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크랭크 업

by.장건재(영화감독) 2011-11-08조회 3,075
잠못드는밤 스틸

지난 10월 14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금요일 오후. 등촌동의 작은 아버지 댁에서 새 영화의 촬영을 마쳤다. 시집간 딸이 오랜 만에 친정에 들러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날의 마지막 촬영 분량이었다. 섭외한 공간은 아파트 1층. 영화용 조명기를 설치하지 않고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일광을 보조광으로 이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건너편 아파트에 해가 걸리기 전에 촬영을 마쳐야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모녀를 투 샷으로 잡은 장면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배우와 함께 대사를 정리하고 원하는 느낌을 찾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리허설을 마치고 슛. 테이크는 여러 번 반복됐지만 비교적 제 시간 안에 오케이 컷을 건져낼 수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몇 장면을 더 찍었다. 컷 사인을 내고 몇몇 사람들과 짧게 눈을 마주쳤다. 네, 오케이입니다. 

큰 술렁임 없이 조용히 박수를 쳤던 것 같다. 우리는 마지막 공연을 마친 유랑극단의 반복되는 일상처럼 촬영한 데이터를 옮겨 담고, 장비를 정리하고, 필요한 주변 소음을 채집했다. 나는, 아르바이트 중인 촬영감독을 대신해 카메라를 잡고 있던 자리에서 현장을 둘러보았다. 모녀 역할을 맡은 두 여배우와 스태프 두 명이 전부였다. 극영화 작업을 하기엔 부족한 인원이었지만, 21회 차의 기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촬영을 마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제작을 결정하기까지 마음이 어수선했다. 일단 수중에 제작비가 없었고,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집도 곧 이사를 가야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희망을 걸었던 제작지원 프로그램에도 떨어졌다. 이제 남은 결정은, 찍거나 혹은 미루거나. 하지만 그럴 때가 있다. 조건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시기를 놓치지 않고 찍고 싶은 영화가. 이 영화도 결국 그런 의지로 진행된 것 같다. 말하자면 인디펜던트 스피릿. 

정리를 마치고 홍대 인근의 중국집에서 뒤풀이를 했다. 크랭크 업 며칠 전, 프로듀서를 맡은 아내와 제작비를 정산하면서, 쫑파티 비용을 조금 줄일 수 있다면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라도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알량한 씀씀이를 부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지만 풍족하지 못했던 현장을 돌이켜보면 거창하게 쫑파티를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손으로 꼭꼭 눌러 쓴 편지와 은행에서 찾은 새 지폐를 봉투에 담았다. 

잠시 뒤, 지방에서 일을 마치고 온 촬영감독도 합류했다. 우리는 촬영을 하면서 겪은 일화를 안주 삼아 술잔을 채웠다. 우리 나이도 비슷한 데 말 놓죠! 취기가 오른 여배우가 맞장구를 친다. 그래,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내외하더라도. 테이블 위에 놓인 쟁반 개수를 세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쯤 주문하지도 않은 탕수육이 나왔다. 중국집 주인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이 전부 다 계산하고 떠났다는 말을 전했다. 식당에 들어와 여배우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남자 배우. 뜻하지 않은 선물. 말하자면 쫑파티의 기적. 우리도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보잘 것 없지만 받아주세요.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끝까지 잘 마무리 할게요. 그리고 다음에는 돈도 되고 흥행도 좀 되는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내일이면 또 촬영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작업이 끝나면 매번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다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배우들은 차기작이 결정될 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하고, 나와 스태프들은 다시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대부분은 상업영화 현장을 떠나왔다.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무엇보다 영화 만드는 재미를 잃어버렸다. 말단 스태프로 수년 씩 버티다가 영화판을 떠나간 내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구에겐 영화가 정말 꿈으로 남았다. 아내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착취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창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현장을 만들어 보자. 때로는 열악한 환경의 독립영화가 배우와 스태프에게 더 가혹한 희생을 요구할 때가 있다. 하지만 영화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사람에게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포르투갈의 감독 페드로 코스타는 심지어 ‘만드는 과정이 전부’라고 말했다. 

2차로 자리를 옮긴 야외 카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화를 만들면서 지난여름을 함께 보낸 이 사람들과 내가 모두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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