키노」를 처음 만들면서 독자엽서를 받았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미장센이란 무엇인가요’ 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미장센’ 샴푸가 나오더라구요(웃음). 그런 이후에도 이 책은 여전히 살아남았습니다. 이 질문이 어쩔 수 없이 뒤따라 쫓아 나오는데, 25년의 시간이면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개정판이 나오기 충분한 시간인데, 심지어 2편이 나올 수도 있는 시간이었을 텐데, 이 책의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홍준_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까 이야기했던 것과 겹치는데, 쉽게 말해 구회영은 김홍준이 아닌 것입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낸 후로, 내가 영화계로 나간 후로는 구회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때도 말할 수는 있었는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인데(웃음),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나 혼자 쓴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책은 구회영이 쓴 거로 되어있는데 로드쇼에 연재된 ‘도시에’는 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구회영, 김주현, 오윤평. 그래서 한때 이 세 사람에 대한 루머가 누구다, 라는 말이 돌곤 했는데 (웃음) 그런데 내가 지금 생각해봐도, 그게 한 달에 원고지 150매 분량이었습니다. 도비라(특집의 표지) 빼고 10개 꼭지(items), 꼭지마다 들어가는 박스 기사까지.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그걸 한 명이 매달 써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원고 매수였습니다. 학교를 다닌다든가, 다른 직업이 있다든가 그랬다면(웃음)... 완전히 먹고 자고 사우나 가고 ‘도시에’만 쓴 일 년이었습니다. 이쯤에서 플래시백으로 가보십니다(웃음). “그럼 ‘도시에’, 어떻게 쓰여졌나. 세상에 나오기까지” 자 일단, 첫 회는 생략하고 두 번째 회부터. 로드쇼가 서점에 깔리고 나서 반응이 오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이 “이번 달 ‘도시에’ 좋았어요”, “미장센이 뭔가요” 등등의 엽서가 도착합니다.
「로드쇼」의 도시에(dossier) 지면
정성일_ 인서트를 하자면, 당시 구회영 필자는 편집부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독자엽서 다 가지고 와보죠”, 이러고는 ‘도시에’에 대한 엽서만 읽었습니다(웃음).
김홍준_ 「로드쇼」사무실이 홍대 앞에 있었는데, 그때 거기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심지어 사장은 나를 직원인 줄 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늘 책상에 앉아있으니까. 일단 책이 나오면 일주일은 휴식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달 ‘도시에’를 뭘 쓸까를 고민하는 건데, 그때 정성일 편집장과 계속 대화를 했습니다. 반응이 어떻고, 요즘 영화가 어떻게 돌아가고, 다음 달이 칸 영화제인데 올해는 코엔이 받을 것 같다는 둥(<
바톤 핑크>), 데이빗 린치가 받을 것 같다는 둥(<
광란의 사랑>), 그러면서 거의 다 맞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우리가 예상한 게 거의 다 맞았어요.
정성일_ 아, 맞아요, 그랬죠(웃음).
김홍준_ 그래서 일주일간은 지난 한 달간 도시에를 쓰면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하면서 다음 달 아이템을 고민합니다. 그 일주일이 지나면 정성일 편집장과 아이템을 정합니다. 이를테면 ‘이번에는 80년대 할리우드를 다뤄보자’,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난 ‘도시에’를 모두 원고지에 썼었습니다. 원고를 쓰려면 자료가 필요한데,「로드쇼」에 「카이에 뒤 시네마」「사이트 앤 사운드」「필름 코멘트」등이 매달 도착했습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영어는 어느 정도 됐고, 불어도 사전 찾아가며 읽을 수 있는 정도였는데, 일본어까지 알았다면 읽을 게 너무 많아서 ‘도시에’를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드쇼」에 있는 영어와 불어로 된 자료를 모두 읽는데 열흘이 걸리고, 그다음 열흘 동안 쓰는 겁니다. 그런데 그 쓰는 방식이 다 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어떤 꼭지는 150매를 한 자리에서 다 쓰고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책에 있는 열두 꼭지는 제작방식이 다 다른 단편영화라고 봐도 됩니다. 어떤 것은 잘 풀려서 자료 정리 수준으로 빨리빨리 써서 띵까띵까 했던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끝내 안 풀려서..(잠시 생각) ‘제3세계 영화’ 같은 꼭지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일단 자료가 없었으니까요. 외국에서는 책을 내는 데 편집자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라는 말을 그 전에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편집자가 다 간섭하고, 의심나면 빨간 줄을 긋고,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예술을 간섭하는 건 아니지 않나 했는데, 「로드쇼」의 ‘도시에’는 책으로 나오기 전 잡지에서, 편집자와 작가가 한국에서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가장 이상적인 의미로 서로의 입장에서 최선의 것을 뽑아내는 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주제를 감당할 수 있을까 했을 때 편집자가 끄집어내주고, 반면 잡지쟁이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던 편집자가 가지지 못했던 감각, 혹은 아까 말한 시네필적인 순수함을 편집자에게 보호받으면서 쓸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드쇼」는 정신 분열적인 잡지였습니다. (웃음) 표지에는 유덕화가 나오면서 속에는 누리끼리한 종이로 ‘도시에’ 라는 제목아래 ‘제3세계’, <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칠레 전투>의) 파트리시오 구스만, 이게 도대체 뭐야(웃음). 그래서 이 글은 편집자와 나의 공저입니다.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편집자는 편집자의 역할을 했고 필자는 필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성일이라는 편집자와 그 당시 ‘도시에’를 썼던 그런 식의 관계와 작업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이 작업은 내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구회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조건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못한 것입니다.
