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만화영화<홍길동>
신동헌(申東憲) 화백은 일찍이 나운규, 전창근과 민속학자 이두현 등 유명 문화계 인사를 배출한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다. 1927년 서예가 신기철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 신동으로 불린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1942년 중학생 때 이미 학생잡지 「형설시대」가 주최한 현상모집에 <묘안>이 당선되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우고, 1946년 서울대학교 건축과 재학 중에는 아르바이트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데생 실력이 뛰어났다. 이때 ‘코주부’ 김용환 화백을 알게 돼 그가 발행하는 주간신문 「만화뉴스」(1947)를 통해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스승인 김용환에게 들은 “하루라도 스케치를 걸러서는 안 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 동안 스케치북을 끼고 살았다. 6?25전쟁 중에도 그는 연합신문에 4컷 만화 <주태백>을 연재하는 등 일간지와 잡지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1. 여흥 시간에 스케치북을 보여주는 신 화백과 마이크를 잡은 필자(1988)
2. 신동헌 화백이 그려준 드로잉 초상화
<홍길동> 감독으로 변신한 「얄개전」의 삽화가
내가 신동헌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창간한 월간 학생잡지 「학원」을 통해서였다. 그는 그때 조흔파의 명랑소설 「얄개전」의 삽화를 그렸다. 1954년부터 그렸으니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경쾌하고 활달한 터치로 그린 귀여운 말썽꾸러기 중학생 주인공인 두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와 김성환의 <꺼꾸리군·장다리군> 등 연재만화, 정비석의 「홍길동전」을 비롯한 김내성의 「검은 별」, 최인욱의 「일곱별 소년」 등 소설에 이어 새로 시작한 이 연재소설은 큰 인기를 끌었다.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잊지 못하는 것은 「학원」과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11월호로 창간된 이 잡지의 공모 광고를 보고 응모한 나의 시 <국화는 피어도>가 다음 호에 조지훈 선생의 선평과 함께 첫 번째로 뽑혀 실린 것이다. 제주제일중학교 3학년 때였다. 이처럼 처음엔 신 화백을 만화가로서보다는 삽화가로 인식했다. 그의 데생은 개성적이고 탁월했다.
「얄개전」은 1965년 정승문 감독에 의해 처음 영화로 만들어지고 이 작품의 히트와 함께 <고교 얄개>(석래명, 1976), <여고 얄개>(석래명, 1977) 등 ‘얄개 시리즈’로 이어졌다.
신동헌 화백은 그 후 삽화와 만화의 영역에서 벗어나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피터팬> 등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이에 자극 받아 해외 전문 서적을 통해 익힌 애니메이션의 기초를 바탕으로 제작에 도전한다. 럭키 치약의 ‘춘향 편’ 등 CF 시리즈(제작 문달부, 1956)에 이어 그가 1초에 24프레임으로 만든 두꺼비표 ‘진로소주’ 파라다이스 편(1959)은 뽀빠이를 연상케 하는 선장의 캐릭터와 경쾌한 음악으로 인해 광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신동헌 프로덕션이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원기소’ 등 연간 100편에 육박하는 애니메이션 CF를 제작, 이 분야의 베테랑으로 떠오른다. 한국 최초의 만화영화 <홍길동>(1967)은 이와 같은 학습효과로 얻어낸 결실이다. 동생인 신동우 화백이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신동헌 화백이 감독한 이 작품은 대한극장에 개봉된 지 불과 4일 만에 관객 10만 명을 불러 모으는 흥행 기록을 세우며 한국 만화영화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23년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과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 이후 색체 대형 화면 시대를 연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까지 극영화 7편 만에 어렵게 이루어낸 애니메이션의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 길이만 남산 높이(260m)의 150배에 해당하는 3759m, 수작업으로 이루어낸 그림판이 12만 5300장에 이른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이성구 감독의 대표작 <장군의 수염>(1968)에 사용될 10분가량의 모노크롬 화면을 제작하기도 했다. 획일화된 권위주의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애니메이션이다.
노래 부르는 조건으로 받아낸 드로잉 초상화
나는 이 시기까지도 신동헌 화백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사석이 아닌 공개석상이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 신 화백에게 소개하자 그동안 쓴 글도 잘 읽었다며 자연스럽게 대해주었다. 나는 당연히 「학원」지에서 읽은 명랑소설 「얄개전」과 삽화에 대해 언급했다. 인사는 늦었지만 오래 사귄 구면같이 느껴졌다. 그는 굳이 ‘리북’ 출신답게 함경도 사투리를 구사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위였지만 좀처럼 어른 티를 내지 않았다. 솔직담백했다. 그 뒤 몇 차례 “호프나 한잔하자” 했지만 내가 술 한 모금 못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더는 권하지 않았다.
신 화백의 손에는 늘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애연가인 그는 베레모와 파이프 담배를 즐겼고 독특한 풍경이나 인상적인 포즈를 보면 놓치지 않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면서부터는 거의 어김없이 국내외 유명 연주자의 공연장을 찾아갔다. 맨 앞자리에 앉아 연주를 들으며 연주자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나도 이 스케치북의 덕을 톡톡히 봤다. 1988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주최 제주 행사 때 신 화백도 유현목 감독, 이영일 영화평론가, 김우종 문학평론가 등과 동행했는데, 저녁 여흥 시간에 나를 불러내 마이크를 잡게 했다. 나는 농담 삼아 신 화백이 내 모습을 그려주는 조건을 내걸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얻어낸 것이 여태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드로잉 초상화다. 그랬던 신동헌 화백도 2017년 6월 6일 91세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