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Db 온라인사료관 내 ‘인물로 만나는 영화인’ 섹션에서 두 번째로 소개할 인물은 배우 복혜숙이다. 1955년 대한민국 최초로 영화배우협회가 설립됐을 때 초대 회장을 지냈고, 당시 영화계에서 이미 ‘복혜숙 어머니’로 통했던 그녀의 활동에 대해서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1904년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일본 유학 시절 <추신구라 忠臣藏?Chushingura>(도미야스 디다오, 1926)를 비롯한 영화와 연극, 가부키에 감동을 받아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귀국 후인 1920년 김도산이 이끄는 극단 신극좌에 입단해 <오! 천명>으로 무대에 오른 이후 토월회 등에서 연극배우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1925년 현철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해 배움을 이어나간다. 여기에 더해 그녀는 경성방송국의 방송극 성우로도 활동했고, <강남달> <숙영낭자전> 등 다양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으며, 특히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1920년대 ‘만능 탤런트’로서 대중문화계 전반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복혜숙의 영화 필모그래피는 1923년 조선총독부 계몽영화 <방역>(윤백남)으로 시작된다. 이어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룬 작품 <농중조-새장 속의 새>(이규설, 1926)에 출연해 당시 유교사상으로는 용납되기 힘들었던 다리 노출, 남자 주인공과 손을 잡는 등의 파격적인 장면을 소화하며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후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기생 역으로 출연했고, <홍련비련>(이규설, 1927), <삼걸인(세동무)>(김영환, 1928)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그 시절 인기를 끌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배우’와는 달리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다양한 역할로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갔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다양한 나이대와 캐릭터를 소화한 유일한 배우 복혜숙의 행보는 광복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영화와 TV를 넘나들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성실히 역할에 임했다.
‘인물로 만나는 영화인’ 복혜숙 편을 통해서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작품을 해설과 스틸 사진으로 만날 수 있으며,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영역을 넓혀나간 진정한 배우이자 동료들을 위해 헌신한 한 배우의 삶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