정성일_ 쓰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특집은 무엇이었습니까?
김홍준_ 물어보나마나 ‘홍콩영화’입니다. (웃음) 첫 ‘도시에’이기도 했고.
정성일_ 만일 개정증보판이 나온다면 남겨져야 할 것 중에서 가장 먼저 2016년 버전으로 다시 쓰고 싶은 챕터는 무엇입니까?
김홍준_ 우선 빼고 싶은 것을 말하자면, ‘할리우드’에 대한 두 챕터입니다. 이건 통째로 빠지거나, 아니면 90년대 이후로 더 쓰여 시리즈로 가거나. 그게 아니라 다시 쓰는 거라면, 그건 원본을 보존하고 남겨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거니까. 1번 ‘영화용어’는 워낙 일반적이고 굉장히 핵심적인 이야기들이라 영화가 존재하는 한 크게 만질 것 없을 것 같고, 2번 ‘영화의 역사’는 역사니까, 여기서 기록된 80년 이후가 첨가되면 첨가되겠지만 크게 바뀔 건 없다. 어려운 질문인데... (한참 생각 후) 3번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를 다시 쓰고 싶습니다. 자비에 돌란 같은 감독들을 포함해서 새롭게 더 공부를 해서 써보고 싶습니다. 사실 지금은 영화감독을 발견하는 것도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화경력이 20년에 가까웠던 키에슬로프스키가 <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으로 비로소 주목받았는데. 그런 시절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기획사들이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아이돌 연습생으로 키우듯, 영화제들이 완성된 영화를 기다리는 수준이 아니라 탤런트 캠퍼스를 만들어서 끌어들이고, 거기서 점점 내려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사육된다고 할까, 물론 나쁘게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영화학교에서 만든 단편영화가 단편영화제에 나가는 순간 이미 그들의 레이더에 걸리는 시대가 되어버렸달까요.
정성일_ 사실 저는 다시 써야 할 수정 버전에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오히려 첫 장으로 배치한 ‘영화용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쓰던 시절은 영화를 필름으로 찍던 시절이었고 우리들에게 디지털 영화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지난 25년간 영화의 가장 큰 변화라면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이행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행을 지켜보면서 한 명의 감독으로서, 한 명의 영화선생으로서, 한 시절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필름 시대에 시작한 시네필로서, 디지털 영화 시대의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면, 어떤 것들을 더 첨언하고 싶지 않을까, 했습니다. 필름의 많은 것들이 남겨져 있지만 동시에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새로이 첨언하거나 수정해야 할 항목들이 생겨나지 않았습니가?
