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자면, 대화 당사자들 이외의 청자를 반드시 요하는 대화(예컨대 공개토론회), 그러한 청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대화(삼삼오오 어울려 길을 걸으며 재잘거리는 이들부터 서로 고성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다투는 이들까지), 마지막으로 그러한 청자를 철저히 배제하는 사적인 대화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 모든 대화들을 담아낼 수 있지만, 일종의 ‘부재하는 청자’로서의 카메라/마이크가 대화당사자들의 묵인 하에 채록한 것 같은 인상 -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이러한 묵인의 인상이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도청이나 몰래카메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을 주는, 세 번째 범주의 대화 상황의 구성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매체다. 물론 이 사적인 대화는 그 내용에 따라 고백이나 약속 같은 친밀한 것으로부터 모의나 협박 등 적대적인 것까지 수준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화 상황의 특수성에 걸맞은 영화적 표현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유성영화가 탄생한 이래 감독들에게 부과된 중요한 과제다.
굳이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올해 몇몇 한국독립영화를 보면서 거기 묘사된 대화 상황이 지극히 단조롭고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데, 특히 많은 평자들로부터 상찬을 받은
윤성현의 <
파수꾼>은 내겐 오히려 리얼함이 과장된 적대적 대화나 그도 아니면 대화가 실패하는 상황이 교차되는 상황을 제법 기교를 부린 내러티브, 카메라워크 및 편집으로 눈가림한 좀 미숙한 영화처럼 보였다. (이와 유사한 인상을 주었던 독립영화로
윤종빈의 <
용서받지 못한 자>가 떠오른다.) 특히 또래 남녀학생들이 지하철 안에서, 길 위에서, 그리고 중국집에서 주고받는 대화 상황을 연출한 방식 - 아이들의 모습을 잘게 나눈 쇼트들로 분할해 보여주면서 음악만 얹어 뮤직비디오 풍의 장면을 만들거나, 대화의 전체 맥락을 그려내지도 않은 채 한 두 마디 말만 불분명하게 들려주고는 그에 반응해 웃는 광경만을 보여주는 TV드라마 같은 방식 - 을 보면, 과연 이 감독이 일부 평자들이 상찬한 대로 동시대 아이들의 초상을 제대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진다. 윤성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이 장면들은, 예컨대 앤드류 부잘스키나 알렉스 로스 페리 같은 미국독립영화계의 ‘멈블코어’(mumblecore) 작가들에게서라면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적 소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감독은 ‘파수꾼’이라는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가져온 것이라 했다지만 그는 J.D.샐린저가 <프래니와 주이>의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적대의 언어가 아니라면 대화 상황을 의미 있게 영화적으로 구성해내지 못하는 난점은 (개별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많은 다른 독립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내밀함을 요하는 대화 상황은 어쩐지 진부하고 낯간지러운 방식으로만 묘사되고, (홍상수의 영화나 부당하게 냉대 받은
배창호의 <
여행>같은 중견감독들의 ‘독립영화’, 그리고
노영석의 <
낮술>이나
윤성호의 영화 정도를 제외하면) 평범한 대화의 이면에서 혹은 그것을 굴절시켜 다양한 감정적 효과를 끌어내려는 연출의 사례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다수의 한국독립영화들이 장르적이기보다는 리얼리즘적이기를 - 혹은 적어도 장르의 리얼리즘을 - 추구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경묵의 <
줄탁동시>는 적대적이거나 진부한 대화 상황, 그도 아니면 침묵의 순간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극히 동시대적인 한국독립영화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독립영화에선 대화의 기술을 잃은 자들의 도착적 자기표현으로 폭력(
양익준의 <
똥파리>와
전규환의 <
애니멀 타운>)과 침묵(
박정범의 <
무산일기>)만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독립영화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짐승의 (대화의) 끝.’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쪽이 있다면 그건 여성들이다. 때로 그녀들은 거의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인 표현으로 -
이서의 <
사람을 찾습니다>나 양익준의 중편 <미성년>에서처럼 - 단조로운 (남성적) 대화의 세계에 신선한 공기를 더한다. 혹은 오직 그녀들만이 세속적인 소통의 기술과 그 필요성을 안다(
민용근의 <
혜화, 동>과 박정범의 <무산일기>). 비언어적 표현(제스처와 폭력) 혹은 반언어적 표현(적대의 언어)은 남성의 편에 언어적 표현은 여성의 편에 할당하는 식으로 전통적 역할에 있어서의 전도(顚倒)가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대체 이러한 전도가 겨냥하고 있는 영화적 지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