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도가 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 변두리의 한 아파트가 이 영화의 무대다. 급증한 전력 사용량 탓에 전기가 끊기자 동네 사람들은 아파트 바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그때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말 그대로 남편에게 개처럼 끌려 나온다. 동네 남자들은 수수방관한다. 남의 가정사에 공연히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팔을 걷어붙이는 쪽은 오히려 여성들이다. 여성이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처참한 모습을 보다 못한 동네 여자들은 힘을 합쳐 폭력 남편을 제지한다. 그 혼란 틈에서 싸움의 양상은 어느덧 여성과 남성의 성대결이 돼버리고, 경찰을 피해 옥상으로 피신한 여자들은 경찰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는다. 그들에게 얻어맞은 남성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졸지에 집단살인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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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날의 오후>의 개봉연도는 1995년.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급진적인 스토리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 흥행에도 성공했는데, 관객의 80%가 여성이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을 정도로 여성의 지지와 환호를 받았다. 그만큼 당대 여성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녹여낸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는 뜻일 것이다. (영화에서 이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도, 보도하는 앵커도 전부 여성이며, 여성단체가 영화 전면에 등장한다.) 평단에서는 <
안개기둥>(박철수, 1986),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김유진, 1990), <
그대 안의 블루>(이현승, 1992) 등 1980년대부터 한국영화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여성영화의 성취’라고 환대했다. 1995년은 이 영화 외에도 <
삼공일 삼공이(301, 302)>(박철수),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오병철) 등 새로운 관점을 지닌 여성영화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해다.
옥상으로 떠밀린 성난 10인의 여성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경찰과 대치한다. 여기서 권력의 축인 기동대장은 남성적 권위나 가부장제의 표지로 상징되며, 극의 선명한 안타고니스트다. 그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들은 사회 시스템에 반하는 비정상의 범주로, 계도해야 마땅한 훈육의 대상이다. 이러한 태도는 남편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 살인적인 더위에 아내가 옥상에 고립돼 있는데도 아파트 창문을 통해 “빨아둔 양말은 어디 있느냐”고 고함을 지르거나, “아이 밥은 누가 챙겨주느냐”고 타박하는 식이다. 그때 “내가 대신 챙겨줄 테니 걱정 말라”고 응수하며 연대하는 인물들은 여성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여성들의 투쟁을 아주 가까이서 숨죽여 지켜보는 남성 집단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휴가 기간 빈집을 털러 아파트에 잠입한 2인조 좀도둑이다. 바깥에 경찰 병력이 깔려 있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그들은 본의 아니게 그녀들의 싸움에 관심을 갖게 되고, 밤낮으로 그녀들의 저항적 목소리를 듣고, 급기야 폭력 남편의 저열함을 비난하며 심정적으로 여성들의 편에 선다. 가장 결정적 순간에 경찰의 진압 계획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도 그들이다. 이렇듯 영화는 시스템 바깥에 자리한 자들에게 존재감을 부여하며 기득권을 조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