김홍준_ (잠시 생각)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우리가 오늘날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존속될 것입니다. 영화라는 것도 예전 동굴 벽화에서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듯이. 우리 세대가 몰랐던 것은, 마치 르네상스의 프레스코가 그랬고, 건판사진이 그랬듯, 알고 보니 영화 말고 ‘필름’이란 것은 단기간 존재하는 포맷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철썩 같이 뻗어 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적어도 물리적 재료로서의 필름은 단기간 존재하는 포맷이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10여 년 전에 동경 FIAF 총회에 다녀왔었는데, 당시 주제는 단명한 필름 포맷(short-lived film format)이었습니다. 각 나라의 연구자들이 한때 존재했다 없어졌던 포맷을 발표했는데, 일본에서는 9.5mm 필름을 소개했습니다. 이는 무성영화 시절, 그러니까 비디오가 없던 시절이니 1시간 반짜리 35mm 필름의 장편영화를 9.5mm 필름으로 만들면서, 10분짜리 축약본으로 제작해 개인적으로 소장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보고, 아버지가 변사를 했던, 그렇게 집에서 틀어서 봤던, 지금 짤막짤막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들은 그런 게 많다고 합니다. 원본 영화는 사라졌는데, 가정용 축약본은 남아있는 그런 단명한 포맷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길게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필름이 그런 겁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필름으로 찍고 코닥을 살려야 한다는 운동도 있고, 필름의 장점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이 벌어지는 자체가 오늘날에도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디지털을 기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각 매체의 진화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화를 오해하지 말 것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방향으로 바뀐다는 의미의 진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것, 영화 속에 필름과 디지털이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분화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필름으로 상영하건 디지털로 상영하건 극장에서 보고 극장 개봉이 끝나면 집에서 혼자 보거나 소장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닌, 지금의 YouTube로 대변되는, 말하자면 랜덤 억세스(random access)가 되는, 전체를 볼 수도 있고 부분을 볼 수도 있는, 쌍방이 소통할 수 있는. 디지털과 무관하게 영화라는 것이 아직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것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0년 후 영화박물관에서는 영화에 대한 것을 소장하고 전시를 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거기 가면 옛날 방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똑같은 영화를 필름 프린트로 본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시 거기서도 디지털로 상영하긴 하나, 그 시기에는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본다는 그 경험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보는 방식까지도 영화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나의 생각입니다. 디지털은 사회문화적인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생산되고 소비되고 관객과 만나는 이러한 시스템 자체를 진화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지, 단순히 필름과 디지털을 테크놀로지의 차이로 보는 것은 착시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얼마 전에 코닥이 수퍼 8 필름을 다시 내놓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영사기와 카메라들까지 시리즈로 내놓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벌써 부자들의 호사스러운 취미용이라는 비난도 들리고 있습니다.
표1: 영화 100선 중 상위 10편의 영화
정성일_ 다음 장으로 넘어가볼까요. (웃음)「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 갖는 시대적인 한계 안에서 반대로 동시대적인 통찰력(contemporary insight)라고 할까요. 아마 그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100선의 챕터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1990년에 뽑은 영화사상 베스트 10 목록과 2012년 영국 영화잡지「사이트 앤 사운드」가 전 세계의 평론가들에게 앙케이트 한 베스트 10 목록을 비교해보았습니다. 긴장되죠? (웃음) 구회영 버전에서는 1위 <
시민 케인>(1941), 2위 <
잔 다르크의 수난>(1928,) 3위 <
전함 포템킨>(1925), 4위 <
수색자>(1956), 5위 <
대지>(1930), 6위 <
게임의 규칙>(1939), 7위 <칠레 전투>(1975~79,) 8위 <
거미집의 성>(1957), 9위 <
현기증>(1958), 10위 <
비정성시>(1989) 였습니다. 가장 놀라운 건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는 1위가 <
현기증>입니다. 사실 <현기증>이 <시민 케인>을 제치고 1위로 올라온 것이 2012년이 처음이었고, 10위 안에 들어온 것도 2002년이 처음이었습니다.
김홍준_ (다소 흥분한 어조로) 그러니까 우리가 이보다도 10년 전에 먼저 한 것입니다.
정성일_ 2위가 <
시민 케인>, 3위 <
동경 이야기>(1953), 4위 <
게임의 규칙>, 5위 <
선라이즈>(1927), 6위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7위 <
수색자>(1956), 8위 <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 9위 <
잔 다르크의 수난>, 10위 <
8과 1/2>(1963)이었습니다. (10위 안에 없는) <
동경 이야기>는 구회영의 목록에서는 13위에 랭크되어 있고,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15위에, <8과 1/2>은 32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목록이 이미...
김홍준_ 신들린 목록이구만. (웃음)
정성일_ (웃음) 다소 거만하게 말하자면 이미 25년전에 ‘컨템포러리’한 목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2016년 버전으로 이 목록을 만든다면 어떤 영화가 베스트 1이 될 수 있을까요?
