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변장호는 1939년 4월 27일 경기도 이천 현암리에서 5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6.25전쟁 후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상경해 서울에 터를 잡았다. 상경 이후 한양공업고등학교에 진학, 졸업 후에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광산공학과에 입학했다.
취업이 쉽지 않던 시절 우연히 신필름의 모집 공고를 보고 영화 산업이 유망한 분야라 생각해 지원했지만 취업난으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명으로 사용한 이름이 ‘변장호’였다. 당시 신필름의 직원은 700~800명 정도였고 회사 버스가 운행될 만큼 큰 회사였다. 신필름에 연구생으로 합격한 뒤 6개월의 수련 기간을 거쳤다. 이 기간에 영화제작의 전반을 경험하고 배웠으며 2년가량 신필름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신필름이 어려워지면서 신필름을 나와 데뷔작을 준비했다. 데뷔작 <
태양은 내 것이다>(1967)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제작비가 마련되지 않아 제작 중간에 중단됐고, 결국 2년여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흥행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영화사 기획실에서 근무해야 했다. 다시 연출 일선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신아필름이 의뢰한 <
창>(1969)을 연출하면서부터다.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비로소 연출자의 궤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구술자는 1970년 <
비 내리는 명동거리>를 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제작과 연출을 겸했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의 흥행으로 선도금을 받고 추석 프로로 <
남대여>(1970)를 제작, 연출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데뷔작 <태양은 내 것이다>(1967)에 대한 아쉬움에서 탄생한 영화였다. 특별한 스타를 내세우지 않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쟁쟁한 스타들이 출연한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흥행했다.
1970년대 초반 영화계 전체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
눈물의 웨딩드레스>(1973) 역시 제작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김창숙,
사미자 등 당시 신인 배우를 대거 기용한 이 영화는 제작비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렸고 구술자가 가장 애정을 갖는 작품이 됐다. 스타 시스템이 일반적이던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구술자는 신인배우 기용에 담대한 연출가였다. 1970년대 후반 구술자의 주요 작품에 출연한 배우
김자옥을 발굴한 것은 물론
정윤희,
김희라,
신영일, 김창숙,
송재호 등 다수의 신인배우를 기용해 대작 <
청춘극장>(1975)을 완성했다.
구술자는 연출과 제작뿐 아니라 영화 관련 단체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구술자가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과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던 때는 대종상과 외화 수입 쿼터를 둘러싼 소동이 그치지 않던 시절이었다. 또 검열로 인해 영화 창작의 자유가 침해를 받던 시기였다. 구술자는 이런 시기에 단체의 수장으로 활동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 한편으로는 <청춘극장>(1975), <
O양의 아파트>(1978), <
을화>(1979) 등을 연출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1984년 영화사의 허가제가 등록제로 바뀌면서 구술자는 대종필름을 설립, 영화의 수입과 제작을 겸하게 됐고 중국과 국교 수립을 계기로 중국영화 수입을 시작했다. <붉은 수수밭>(장예모, 1988), <국두>(장예모, 1990) 등의 중국영화는 물론 스티븐 스필버그의 <
태양의 제국>(1989), 코스타 가브라스의 <제트>(1989) 등 작품성 높은 작품을 다수 수입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후학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본과 규모의 변화를 겪고 있는 한국영화 산업 현장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다. 또 새로운 미디어로 진출하기 위해 영상물 제작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현업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구술자는 후학 양성과 영화제 심사위원 등의 활동을 통해 영화계 원로로서 한국영화계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신필름에 입사하면서 시작된 영화인으로서의 인생은 이제 줄잡아 50년을 헤아리게 됐다.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서 활동한 변장호 감독의 이야기는 한국영화사의 소중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