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청춘물은 (살짝 과장해) 눈 크게 뜨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지경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지금 한국영화계에 청춘물을 비출 태양은 없다. 태양은 없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의도한 것처럼 이 장르의 대표 격인 <
태양은 없다>(
김성수, 1998)를 언급하고 말았다.
젊음을 뜨거운 에너지라고 할 때 당시 가장 잘나가는 청춘스타이던
정우성과
이정재는 태양의 지위에 버금갈 만했다. 그런데 태양은 없다니? 일차원(?)적으로 해석하면, 극 중 정우성과 이정재가 각각 연기한 도철과 홍기는 스물여섯 살 나이에도 뭐 하나 되는 게 없다. 도철은 권투 선수로 활동하려 해도 펀치 드렁크 증세가 심해 링 위에 오르기 쉽지 않다. 홍기는 강남에 빌딩 한 동 마련해 떵떵거리고 싶지만, 실상은 갚을 돈 때문에 쫓기는 신세라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 희망 없는 미래, 그래서 이들의 앞길을 밝혀줄 태양은 없다.
뻔한 해석은 재미없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삼차원으로 가보자. 태양은 하나다. 동시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다. 김성수 감독은 전작 <
비트>(1997)의 성공에 힘입어 페르소나 격인 정우성에 더해 이정재까지, <태양은 없다>에서 두 개의 태양을 손에 넣었다. 그 중 하나의 태양만을 하늘에 띄울 수는 없다. 이 둘을 값이 없는 수, 즉 영(零)으로 만들어 결국엔 하나의 존재로 합치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오든 말든 치고받고 싸우는 도철이 내리꽂는 직사광선이라면, 돈만 생겼다 하면 요행을 바라고 경마장으로 달려가는 홍기는 아스팔트 위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는 복사열 같다. 과연 이둘이 엇박자를 내며 누가 더 강한 열을 뿜어대는지 폭주할 때면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도철은 유일하게 삶의 안식처가 돼주는 여자 친구 미미(
한고은)와 불화하고 홍기는 곁에 도움 줄 이가 아무도 남지 않는 ‘영’의 존재로 수렴한다.
하지만 삶에 대한 방식이 서로 다른 도철과 홍기는 어두운 현실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좌절한 청춘’의 열쇳말로 한 묶음이다. 홍기는 마지막으로 보석상을 털어 지긋지긋한 빚을 청산하려다가, 도철은 미미의 만류에도 그런 홍기를 도우러 나섰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바다로 향한다.
도철 왈, “바다 위에서 해 뜨는 거 처음 봐.”
이에 대한 홍기의 답, “역시 촌놈이구먼. 하기야 도시에서는 저런 태양을 볼 수도 없지.” 청춘은 좌절하더라도 그 빛이 꺼지거나 사그라지는 대신 계속해서 발열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태양은 없다>의 한국 제목과 다르게 영문명은 ‘City of the Rising Sun’, 도시의 떠오르는 태양이다. 죽든지 말든지 바다로 뛰어든 홍기와 그런 홍기를 구하겠다고 뒤이어 바다로 뛰어든 도철은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는 한바탕 살풀이굿(?) 끝에 죽을 힘마저 소진한 후 새벽녘에 서울로 돌아온다.
이들을 맞이하는 건 도시의 떠오르는 태양. <
키즈 리턴 Kids Return>(기타노 다케시, 1997)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의 의미를 담은 태양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도철과 홍기의 모습은 더는 좌절한 청춘의 모습이 아니다.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다.” 존 레넌의 말처럼 태양 따위 비추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나는 도철과 홍기가 함께할 미래에 이 둘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태양은 없다> 이후 정우성과 이정재는 영화에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렇더라도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태양은 없다>에서 맺은 우정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을뿐더러 도철과 홍기로 혼란한 청춘의 아이콘을 연기한 정우성과 이정재가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동 세대 누구보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지금 한국영화계에 청춘물이 실종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정우성과 이정재처럼 우정으로 환원될 동시대의 청춘을 대표할 스타가 부재한 탓도 있다. 그래서 <태양은 없다>의 정우성과 이정재가 더욱 빛나 보이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