김홍준_ 대세로 간다면 <
현기증>이여야겠지만, (한참 생각한 후) 지금이라면 <
동경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정성일_ 그 영화가 1위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김홍준_ <
시민 케인>을 1위로 뽑았던 30대 중반의, 아직 직업적 영화인 전의 시네필이었던 어떤 사람이 25년의 세월 동안에 영화를 직업으로 택했고, 운이 좋아서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 속에서 영화에 대한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25년 후 리스트를 다시 볼 때, 그 사이에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또 영화에 대한 생각과 태도,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면, 25년 전에는 <시민 케인>인데, 지금은 <
동경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린 거죠. (잠시 생각) 이렇게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 대해서는 각자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갑이 되더니 정신을 차렸나 보다, 복고적인 가족주의로 회귀하는 수구파가 됐나 보다 등등. (웃음)
표2: 1980년대 영화 10편
정성일_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목록을 연대별로 다시 정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도 80년대 영화 100편을 뽑기도 했죠
김홍준_ 그때가 제일 신나고 재미있었죠!
정성일_ 그래서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2012년에 평론가들이 뽑은 80년대 영화들과 80년대가 막 지난 일 년 후 1990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뽑은 목록을 다시 비교해보았습니다. 이쪽이 훨씬 흥미롭습니다. (웃음)
김홍준_ 여기엔 전제가 있습니다. 이게 구회영이니까 가능했던 것이 여기 있는 80년대 100편 중 80퍼센트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이었습니다. 내가 예술전용관도 있었던 필라델피아에서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80년대부터 아트하우스 영화들이 미국에서 비디오로 출시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빔 벤더스의 초기작이니 파스빈더 영화들이니 하는 이런 영화들을 내가 보고 와서 이 목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도 당시에 자막이 없는 영화를 보고 나중에 다시 보고 아, 이런 이야기였구나, 이런 창피한 비화도 있습니다.(웃음)
정성일_ 당시 구회영이 뽑았던 80년대 100편의 1위는 <
비정성시>...
김홍준_ 그 작품에 대해서는 현재도 이의가 없습니다.
정성일_ 2위가 <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1989), 3위 <
나쁜 피>(1986), 4위 <
성난 황소>(1980), 5위 <
집시의 시간>(1989), 6위 <
쇼아>(1985), 7위 <
베를린 천사의 시>(1987), 8위 <
메이트원>(1987), 9위 <
똑바로 살아라>(1989), 10위 <
희생>(1986).
김홍준_ 리스트를 듣는데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 (웃음)
정성일_ 「사이트 앤 사운드」가 뽑은 목록은 1위가 <
쇼아>, 2위 <
성난 황소>, 3위가 공동순위 3편입니다. <
블레이드 러너>(1982), <
태양 없이>(1983), <
블루 벨벳>(1986). 6위 <
화니와 알렉산더>(1982), 7위 <
비정성시>, 8위가 공동 순위 두 편입니다. <
돈>(1983)과 <
똑바로 살아라>. 10위가 공동 순위 5편인데 <
컴 앤 씨>(1985), <
먼 목소리, 정지된 삶>(1988), <
이웃집 토토로>(1988),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
샤이닝>(1980)입니다. 이 목록이 구회영의 100편 안에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12위, <컴 앤 씨>가 20위, <블레이드 러너>가 17위, <블루 벨벳>가 31위, <태양 없이>가 36위, <화니와 알렉산더>가 46위, 브레송의 <돈>이 86위, <먼 목소리, 정지된 삶>이 96위, <샤이닝>이 97위입니다.「사이트 앤 사운드」가 뽑은 14편 중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 단 한 편만 빠졌습니다. 80년대가 끝난 지 일 년 후, 1990년에 뽑은 100편 안에, 22년 후에 뽑을 목록의 14편 중 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다 목록에 있었다는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동시대성의 안목’이라고 믿습니다. 원래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지금도 1위는 <비정성시>라고 이야기했으니, 남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지금 다시 80년대 영화를 뽑는다면 열편 중에서 빼고 싶은 영화는 무엇입니까?
김홍준_ 카네프스키의 <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
정성일_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홍준_ 당시 소련영화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그것이 나쁜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을 당시에는 못 봤던 것 같습니다. 감독의 이후 행보가 역설적으로 증명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10편중에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 영화는 그 영화인 것 같습니다. 다른 영화들은 시간의 흐름을 견디거나 가치가 올라간 면이 있는 반면에...
표3: 김홍준의 21세기 영화 10편
정성일_ 21세기 영화 10편을 부탁했습니다. 이 열편은 어떤 기준으로 뽑았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건 평가의 척도가 아닌 맥락입니다.
