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 내 한국 독립 극영화의 작품과 제작, 유통, 마케팅 경향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다. 대략 2014년 이후부터 2018년까지 햇수로 5년여의 기간 내 만들어진 독립 극영화가 대상일 것이다. 2018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독립영화 생태계 구조 분석 연구」를 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한 해 최소 1,200여 편의 독립영화가 만들어졌고 그중 극영화는 745편(64.1%)이 제작됐다. 표본이 된 영화제 출품작을 기준으로 산출한 수치임을 고려하면 훨씬 더 많은 영화가 있을 것이다. 영화 편수의 양적 증가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이 많은 작품을 정치하게 분석하는 일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작업임을 먼저 밝혀야겠다. 무리해서 ‘경향’이라는 말로 그간의 영화를 정리하는 일 또한 망설여진다. 독립영화라는 무정형의 활동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화로 한정 짓거나 박제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시대’라는 말만큼이나 ‘경향’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피로감도 상당하다. 그리하여 필자는 영화 안팎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따라 몇몇 영화를 임의로 분류하고 묶어볼 뿐이다. 이 시도가 연결 고리가 돼 최근의 독립 극영화의 흐름을 일부나마 읽어볼 수 있는 지형도가 되길 기대한다.
여성에 관한 새로운 시선 담은 독립영화
즉각적인 질문. 영화 안팎으로 주목받는 여성사를 독립영화는 어떤 시선과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가. 여성의 노동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린 <
마돈나>(
신수원, 2015)와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2015)를 거쳐 <
들꽃>(
박석영, 2015), <
꿈의 제인>(
조현훈, 2017), <
박화영>(
이환, 2018)을 보자. 특히 뒤의 세 편은 감독들의 데뷔작으로 가출팸을 중심으로 무리 내의 여성과 성소수자를 주목한다. 여성이 거리로 나왔을 때 많은 경우, 여성은 성적 대상이 되거나 피해자의 위치에 있어왔다. 거리라는 거처의 임시성은 단순히 여성의 물적 토대의 불안정만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성이 주변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그때 여성의 감정 상태 또한 일시적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런 여성의 상태를 영화가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쪽의 예가 <
소공녀>(
전고운, 2018)라면, 영화가 그런 여성의 상태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달리 그 임시성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끝난 경우가 <
이월>(
김중현, 개봉 예정)이다. <소공녀>의 미소(
이솜)는 집(방)을 포기하고 위스키와 담배를 택한다. (때는 담뱃값이 대폭 인상된 2015년) 미소는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며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며 적극적으로 취향을 사수한다.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미소의 선택에선 일종의 반항 냄새가 난다. ‘소확행’ 시대에 등장한 변형된 낭만주의자 같다. 그 끝에 미소는 집, 친구, 애인조차 없는 완벽한 혼자가 돼 한강 풀숲의 작은 텐트로 간다. ‘Microhabitat’라는 영문 제목을 기억한다면 미소의 자발적 홀로 되기에는 관계의 연속성이 감지되지 않는다. <이월>의 민경(
조민경) 역시 거처도 관계도 일시적이다. <소공녀>의 미소가 주변에 선의를 보이고 ‘여성’을 향한 성적 시선, 질문, 돌봄과 감정 노동을 일정 부분 떠안고 감내한다면, 민경은 의도를 떠나 타인을 향한 악의가 있고 필요에 따라 자신의 여성성을 활용한다. 민경은 관계가 진척되는 데 두려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때론 관계의 호전을 스스로 망가뜨린다. 가난이 부른 민경의 감정 상태인가, 민경의 감정 상태가 가난을 악화하는가. 둘 다인 것 같다. 생존을 향한 악착같음만이 민경을 움직이게 한다. 생존 기계라고 하면 <
파란 입이 달린 얼굴>(김수정, 2018)의 서영(
장리우)도 있다. 악으로 버티는 민경과 서영에게 수치, 모멸, 도덕, 윤리라는 개념은 가치가 없다. 결국 완벽하게 혼자가 된 여성들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텐트로 들어가 버렸고(미소), 지상을 떠나 산 자의 것이 아닌 듯한 웃음을 보이며(민경), 넋을 잃은 듯 각목처럼 굳은 얼굴(서영)이다. 오롯이 단자가 된 여성들이다.
창작자의 자의식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독립영화
현실의 핍진성을 견지하며 여성의 거리사 혹은 거리의 여성사로 묶일 만한 앞의 영화들과 달리 창작자의 자의식을 강력하게 드러내며 자기 실험을 거듭하는 경우가 있다.
장우진,
김대환,
정가영,
김용삼,
백승기 등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영화는 각기 다르지만, 그들의 영화 문법이 열악한 제작 조건과 맞물려 수정 또는 결정됐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창작자의 지향과 현실적 조건 사이에서 자기 방식대로 접점을 찾은 이들의 생산력 또한 상당하다. (주목받는 데뷔작 이후 두 번째 영화를 만들지 못한 채 침체한 경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이유도 작용했으리라 짐작한다.) 장우진이 대표적이다. 데뷔작 <
새출발>(2014)로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을 받은 후, 그는 월세 보증금 1500만 원으로 두 번째 장편 <
춘천, 춘천>(2018)을 만들었다. 동갑내기 고향 친구인 <
철원기행>(2016)의 김대환과 제작사 봄내필름을 차리고 자신을 포함해 스태프 3명이 이룬 성과다. 봄내필름은 규모의 최소화, 감독 겸 프로듀서로서의 1인 다역의 방식으로 김대환의 <
초행>(2017)도 제작했다. 특히 장우진은 촬영 전 배우와 긴밀히 협력해 현장의 우연성에 기대 서사화 전략을 취하고 영화의 형식적 시도로 이어간다는 점, 배우의 연기 연출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정 공간을 맴돌며 인물의 동선과 시간의 겹침, 반복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
겨울밤에>(2018)에 이르러 더욱 정교해졌다. 2년 전 제작해 2018년 개봉(9월 26일)한 <춘천, 춘천>의 배급 방식도 언급할 만하다. 개봉 비용 절감을 고려, 장우진은 배급사(무브먼트)에 단관 개봉을 먼저 제안했고 독립영화 전용관인 인디스페이스에서 장기 상영을 택했다. 장편 <
비치 온 더 비치>(2016), <
밤치기>(2018)를 개봉한 정가영은 주인공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며 자기 반영이라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금기를 넘나든다. 정가영의 주인공은 남성에게 공세적으로 구애하는 여성이고, 그의 영화는 메타 영화인 경우가 많다. ‘DIY’ 식으로 연기·연출을 겸하는 김용삼, 이른바 가내수공업 저예산 C급 코미디를 표방하는 백승기도 창작욕과 생산력 간 교집합을 마련했다.
