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좋은 일, 나쁜 일, 새로운 일

by.장건재(영화감독) 2012-12-31조회 3,435

이 글은 파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고도 32,000피트의 비행기 안에서 (때로는 파리에서 낭트로, 또는 파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틈틈이)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새 영화 <잠 못 드는 밤>의 관객을 만나러 아르헨티나의 ‘마르 델 플라타’ 라는 도시로 향하는 길이다. 인천에서 파리까지 12시간을(샤를 드골 공항에서 10시간을 대기한 뒤),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13시간을 날아가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거기서 버스로 5-6시간을 더 가야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5박 6일의 일정인데, 2~3일을 비행기와 버스 안에서 보내는 셈이다(집에서 영화제 숙소까지 46시간이 걸렸다). 나는 여기서 일정을 마친 뒤, 프랑스 낭트3대륙영화제로 향할 예정이다(<잠 못 드는 밤>은 이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이 되었다!).

인천에서 탄 비행기의 옆 좌석에는 파올로라는 이탈리아인이 앉았는데, 밀라노에서 한국 전자제품의 마케팅 담당자로 일한다고 했다. 펠리니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반드시 가봐야 한다면서 이탈리아의 이곳저곳을 추천해주었다. 파리에서 갈아탄 비행기 안에는 아르헨티나로 연수를 떠나는 한국의 중·고등학교 축구 감독들이 한 무더기 타 있다. 활동적인 사람들이라 그런지 긴 비행이 무척 힘든 모양이다. 모두들 화장실 앞에 서서, 작전 회의라도 하듯이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는 중이다. 

집을 떠난 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 아내가 보고 싶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결혼할 즈음이었던가. 우리가 만든 영화가 해외에 소개가 된다면 꼭 함께 다니자고 약속을 했었다. 800CC 경차를 몰고 변산반도로 떠났던 신혼여행 길에서도-미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첫 장편영화 <회오리바람>을 완성한 뒤에 초청된 해외영화제에는 늘 같이 다니면서 일을 했다. 그 덕에 33살에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았고, 그 경험은 내게 강렬한 자극과 큰 공부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여름, <잠 못 드는 밤>으로 초청된 에든버러국제영화제를 끝으로 혼자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중이다. 

이렇게 쓰고 있자니, 한껏 자랑을 늘어놓은 여행기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다. 올 한 해는 이렇게, 좋았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폼 나게 마무리해 볼 생각이다. ‘그래, 올해도 나쁘지 않았어… 이 정도면 선방한 셈이야.’라고 자평하면서. 

힘든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잠 못 드는 밤>의 촬영이 끝난 뒤, 우리는 예기치 못한 나쁜 일들을 종종 겪었다. 그 중엔 감당하기 힘든 사고도 있었다. 며칠 동안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서로를 부여안고 (때로는 내가 아내 품에 안겨) 울었다. 그럴 땐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마치 우리의 고통을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어떤 일은 지혜를 필요로 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그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시간은 육중한 철근처럼 더디게 흘러갔지만, 결국 모두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 와중에 가까스로 영화를 완성했다. 아니 어쩌면 제 스스로 완성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있는 힘을 다해,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영화의 운명에 맡겼다. 그 뒤로는 이러저러한 운이 조금씩 따랐다. 마치 ‘영화의 신’이 강림한 것처럼. 

<잠 못 드는 밤>을 완성하고서 맨 처음,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당시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고, 나는 어찌 할 도리 없이 응급실 앞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제 담당자는 내가 너무 기쁜 나머지 울먹이면서 전화를 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기쁜 소식이었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아내는 살아나 주었다. 

(……) 어느덧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르헨티나 남동쪽의 해변 마을에서는 한국 사람들의 방문을 환영해주었고, 영화는 상영 때마다 매진이 되었다. 남미에 부는 K-Pop 열풍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한 관객은 내 손을 꼭 붙잡더니, 지금의 아내를 절대로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 여대생은 나를 보더니 ‘오빠!’라고 정확히 발음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차분하고 시네필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프랑스 낭뜨의 관객들도 따뜻한 호응으로 영화를 반겨주었다. 나는 종종 크리스마스 시장을 가로질러 상영관으로 갔는데, 그 때마다 뱅쇼라고 부르는 따뜻한 와인을 한 잔씩 사 마셨다. 그리고 서른다섯 번 째 생일이었던 영화제 마지막 날, <잠 못 드는 밤>은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받았다(대상은 왕빙의 다큐멘터리 <세 자매>에게 돌아갔다). 그 날 오전에 영화를 보러 오셨던 한 관객은 폐막식까지 찾아와 낭트의 특산품이라면서 곱게 포장한 선물을 건네고 가셨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저 마다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이러한 기억들은, 영화를 만들면서 얻은 상처와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다시 힘을 낼 것이다. 하지만…… 올 겨울은 좀 쉬고 싶다. 에든버러에서 생긴 아기를 임신한 아내와, 우리에게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해를 정리할 생각이다. 그렇게 조용히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그러니 당신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따뜻한 연말을 보내시길.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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