김홍준_ 목록은 제작연도순입니다. 내가 이 영화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에 어느 정도까지 매혹되었는지, 그 매혹이 기준입니다. 영화는 물론 복제된 것이지만 누구와 봤는지, 어디에서 봤는지, 언제 봤는지, 내가 어떤 상태에서 봤는지, 실연당한 직후에 <
나쁜 피>를 볼 때와 한참 사랑에 빠질 때 <나쁜 피>를 볼 때 전혀 다른 영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2000년대에는 내가 이미 직업 영화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영화를 볼 때, 어떤 영화는 프로그래머로서 만났고, 어떤 때는 시네필로 만났고, 어떤 때는 교수로서 만났고. 하지만 이 목록은 나의 자리와 무관하게, 말 그대로 보는 순간 나를 시네필의 자리로 돌려보낸 영화들입니다. 그냥 영화에 빠지고 매혹되고, 그냥 너무 좋았던 영화들입니다. 그러니까 더 찾으면 더 있을 것입니다. 우선 떠오르는 대로 10편을 찾아본 것입니다. 때로는 매혹이란 것이 끝난 후에는 뒤끝이 찝찝할 때도 있고, 때로는 당장 그 당시에는 어리둥절하지만 다시 볼 때 아,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그런 영화가 있었고. 말 그대로 척도가 아닌 영화를 보는 맥락과 적어도 그 순간에 영화를 보는 나를 매혹시켰던 영화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본다고 해서 그 매혹이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뽑은 건 어제 뽑았지만, 그 기준은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봤던 그 순간의 매혹입니다. 가령 <
엘리펀트>를 처음 본 것은 로테르담 영화제에서였는데, 이미 그때 칸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름은 알려져 있었지만 못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로테르담에 가서 이렇게 유명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약간의 직무유기지만 너무 궁금해서, 그리고 본 다음에는 아, 이런 거였구나. 전혀 내가 생각했던 영화와 다르구나,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정성일_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12개의 챕터 중에서 한 사람의 감독에게 바친 것은…
김홍준_ 빔 벤더스.
정성일_ 네, 빔 벤더스입니다. 사실 벤더스에 대한 사랑은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하구나, 라고 생각한 건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2016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빔 벤더스의 <이 세상 끝까지>를 추천한 것을 보고 일편단심에 약간 감동을 받았습니다. (웃음) (영화제에서는 <
이 세상 끝까지>의 수급이 어려워 <패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으로 대체하였다.)
김홍준_ 고백하자면, 벤더스의 영화는 2000년 이후의 영화들은 보지 않습니다. 안 보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웃음)
정성일_ 물론 빔 벤더스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가장 눈 밝은 비평가일 세르주 다네와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구 정 반대편에서 가장 기대하는 영화감독으로 주목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거의 모든 영화 비평가들, 혹은 영화제들, 시네필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렸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발견했다고 그렇게 자랑하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흑역사인 셈인데(웃음), 김홍준에게 빔 벤더스는 어떤 감독입니까?
김홍준_ 간단합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실제 만나본 감독입니다. 약간 과장하자면 감독도 살아있는 사람이구나, 를 알게 해준 감독이랄까, 그전까지 난 감독이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고 뭔가 신과 같은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감히 인간이 영화를 만들 수 있나 싶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건 아니고 멀리 있는 빔 벤더스에게 손을 들어 질문을 한 것이었지만. (웃음)
정성일_ 그 후 어느 지점까지는 계속 벤더스 영화에 관심을 갖고 본 셈이군요.
김홍준_ 계속 감탄을 금치 못하고 봤습니다.
빔 벤더스
정성일_ 빔 벤더스의 어떤 면이 김홍준을 매혹시켰습니까?