시대 이슈를 파고드는 독립영화
시대의 공기를 읽는 전혀 다른 방식의 영화로
오멸의 <
눈꺼풀>(2018)과
이옥섭의 첫 장편 <
메기>(개봉 예정)가 있다. <눈꺼풀>은 오멸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3일 후 시나리오를 쓰고 곧바로 촬영에 들어가 완성한 작품이다. 오멸은 영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영화는 2018년 4월에야 개봉했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기록한 <메기>는 몰래카메라 성범죄가 만연한 사회에서 감지되는 의심과 두려움, 지진과 싱크홀 등 예측할 수 없는 공포를 코믹 SF적 상상으로 엮었다. 한편 배우와 연기의 세계가 얼마나 심오한 감정 교육과 치열한 감정 노동과 맞물릴 수 있는지를 노련하게 보여준
안선경의 <
나의 연기 워크샵>(2017)과
문소리의 <
여배우는 오늘도>(2017)는 퍽 인상적인 작업이다. <
살아남은 아이>(
신동석, 2018)는 근작 중 보기 드물게 드라마투르기의 정공법을 택해 초지일관 밀어붙였다. 다르덴 형제의 <
아들 The Son>(2002)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은 듯한 인상이 짙은 건 사실이다. 내러티브, 서사 중심의 극영화 분류법에서 보자면 낯설 수 있는 조금 다른 방식의 접근도 언급하고 싶다. 풍경과 풍경이 된 인물의 기록 혹은 스케치인 <
얼굴들>(
이강현, 2017), 장소 특정적 춤과 춤추는 신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송주원의 퍼포먼스 비디오, 극장과 성소수자들의 접점 구실을 하는 극장에서 출발해 스크린의 확장과 인터페이스의 가능성까지 경험하게 하는 <
야광>(
임철민, 2018) 등은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했거나 그 문법에 익숙한 창작자가 시도하는 다른 방식의 극적 말하기다. 반대로 다큐멘터리의 드라마화도 눈에 띄는 변화다. <
B급 며느리>(
선호빈, 2018)는 관음증적 시선으로 가족 내 피학성과 가학을 드러내고, 유튜브 브이로그를 보는 듯한 <해피해피 쿠킹타임>(유재인, 2017)은 연출자 본인의 드라마가 슬며시 끼워져 있다.
독립영화 배급의 한계 상황
독립 극영화 제작·배급·유통과 관련해서는 독립 극영화를 전문적으로 배급하는 한 독립영화인에게 들은 뼈 있는 말을 옮기는 것으로 갈음하려 한다. 그는 관객 동원에 참패하고 있는 독립영화 시장에서 <소공녀>, <
죄 많은 소녀>(
김의석, 2018), <
영주>(
차성덕, 2018) 등 그나마 관객의 선택을 받은 작품이 하나같이 CGV아트하우스 배급작임을 언급했다. 창작자들 역시 안정적인 배급 환경을 지향하며 만들어진 결과라는 설명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경사도가 심화됐음을 직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또한 <
땐뽀걸즈>(
이승문, 2017), <
피의 연대기>(
김보람, 2018) 등을 예로 들며 최근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이 시대의 요청을 감각적으로 읽어내 관객과의 접점을 찾는 데 비해 극영화 창작자들의 시선은 지극히 한정적이며 창작자의 자족적 작업에 매몰돼 있음을 꼬집었다. 이런 문제 제기는 좀 더 면밀한 검토 과정이 필요하겠으나 필자 역시 ‘경향’이라는 말로 너무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반복되는 소재, 캐릭터, 설정의 출현을 목격해온 터라 고민해볼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캐리어와 가방 하나로 정리되는 삶, 길 위로 나앉게 됐지만 그게 뭐 어떠냐는 식의 악의, 무기력, 무감, 무신경, (특히 단편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편의점과 재개발 지역과 폐가 등은 시대의 반영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인상 수집에 그칠 때가 있다. 이러한 필자의 고민이 독립영화에 관한 섣부른 판단 내림이 아니라 독립영화의 여러 긍정의 측면과 함께 그 활기의 모색을 위해 세심히 봐야 할 면면을 드러내는 시도로 읽히길 바랄 뿐이다. 한편 부산에 거점을 둔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독립 단편 배급에 중점을 둔 필름다빈과 같은 지향이 뚜렷한 신진 배급사의 등장, 대구의 극영화 창작자들의 약진, 강원 영화인들의 미디어 활동 등은 앞으로가 더 궁금한 대목이다. 물론 독립영화의 활기와 활로 찾기는 지난 정권하에서 독립영화가 입은 내상을 시급히 회복하는 데서부터임은 자명하다.