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랑한다면

by.김태곤(영화감독) 2010-10-27조회 3,653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보고, 만지면, 행복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행복한 것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사랑이 다 한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게 나를 꽁꽁 싼 뒤, 공격도 않은 채 행복하지 않는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이 오면, 한 순간에 뒤돌아섰었다. 그즈음 되면 그 사람이 싫은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만날 불평을 하는 그 입술이 싫었고, 이불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 굵고 시커먼 머리카락도 싫었고, 더러운 샌들 안에 휘어진 엄지발가락도 싫었다. 그즈음은 그런 것들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것처럼 싫었다. 참으려고, 이해하려고, 감내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행복한 것이 아니고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상처 받기를 두려워하며 행복만 하기를 바랐을까? 

몇 주 전, 술자리에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와 만났다. 그녀는 술이 취해 나에게 부럽다는 말을 했다. 나는 뭐가 부럽냐며 되물었고, 그녀는 그 나이에 장편영화 한편을 만든 것이 부럽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자신도 영화학과를 졸업했고, 영화감독이 꿈이었지만, 그 꿈을 접고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술을 들이키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런 장면을 계속되는 데자뷰처럼 너무나 많이 봐왔다. 나 역시 영화학과를 졸업했다. 35명 정도의 동기가 있지만, 지금 영화를 하고 있는 동기들은 5명 안쪽이다. 어쩌면 지금은 더 줄었을지 모른다. 영화를 하고 있지 않는 동기들은 영화를 하고 있는 동기들을 만나면, 혀를 차며 안쓰러워하거나, 아예 영화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상한 열등감들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취기가 올라오면, “내 꿈을 대신 이루어라!”, “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어 좋겠다! 부럽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난 그런 말들을 들을 때면, 후회만 하고 있는 그들이 한심스럽고, 비겁하게 느껴져 화를 내며 “그러면 하던가!”라고 그 친구들을 몰아세웠다. 영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들, 많은 돈을 벌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기다림에 대한 두려움들 등등. 이러한 것들을 똑같이 안고 살아가는 나에게 계속해서 고생하라는 말 같아 친구들에게 화를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하던 하지 않던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되묻고 싶은 것은 포기하기까지 열렬히 사랑을 해 봤냐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고백한번 하지 못하고 평생 끙끙 앓으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예측 하려고 한다. 그래서 양다리 세다리를 걸치고, 이놈이 아니면 저놈, 저놈이 아니면 이놈으로 갈아 탈 준비를 하고,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발만 달달 떨고 있다. 물론 사랑의 대상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혹시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포기 해 버린 적이 없는지는 생각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잘 할 수 있을 까 없을까를 고민 했지 사랑할 수 있을까를 고민 해 본적은 없는 지도 생각 해 보아야 한다.

나 역시 과거에 누군가 왜 영화를 하냐 물어오면,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니 한다라고 말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어떻게 잘 한다는 것인지 이해는 가지만, 정확하게 모르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마치 ‘여자 친구에게 잘 한다.’, ‘공부를 잘한다.’라는 말처럼 모호하기 그지없고, 누군가가 칭찬을 할 때, 혹은 칭찬을 듣고 싶을 때 쓰는 단어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득 영화에 대한 나의 태도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나는 영화를 잘 하려고 했지, 사랑하고 있었던가? 칭찬을 받았을 때의 영광을 사랑했지, 거기에 따르는 고통역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잘 할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있다. 물론 인내하고, 이해하고, 감내하는 고통이 수반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언제, 어떤 이유로 떠나갈지도 모르는 불안감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죽음의 문턱에 서있을 때, 신이 나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지금 이 시간을 다시 살게 해 준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눈치 보지 않고, 미친 듯이 사랑하고, 시원하게 상처받는 쪽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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