김홍준_ 일단 나이로 치면 11살 차이가 나는데, (웃음) 벤더스가 유년기를 보냈던 곳이 50년대의 분단 독일이었습니다. 벤더스라는 내성적이고 머리는 좋고, 의대 들어갔다가 때려치우고 오직 영화를 보러 파리에 간, 그리고 열심히 록큰롤을 듣던 청년. 벤더스가 50년대 록큰롤을 들을 때 난 딱 10년 후에 태어나서 60년대 한국에서 팝송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벤더스가 의대 공부를 때려치우고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죽치고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을 때, 그때 벤더스는 일 년에 천편을 봤다고 합니다, 그때 난 서울대를 가서 8mm 카메라를 들고, 과외로 번 돈을 열심히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뭐랄까, 이상한 평행의 간극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거장과 나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래서 급(急) 친밀함을 느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웃음) 내가 벤더스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이 <
도시의 알리스>였는데, 뭐랄까 나를 보라고 만든 영화인가, 이거 내가 만든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유럽 여행을 갔었는데, 바쁜 투어 일정 중에 <도시의 알리스>에 나오는 모노레일을 코스에 넣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모노레일을 탔는데 좋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그의 초기작을 볼 때 테크니션이나 프로페셔널로서가 아니라 시네필로서 영화 만들기라는 것이 첫 영화부터 느껴졌습니다. <패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1972), <도시의 알리스>(1974), <
빗나간 동작>(1974), <
시간이 흐르면>(1976), <
미국인 친구>(1977), <룸 666>(1982), <물 위의 번개>(1980), <
도쿄가>(1985)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벤더스의 영화입니다. <
파리 텍사스>(1984)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벤더스의 영화가 아닙니다.
정성일_ 만약 2016년 개정판을 만든다면 벤더스의 자리에 누구를 넣고 싶습니까?
김홍준_ 너무 진부해서 말하면 화낼 것 같은데, 한 번 맞혀본다면?
정성일_ 허우 샤오시엔?
김홍준_ 허우 샤오시엔입니다. <
자객 섭은낭>(2015)을 본 순간,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에드워드 양. 어쩌면 100년 뒤의 사람들은 허우 샤오시엔 보다는 에드워드 양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정성일_ 저는 이미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크라이테리언 출시)
김홍준_ 이번 크라이테리언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블루레이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까? 난 21세기 크라이테리언 최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지구상에 다 합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근데 이제는 이론적으로 수십 수백만이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또 하나, 벤더스를 쓸 수 있었던 조건 중 하나가 벤더스를 사심 없이, 편견 없이 그 사람이 거장이기 전에 우연찮게 내가 꼬마였을 때 봤던 행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
장미빛 인생>(1994)을 찍고 그 영화가 영화제에 불려갈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기술 시사 때 우연히 토니 레인즈가 보고 밴쿠버 영화제에 초청했습니다. 그해 밴쿠버에 대만 감독웰옘섯?초청받았습니다.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우닌지엔. 각각 <독립시대>(1994), <
애정만세>(1994) 그리고 <다상>(1994)을 들고 왔습니다. 난 그때 그 우닌지엔이 <
비정성시>의 (각본을 쓴) 오념진인 줄도 몰랐습니다. 거기서 에드워드 양을 처음 만났었는데, 형처럼 너무 잘해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낭뜨에 초청을 받아서 갔더니 거기에도 그 팀들이 또 와있었습니다. 그 후에 칸에서도 보고. 에드워드 양에 대해 생각하면 그래서인지 많이 애틋합니다. 에드워드 양은 나를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
춘향뎐>(2000)을 가지고 텔루라이드 영화제에 갔었을 때 에드워드 양은 <
하나 그리고 둘>(2000)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이 영화를 나와 임권택 감독님이 같이 봤는데, 영화가 너무 길고 영어자막밖에 없어서 혹시 감독님이 지루해하시는 건 아닌가했는데, 영화를 보시더니 “잘 만들었구만” 하시더니 “감독이 어디 있나” 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런 추억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에드워드 양... 아아, 허우 샤오시엔 취소! 에드워드 양은 또 딱 7편입니다. (웃음)
정성일_ 이 책을 읽다가 느껴지는 또 하나의 쓸쓸함 중 하나는 영화가 시간 안에서 얼마나 연약한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들, 감독들이 25년이 지난 후에, 심지어 어떤 감독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이 책을 들쳐보면서 아, 그때는 참 주목받았었지, 이런 이름들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제목들이 문득, 아 그때 그런 영화가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구회영에게 이 책을 쓸 때로부터 객관적으로나 마음속으로 가장 추락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꼭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김홍준_ 거기까지 깊게 생각은 안 해 봤습니다.
정성일_ 나에게 있어… 이 책이 열광하고 있는 이름 중에 가장 극적으로 추락한 사람은 첸 카이거였습니다.
김홍준_ 아, 근데 첸 카이거는 이미 그때부터 조짐은 있었습니다.
정성일_ 그래도 1990년까지는…
김홍준_ (잠시 생각) 첸 카이거, 그렇죠. 기대치에 비해서. 그리고 어떤 감독은 우리가 오해했구나, 원래부터 아니었구나 싶은데, 첸 카이거는 원래부터 아니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뭐가 그렇게 그 사람을 망가뜨렸을까 라는 점에서 좋은 예가 될 것 같아요.
정성일_ 또 다른 의미에서 오해했던 사람이 뤽 베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학적인 뭔가를 블록버스터와 연결시키면서 뭐랄까, 프랑스의 스필버그 같은 감독이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지경이 될 줄이야...
김홍준_ 프랑스의 하비 와인스타인이 된 거지.(웃음) 그때는 <
니키타>(1990)가 워낙 좋았으니까. 뤽 베송을 더 주목했던 것에 비해, 장 자끄 베넥스를 좀 우습게 봤던 것 같아요. 지금 보면 오히려 베넥스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뤽 베송은 그냥 장사꾼이었던 거죠.
정성일_ 이 책이 쓸 즈음에 우리에게 가장 운이 나빴던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슬럼프였던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김홍준_ 아, 맞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죠. 반면 이 책에서 예언처럼 주목했던 미국의 인디작가들은 거의 100 퍼센트 성공했습니다. (웃음)
정성일_ 대표적으로 코엔 형제가 있죠
김홍준_ 그때는 감독으로서 애였죠! 완전!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
밀러스 크로싱>을 찍고 있었으니까.
정성일_ ‘도시에’를 쓸 당시 코엔형제의 이름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이 열렬하게 지지했음에도 시간을 못 견딘 또 하나의 사람은 스파이크 리인 것 같습니다.
김홍준_ 근데 스파이크 리는 문화 현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
똑바로 살아라>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컬드영화 10계명(「로드쇼」 도시에)
정성일_ 이 책에서 한편 가장 견디지 못한 챕터 중의 하나가 컬트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부른 챕터가 또 컬트영화였습니다.
김홍준_ 뜨거웠죠! 지금도 기억나는 게 독자엽서에 이달에 가장 좋았던 기사, 이런 게 있었는데 그 달에는 압도적으로 컬트영화에 대한 거였습니다. 다들 이 영화가 컬트영화야, 이러면서도 막상 그게 뭔지 물어보면 아무도 몰랐던, 그런 시절에 이 책이 ‘십계명’ 이러니까... (웃음)
정성일_ 한편으로 컬트영화라는 현상이 한국에서 가능했던 까닭은 정확하게 그 시기에 마치 신흥종교처럼 번져나갔던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 특집은 제 시간에 도착했다 할까요. 하지만 인터넷이 시작되고, 온갖 경로를 통해 한국에서 온갖 영화를 볼 수 있는 관람환경이 만들어지자 토렌트나 YouTube를 통해 접하지 못하는 영화가 없어지다 보니까 컬트영화라는 현상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화현상이라는 측면에서 그 당시의 기이하고 특별한 컬트영화라는 현상이 있었다면 지금 이 세기에는 어떤 현상이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홍준_ (단호하게) 일단 영화학교에 시네필이 없습니다.
정성일_ 그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김홍준_ 가장 기이한 현상은 영화학교에 다니면서 본인이 시네필이라는 것 때문에 굉장히 고민하고 고생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마이너리티들. 얘네들이 구축하고 있는 독특한 세계가 있는데 굉장히 기이해요.
정성일_ 영화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학생은 어떻게 하다가 영화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궁금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영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보는 것도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화 수업 시간에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보라고 하면 너무 괴로워할 때 사실 당황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영화를 만드는 것과 영화를 보는 행위가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할까요.
김홍준_ 영화과 학생들의 새로운 경향은 YouTube에서 명장면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유튜브에 대해 명대사를 날린 적이 있어요. (웃음) 요즘 학생들에게 <
펄프 픽션>(1994) 봤냐고 하면 “어떤 장면이요?” 라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도입부에 이런저런 장면이 있잖아, 라고 설명하면 “YouTube에서 봤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우리 시대는 영화를 문화원에서 봤고, 하다못해 DVD로 빌려서라도 봤는데, 요즘 영화캠프 등에 다녀온 영화에 관심 있는 어린 친구들은 그냥 검색으로 시작해서 검색으로 끝냅니다. YouTube에서 ‘펄프 픽션’을 검색하면 주르륵 짤막한 ‘유명 장면’ 동영상이 나옵니다. 그것만 보는 겁니다. 영화를 본 것도 안 본 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거죠. 결국은 자기가 좋아하는 이미지만 취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 내가 하도 딱해서 한마디 했어요. “인생을 YouTube로 채우지 마라.”
정성일_ 영화를 찍는 것만이 관심이고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김홍준_ 가령 내가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좋아하는데, 남의 도자기를 보러 가는 것은 싫어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학생들 중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랄까, 그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건 그들 자신이 굉장히 파편화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영화학교의 시네필들은) 자기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방식이 동시대의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는데, 오히려 나나 정성일을 보면서 자기들은 선배의 시대에 더 맞는 것이라 생각하는 거죠. 영화학교 안에서조차 굉장히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각 대학에 있는 운동권 학생들과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할까요. 애들이 걔들을 비웃진 않습니다. 굉장히 진지하니까. 하지만 이상한 취급을 하고 약간은 웃음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영화를 보기 위해서 서울아트시네마를 쫓아다니고, 이런 게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린 거죠. 이런 건 꼰대들이나 하는 구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좋은데 남들은 나를 왜 구리다고 할까. 그것도 같이 영화 공부하는 동료들이. 영화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하여튼 내 입장에서는 이게 몹시 기이하게 보입니다.
정성일_ 우리의 이야기가 끝이 안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관점 중의 하나는 시네필로서 드물게 영화기술 변화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입니다. 영화 바깥에 있다가 그런 다음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며, 또 영화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그렇게 지난 25년을 지켜보면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영화기술의 등장은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디지털, 이렇게 대답하는 대신 그 무언가를 주목했고 그것이 등장했을 때 그건 하나의 특집이었다, 라는 혁신이 있습니까?
김홍준_ 최근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를 허무는 테크놀로지, 하이-테크놀로지와 로-테크놀로지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현상입니다. 그 중에서 내게는 드론이 그렇습니다. YouTube만 들어가도 드론으로 찍은 별별 영상이 다 있습니다. 얼마 전 세그웨이 동호회가 자신들의 정모로 미사리 가는 걸 드론으로 찍은 걸 봤는데 말 그대로 ‘끝내준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예전에 항공촬영이란 것은 영화 선진국에서의 특권이었습니다. 내가 <
정글스토리>(1996)의 첫 장면을 헬기로 찍을 때 농약 뿌리는 헬기에 카메라 달고 어떻게 하면 안 흔들리게 찍을까 고민했는데, 이젠 그런 걸 드론에 고프로 카메라 달고 찍으면 되는 겁니다. 지금은 <
샤이닝>의 도입부를 아무나 다 찍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냐, 고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치콕이 자랑하던, 혹은 <
악의 손길>(1958)의 도입부처럼 너네 이런 거 할 줄 알아? 하던 마지막 보루가 항공촬영이었습니다. 드론이 나오면서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입니다. 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면 관객들이 아직 혹하니까 쓰는데, 이제 좀 있으면 관객들이 지루해할 거예요. 도 닦는 티벳 승려가 산속에 있는 우리 절의 모습을 알리기 위해 드론을 구해서 찍어 YouTube에 올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젠 테크놀로지는 아무도 독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악한 타란티노가 그것을 수퍼 파나비전 70mm로 찍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
헤이트풀 8>(2015)을 찍어서 이벤트화 하는 것입니다. 그 줄거리에 블랙을 더 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한 편의 소동극인데. 70mm로 찍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영화 외적으로, 이런 건 아직 너네들이 흉내 내지 못할 테크놀로지다, 라고 내세울 수밖에 없게끔, 거기까지 지금 몰려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영화 공부하는 학생들은 YouTube로 인생을 채우고 있고. 그러니까 약간 탄식하듯이 말하자면 우리가 알던 영화의 시대는 끝난 것입니다.
정성일_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은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될까요?
김홍준_ 이 자리에 오면서 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새로운 매체로 다시 표현하거나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지 않을까. 5년 후, 그러니까 2021년 8월에 학교에서 은퇴를 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 책이 나온 지 정확히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약간 멋대로 상상을 해보고 싶어집니다. 내 생일, 8월 4일에 개국하는 거로 해봅시다. 그때는 YouTube도 없어질지 모르고 SNS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뭔가 다른 것이 대체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로썬 팟 캐스트겠지만, 이 이야기를 현재에 멈춰 서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5년 후의 가장 적합한 매체로「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2편을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그러기위해서는 편집장으로서 정성일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웃음)
인터뷰_ 2016년 1월 13일 날씨 흐리다가 갑자기 눈이 내림
참석자_
김홍준(영상원교수, 영화감독)
정성일(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진행_ 유성관, 김홍윤
사진_ 김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